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62화
62. 합의
“…….”
유긍달과 황보제공이 합류한 이후에도 침묵은 계속 흘렀다. 유긍달은 나에게 첫인사를 건네고 나서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있었다.
‘아니 초청한 쪽이 먼저 뭔가 제안을 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들의 얼굴을 보기만 했다. 임희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묵묵히 있었다.
결국 장내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황보제공이었다.
“이거 참. 답답해서 내가 말해야겠군.”
황보제공은 호족이면서 또한 뛰어난 무장이기도 했다. 원래 이 시대에 황보 가문은 대호족이면서 유명한 무장 가문이었다.
황보제공 본인도 전장에서 일군을 지휘했다. 또한 황보제공의 동생 황보금산은 유금필 정도는 아니라도 고려에서 진짜 중요한 장수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답도 없는 기싸움을 못 참는 모양이었다.
“이리 우리 부녀를 초청하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임희가 드디어 말을 꺼낸 황보제공에게 맞장구를 쳐줬다. 계속 말을 꺼내 보란 의도 같았다.
“탁 터놓고 말하자면 본래 나는 상산백의 따님이 정윤 전하와 맺은 혼약을 지키기를 바랐습니다. 정윤 전하께서 서둘러 혼사를 하셔야 나라가 안정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뭐 이제는 상산과 정윤 전하의 결합이 오히려 작금의 나라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산백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속을 터놓는다고 해놓고 전혀 진심을 보이지 않고 황보제공이 말했다.
‘아니 뭔 나라의 안정 타령이야? 그냥 자기들 생각에 고만고만한 상산이 정윤에게 붙어봤자 대세에 지장 없으니 혼사를 밀어붙이다가 은 제련 건도 있고 내 활약으로 상산의 힘이 커지니 혼사를 막으려고 이러는 건데.’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혀를 찼다.
“허허허, 너무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임희는 여전히 웃으면서 속내를 감췄다.
“그동안 상산백께서도 이 혼사에 미온적인 것은 사실 아니었습니까? 뭐 힘을 키웠으니 이제 와서 상산백께서 훗날의 외척이 되고 싶다고 마음을 바꾸셨으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시고 이 혼사를 피하고 싶으시다면 우리도 좋은 방도가 있습니다.”
황보제공이 다급한 기색으로 본론을 꺼냈다.
‘해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결국 내 뜻대로 대호족들이 정윤과의 혼사를 막기 위해 방안을 강구해 온 모양이었다.
지난 몇 달간 상산의 힘을 키우기 위해 동분서주한 내 노력이 통한 것이다.
“내가 어찌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입니다.”
이제 자신이 어물거리면 답답한 황보제공이 계속 중요한 말을 꺼낼 걸 깨달은 임희가 애매하게 말했다.
황보제공이 그걸 보고 또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상산과 충주는 그다지 멀지 않으니 상산백과 나는 동향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동향 사람들끼리 나누면 더 잘 통할 것입니다.”
유긍달이 교묘하게 끼어들었다. 처음에 침묵이 흐를 때도 생글생글 웃으며 태연했던 유긍달이었으나 지금은 많이 갑갑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본인이 직접 나선 것이다.
황보제공은 안도하는 기색으로 몸을 뒤로 기대며 빠지는 기색이었다.
“상산에서 확실히 충주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임희 역시 이제는 유긍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산백의 의사야 더 묻지 않겠습니다. 아마 이 고려에서 진주원에 오는 것이 가장 불편한 사람이 상산백일 텐데도 오늘 이리 오셨으니 말입니다. 결국 상산백께서도 우리와 생각이 같으신 것 아닙니까?”
유긍달이 그점을 지적했다.
“흐흐흐,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자 여태 한쪽에서 가만히 앉아 있던 임명필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임희도 더 이상은 가식을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뭐 맞는 말입니다.”
임희도 이제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편하게 말했다. 원래 임명필과 사이가 안 좋은데 계속 가식을 떠느라고 임희도 지친 듯했다.
“우리 모두가 이제는 정윤 전하와 상산의 혼사를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상산백께는 원래 이득이 아니었고 이제는 나나 다른 사람에게도 이롭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모두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폐하 아닙니까? 폐하께서는 이 혼사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유긍달은 시원시원하게 논의를 진전시켜나갔다.
“확실히 신하로서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거스르려 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니 충주나 황주에서 나서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임희도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아버님은 왕건과 친분이 있는 사이고 충성심도 강하니. 이 혼사를 무르는 것이 상산을 위해 이득이지만 직접 나서서 왕건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긴 또 싫으신 거야. 나섰다가 왕건에게 찍힐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유긍달, 황보제공 등이 정면으로 나서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싶으신 거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유긍달의 반응을 살폈다.
“우리들도 감히 정면에서 나서서 이 혼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폐하의 집안일이 아닙니까? 우리 같은 신하들이 나서는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유긍달이 멀쩡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보제공도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산이 그 문제에 앞장설 수는 없습니다.”
임희는 난감한 기색으로 답했다.
“그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나서기 싫은 일이니 상산백께서도 나서기 싫으실 것입니다.”
유긍달은 또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그럼 뭐 어쩌자는 거야?’
안 나선다는 유긍달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순간 유긍달은 힐끗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리 신하들은 폐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지만 백성들의 민심과 여론이 이 혼사에 대해 반대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폐하께서도 이 혼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상산백의 따님께서 나서주셔야 합니다.”
