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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63화 (63/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63화

63. 국선

어느덧 9월이었다. 팔관회는 11월 15일에 열리는 행사였다. 아직 시간이 2달이나 넘게 남았지만 개경의 거리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선선발전에 나서기로 한 나도 지금부터 서둘러야 했다.

다만 국선선발전을 준비하면서 나는 지략이 뛰어난 이 시대 유력자들도 일의 세세한 부분은 잘 모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나는 팔관도감에 가서 국선선발전에 참가하겠다는 신청서를 냈다. 신청서를 받아든 팔관도감의 관리는 여러 주의사항을 나에게 일러주었다.

“국선선발에 나서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비용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비용을 초과할 경우 자동탈락 되니 명심하십시오.”

“예? 그런 규정이 있었나요?”

돈을 바르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임희의 말을 굳게 믿고 있던 나는 크게 당황했다.

“비용 제한을 하지 않으면 돈 있는 집안은 그냥 무한정으로 돈을 쓸 텐데 그게 문제가 안 되겠습니까? 아니 무엇보다 국선선발이 그럼 가문의 재력으로 결정되는데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리고 가문의 사병, 하인, 노비 등을 동원해서 무대를 준비해도 안 됩니다.”

노련해 보이는 관리는 당혹스러워 보이는 내 얼굴을 보고 규정을 자세히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는지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누구와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까? 아니 무엇보다 왜 굳이 그런 규정을?”

내 계산과 계속 어긋나는 관리의 말에 나는 살짝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야 당연히 옛 신라의 국선들이 그랬듯 가족, 친구나 아는 사람들을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라의 국선들도 낭도들을 모을 때 돈을 줘서 그들을 부른 게 아니라 덕망으로 모았습니다. 오히려 낭도들이 국선을 위해 돈을 썼죠. 아니 하인들을 동원할 수 있으면 하인들만 무대를 준비하느라 고생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국선선발에 나서는 당사자들은 편하게 빈둥거리면서 그걸 지켜보고요. 허허허.”

관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

정곡을 찌르는 관리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은제련도 해서 돈도 많이 모았겠다, 그걸 이용해서 좀 편하게 빈둥거리며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역시나 만만치 않은 게 규정으로 그런 가능성은 원천차단하고 있었다.

하긴 옛날 신라에서 젊은 시절 국선으로 뽑힌 사람들은 나중에 다 유력한 재상이나 장군이 되었다. 그 정도로 신라에서는 중시되던 자리였다.

고려시대에서는 팔관회 때 이렇게 무대를 준비해서 4명을 뽑아 국선으로 삼았다.

신라만큼 중시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렇게나 뽑지는 않는 것이다. 덕망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려는 의도가 보였다.

“또 다른 규정은 없나요?”

나는 관리에게 물었다.

“국선선발전 자체에 여러 사람이 나서기도 하고 팔관회 때는 다른 행사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무대를 준비하더라도 1각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제가 여러 해 팔관회를 봤는데 1각은커녕 그 3분의 1의 시간을 채우기도 힘듭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외의 규정은 없습니다. 무대는 어느 무대를 준비해도 됩니다.”

관리가 말했다. 1각이면 오늘날로 치면 15분가량 되는 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한숨을 쉬며 신청서를 썼다.

“신청서는 신중하게 내십시오. 준비하다가 안 될 것 같아 그만두려고 해도 취소가 안 됩니다. 신청서를 내면 무조건 무대에 올라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가문의 재력과 사람을 못 쓴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중간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망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주의하십시오.”

관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무조건합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나는 관리에게 말했다. 혼사를 피하기 위한 큰계책이 아니라면 이런 국선선발전 같은 것은 절대 도전 안 했을 건데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유긍달, 황보제공, 임명필이 밀어주면 국선이야 무조건 되는 거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만 고민하자.’

* * *

어쨌든 신청서를 제출하고 상산저로 돌아온 나는 여러 사정에 대해 임희에게 알렸다. 그런 규정에 대해 들은 임희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지난 수년간 그저 팔관회 때 국선선발을 구경만 해서 세세한 규정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냥 돈 좀 썼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잘 몰랐다.”

잘못된 정보를 전한 임희는 매우 미안해 하는 기색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그 정도야 뭐.”

그 표정을 보고 나는 별것 아닌 척 임희를 위로했다.

“어쨌거나 충주, 황주 쪽에서는 네가 무대를 꾸밀 때 신성한 느낌을 주기를 바라는 듯하구나. 그래야 향후 여론을 만들 때 효과가 크니. 이 점을 염두에 두거라.”

임희는 어전에서 유긍달 등과 만나서 의견 교환을 한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가족은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우선 일을 봐줄 1명은 확보했다. 어서 연객이를 불러오너라. 연객이의 친구들도 끌어들이면 머릿수를 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임희가 손뼉을 치며 하인을 불러 지시했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하고 달려온 임연객은 기겁을 했다.

“국선선발전? 연우 네가? 너는 전혀 그런 끼가 없잖아. 하하하.”

일이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는 임연객은 반쯤 비웃듯 말했다.

“어허, 정성껏 도와주거라.”

그 모습을 보고 임희가 약간 엄한 어조로 말하자 즉시 임연객은 고개를 수그렸다.

“어쨌든 신청서를 냈으면 무를 수도 없으니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구색은 갖춘 무대를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연우를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임연객의 진지한 말에 임희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그래, 누이를 잘 돕도록 해라. 기실 나도 좀 나서서 연우를 도와야 하는데 나 역시 지금 조정에서 팔관회 연습 때문에 바쁘다. 구정에서 폐하께서 모든 중신들에게 하례를 받으셔야 하는데 그 연습을 요새 시작하고 있다. 예법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그걸 틀리는 중신들은 왜 이리 많은지. 한동안은 내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으니 잘 진행해라.”