“백성들의 여론을 일으킨다는 것은 좋은 방책이지만 딸아이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임희가 물었다.
“상산백의 따님께서 그동안 여러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 수많은 호족, 무장, 문신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보통 백성들에게는 그 이름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상산백의 따님께서 백성들 사이에서도 그 얼굴과 이름을 알리기만 한다면 백성들 사이에서 혼사에 관해 여론을 형성하는 것은 쉽습니다.”
유긍달이 말을 들은 임희도 뭔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만간 팔관회가 열릴 시기입니다. 그럼 잡찬 어른이 원하는 것이 딸아이가 팔관회 때…….”
“맞습니다. 팔관회 날 국선을 선발할 때는 개경과 인근 주민 수만 명이 다 지켜봅니다. 그때 활약하면 한순간에 전국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상산백의 따님이 나서서 그때 백성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 그 이후 일은 쉽습니다. 백성들이 이름과 얼굴을 아는 사람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는 것은 장내에 모인 우리의 힘으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혼사를 막는 여론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유긍달이 말을 들은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진짜 가능성이 높은 계책이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유긍달의 계획을 정리했다.
유긍달의 생각은 상산이든 충주든 황주든 호족들이 감히 정면으로 왕건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여론을 일으키고 그 여론을 빌미로 혼사를 중단하자고 왕건에게 청한다는 구상이었다.
그 사전 작업으로 내가 팔관회 국선 선발에 나서서 이름과 얼굴을 백성들 사이에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론 조작이야 일찍이 호족들이 궁예 정권을 붕괴시킬 때도 해봤던 거고. 정권을 붕괴시킬 여론도 조성했는데 이 정도 혼사 하나를 막는 여론을 만드는 거야 식은 죽 먹기다.’
아마 임희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만 그런 여론만 만들었다고 폐하께서 우리 뜻을 들어주신다는 확신은 없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여론을 무시하고 버티시면?”
다만 워낙 신중한 성격의 임희답게 일이 실패할 가능성도 면밀히 살피는 것 같았다.
“상산백께서도 병부령을 역임하셨으니 지금 전황에 대해 아실 것입니다. 팔관회가 끝나고 겨울이 되면 견훤이 다시 진군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겨울이라 배를 보낼 수가 없으니 나주는 무조건 붕괴할 것이고 사벌주도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백성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폐하께 간곡히 청한다면 폐하께서 우리들의 뜻을 저버리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긍달이 담담하게 말했다.
‘확실히 그때 가면 궁지에 몰린 왕건이 호족들의 의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끝났군.’
만전을 기한 유긍달의 계책이었다.
“과연 그렇습니다.”
임희도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유긍달의 말대로 하겠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런 임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유긍달은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이를 위해서는 상산백의 따님이 팔관회 때 국선선발전에서 활약을 잘해주셔야 합니다. 국선은 4명이나 뽑는 것이니 여기 모인 사람들이 상산백의 따님을 국선으로 밀어 올리는 것이야 쉽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국선이 되는 것을 넘어서 수많은 백성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셔야 합니다. 총명하시고 재주가 많으시니 그 부분은 알아서 하실 것이라 믿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국선선발전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인지는 나에게 맡긴다는 소리였다.
‘아마 원래 유긍달이 일처리를 이리 하는 것 같군. 커다란 계책은 자기가 정해놓고 이런 세세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일임하고. 내가 신례를 치를 때도 비밀통로에 나를 넣는다는 세세한 계책은 유설란 등이 짰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유념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일을 다 마친 걸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신 대광께서도 동의하시고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유긍달은 임명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임명필도 그런 다짐을 했다. 모든 합의가 됐으니 더 이상은 이 불편한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가볍게 예만 갖추며 나와 임희는 몸을 일으켰다.
* * *
“결국 연우 네 말대로 됐구나. 허허.”
상산저로 돌아오는 수레 위에서 임희는 웃으면서 말했다.
“예?”
“저 사람들이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뭔가 방법을 강구해서 올 거라고 네가 예상했는데 결국 그리됐구나. 네가 명성을 떨치니 저들이 저리 나온 것이다. 유긍달의 머리가 과연 비상하다. 나는 솔직히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계책을 마련하다니. 우리로서는 별 부담도 없고.”
임희는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토록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는데 뭔가 허전해. 하긴 군에서 전역할 때도 그랬지. 전역하기 3달 전부터 진짜 기쁘다가 막상 전역 당일이 되자 무덤덤했어.’
나는 지금 내 심정을 그렇게 분석했다. 확실히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최승우와 대결하고 부석사며 표천현을 뛰어다닐 때는 힘든 와중에도 신이 났다.
그런데 막상 내 뜻이 다 이루어진 지금은 별 감흥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국선 선발전 때는 구정에 모인 수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노래도 하고 춤을 춰야 하는데 괜찮겠느냐?”
여러 차례 팔관회를 직접 보고 국선 선발전을 지켜본 임희가 걱정스레 말했다.
“아 그건.”
나는 유긍달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그 일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임희가 저리 말하니 또 막막해졌다.
그런 일엔 한 번도 경험이 없긴 했다.
“너무 걱정하진 말거라. 돈을 좀 들이면 그런 거야 다 해결이 될 거다.”
임희가 싱숭생숭해하는 나를 그리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