“예, 아버님은 쉬십시오. 많이 고되실 것 같습니다.”

임연객이 의젓하게 말했다.

“그럼 너만 믿으마. 연우는 국선선발을 위해 상산저를 마음껏 이용해도 좋다. 친구들도 내 허락 없이 초대해도 좋고.”

임희는 그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중간중간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처소로 향했다. 좀 쉬려는 모양이었다.

“꺄하하하. 너가 국선에 도전한다고?”

그리고 임희가 사라지자마자 바로 임연객은 또 웃기 시작했다.

“아버님께 가서 이를게.”

보다 못한 나는 울화가 터져서 다시 임희의 처소로 가려고 했다. 그러자 임연객은 굽신거리면서 나를 붙잡았다.

“이제는 진지하게 도울게. 나도 예전에 학관에서 친구가 국선선발에 나선다기에 도운 적이 있다.”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확실히 임연객이 방금 한 말을 보면 한번 신청서를 내면 무를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뭔가 경험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오라버니는 뭘 하면 좋겠어?”

“우선은 사람을 모아놓고 논의를 시작해야지. 2달 동안 대가 없이 도와줄 사람들을 말이야. 그래야 뭐가 되지. 우리 단둘이 이야기를 해봤자 의미 없지.”

임연객의 말을 듣고 나는 난감함을 느꼈다. 첫 관문부터 정말 만만치 않았다.

‘나를 위해 발 벗고 나서줄 사람이 얼마나 될지.’

“오라버니는 친구가 많지 않아?”

나는 병부에서 관리로 일하는 임연객의 인맥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내 문제면 몰라도 친구 동생 일에 나설 사람이 어딨냐? 아니 연우 너는 학관에 다니는데 뭐가 걱정이야. 거기서 사람을 모으면 되는데.”

임연객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아니 그게 쉬운 게 아니야.”

나는 한숨을 쉬며 답했다.

* * *

어쨌든 사람을 모아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나는 다음 날 학관에 나왔다. 그래서 여러모로 머리를 굴리며 근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오지수가 뛰어오더니 외쳤다.

“연우 언니! 언니도 국선선발에 나선다면서요?”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니?”

나는 기가 막혀서 물었다. 어제 신청서를 냈는데 어떻게 오늘 바로 이런 말이 도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 잠시 나주원에 들리셨는데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오지수가 말했다. 하긴 왕건의 딸이니 정보가 바로바로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어머, 정말이니?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

그러자 학관에 오면 습관적으로 붙어 있는 배수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어제 신청서를 넣었어. 오늘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어.”

“아니 뭘 고민해. 여기 모인 우리들이 도와주면 되지. 와아. 나도 국선선발에 이런 식으로나마 참여하는 기회가 오네. 아예 어제 신청서를 넣을 때 함께 가면 더 좋았을 텐데.”

배수현이 당연하다는 듯이 외쳤다.

“맞아, 맞아.”

“연우가 나설 줄이야. 이건 기대 안 할 수 없겠는데.”

배수현과 항상 어울려 다니는 아이들도 말했다. 나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설 기세였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결국 배수현이나 저 아이들은 정윤파로 분류되고 그래서 나에게 호의를 갖고 나서주려는 거야. 그런데 나는 지금 정윤 왕무와의 혼사를 파토내기 위해 이러는 건데.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그래서 나는 학관 사람들에게 차마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알아서 나설 기세였다.

‘너희들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 가만히 안 있겠는데.’

이미 배수현을 비롯한 아이들은 서로 뭘 할지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언니. 나도 껴도 되죠? 설마 나는 도움 안 된다고 빠지라고 하는 건 아니죠?”

곁에서는 오지수마저 그렇게 보챘다.

“연우 너가 학관을 끝내고 매일 한림원에 가서 시간이 없어. 국선 선발을 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오늘 한림원에 가서 한 2달 휴가를 내든가 해야 할 거 같아.”

배수현은 어느새 내 비서라도 된 것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을 지정해 줬다.

“아니. 그게.”

나는 손사래를 치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배수현과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더니 입을 모아 말했다.

“내일은 모두 연우 집에 한 번 모여 큰 계획을 짜자!”

“그래. 오늘 바로 모이는 건 무리고 내일 모이는 게 딱 좋다.”

이미 내가 어찌하기도 전에 모든 게 이루어져 버렸다.

‘이걸 나중에 어찌 수습하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학관 수업을 마치고 한림원으로 향하는데 최언위가 말했다.

“연우 아가씨께서 국선선발에 나서셨다고 들었습니다. 허허허. 뭐 잘해보십시오. 국선의 이름이 가볍지 않습니다.”

‘이미 소문이 다 퍼졌구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도 배수현이 시키는 대로 우선 청했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제가 매일 한림원에 나올 시간이 없을 듯합니다. 2달 만이라도 휴가를.”

“그 문제는 폐하께서 오늘도 한림원에 나와 계실 것이니 물어보십시오. 제 생각에는 흔쾌히 허락하실 것입니다. 폐하께서도 기대가 큰 것 같았습니다.”

최언위가 말했다.

‘역시 왕건이 소문을 퍼뜨린 원흉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림원에 들어섰다.

“오, 연우야. 여기는 왜 왔느냐? 국선선발 준비를 하느라 바쁠 텐데. 허허허. 그동안 활약을 고려하면 연우 너가 뭘 보여줄지 기대가 크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왕건이 큰소리로 외쳤다. 장내의 시선이 다 내 쪽으로 쏠려서 나는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왜 사람 부담되게 저렇게 떠들고 다니는지.’

근데 왕건에게 뭐라 할 수도 없어서 나는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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