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61화
61. 초청
“자 이 현판은 여기 잘 보이는 곳에 걸어주세요.”
나는 일꾼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잘 보이는 곳이라니. 좀 부끄럽습니다.”
내 곁에서 구족달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고려에서 제일가는 명필이신 구 학사님이 선뜻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려 제일의 명필은 학관에서 최승우와의 일전에서 이긴 연우 아가씨 아닙니까? 어찌 제가?”
“어휴.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꼼수로 이긴 사건을 가지고 구족달이 진심으로 그리 믿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게 내가 구족달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도 일꾼들은 내 지시대로 움직였다.
-제은보국(製銀報國)
구족달의 힘 있는 서체로 적힌 현판이 은제련소 정문에 걸렸다.
“하하하.”
그 모습을 보니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일꾼들도 모두 박수를 쳤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공사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표천현에서 왕건에게 약속을 받아내자마자 부랴부랴 개경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임희에게 알렸다.
내 말을 들은 임희는 지체하지 않고 상산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 제련소를 짓기 시작했다. 은제련을 통해 상산이 얻게 될 이익을 알아본 것이다.
왕건 역시 은제련소의 설립을 허가해 주는 것을 넘어서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하긴 그게 지원인지 간섭인지는 헷갈렸지만.’
내가 상산 사람들과 제련소를 짓는데 왕건은 자주 한림원에서 나에게 터는 여기가 좋겠다고 말도 하고 제련소 규모에 대해서도 조언을 건넸다.
결국 국왕인 왕건의 압력에 나는 그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왕건이 뭐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니.’
표천현에서 수로를 통해 은광석이 오기 쉽게 은제련소는 예성강가에 지어졌다. 개경 인근의 지리에 정통한 왕건이 추천해 준 자리라서 확실히 입지가 좋았다.
“이거 잘 되는 거겠지? 상산에서 그동안 비축해 둔 물자를 다 때려 박고 있는 건데. 이게 잘 안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지?”
그런 내 곁에서 임연객이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이런 대규모 공사나 행정업무를 보는데 나 혼자 힘으로는 벅찼다. 그래서 임연객이 나와서 내 구상대로 일꾼들을 지휘해 줬다.
그런데 막상 돈이 들어가니 떨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내가 아버님과 오라버니 앞에서 연은분리법을 보여줬잖아. 그게 안 통할 리가 없다니까? 무조건 이득이야.”
내가 고생한 임연객을 달랠 겸 그리 말했다.
“나도 알지만 워낙 큰돈이 들어가니.”
“그동안 내가 손댄 일은 대체로 잘 풀렸잖아.”
“그래, 그건 그렇다.”
임연객은 그제서야 약간은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나는 임연객 외에도 은 제련소의 건설을 시작하는 데 도움을 준 여러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왕 노인께도 고맙습니다.”
나와 임희는 은 제련소 건립에 필요한 여러 자재를 왕창근의 상단을 통해서 조달받았다.
정치상인 왕창근의 상단이 규모가 크기도 했지만 나는 왕 노인의 유능함에도 감명을 받았다.
‘표천현에서 자인 대사마저도 그냥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을 때 이 왕 노인만이 표천현의 상황을 살피고 뭔가 조금씩 파고드는 논의를 했다.’
그때 왕 노인의 말을 듣고 나는 영감을 받아 표천현의 진상을 간파해냈다.
‘아마 왕 노인이 그런 식으로 계속 생각을 이어나갔다면 왕 노인도 진실을 깨달았을 수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왕창근의 상단과 인연을 맺기로 했다. 그러면 유능한 왕 노인이 실무에 나설 것이 뻔했다.
과연 왕 노인은 별 사고 없이 은제련소 건립을 위한 물자를 순조롭게 공급해 줬다. 이 추세면 공사도 상당히 일찍 끝날 것 같았다.
“돈을 받고 계약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저 현판의 서체가 대단합니다.”
왕 노인은 넋을 반쯤 잃은 듯한 표정으로 구족달의 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림원 구족달 학사님의 글씨입니다. 한번 소개해 드릴까요?”
아무래도 왕 노인은 서예에 취미가 있는 것 같아 나는 호의를 베풀 겸 권했다. 왕 노인과는 장기적으로 친분을 쌓는 것이 좋을 거란 계산 때문이었다.
“고마우신 제안이지만 오늘도 일이 있습니다. 상단에서 대인이 찾을 테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왕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인사를 했다.
“살펴 가십시오.”
나는 그런 왕 노인을 배웅했다. 오늘 마쳐야 하는 공사는 대강 끝나서 일꾼들이며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고 있었다.
은제련소 공사장을 지키며 그곳에서 숙식을 하는 사람을 몇 명 남기고 나 역시 임연객과 함께 상산저로 돌아왔다.
상산저에 돌아오자마자 임희는 나를 불렀다.
“알 수 없는 전갈이 하나 왔구나. 또 무슨 꿍꿍이속인지. 연우 너에게도 보여줘야겠구나.”
임희는 그러면서 서신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임희의 표정이 묘하게 불편해 보여서 나는 약간 놀라며 서신을 받아들었다.
-같은 집안 친척이면서도 요 근래 격조하게 지낸 것 같네. 이제 곧 추석이군. 이번 명절 때 자네와 자네의 딸을 진주원에 초대하니 함께 친족끼리 담소를 나누는 것이 어떤가?
짧은 서신에는 ‘대광 임명필’이란 서명이 적혀 있었다.
진주의 호족 임명필은 상당한 세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또한 임명필의 딸인 진주원 부인은 왕건의 아내였다. 그리고 임명필은 고려의 초대 순군부령을 역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리 상산 임씨의 먼 친척이기도 하고 말이야. 괜히 아버님의 심기가 불편한 것이 아니었군.’
당연히 이 혼란한 시대에 먼 친척 관계인 임희와 임명필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후삼국 시대는 워낙 난세라서 친형제도 믿기 힘든 판국에 먼 친척이면 더욱 그렇지. 신라 진골 김씨들도 서로 먼 친척 관계인데도 그렇게 싸웠으니.’
임명필의 영지인 진주는 임희의 영지 상산과 거의 붙어 있었다. 같은 집안 사람들이니 근거지도 비슷한 위치였다.
그리고 대개 사람들은 임명필의 세력이 더 크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사실이라도 그런 평가가 도니 임희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또한 임명필은 실질적으로 상산에 위협이 되는 사람이었다.
고려가 건국되면서 최소 고려 영토 내에 있는 호족들은 서로 간에 싸울 필요가 사라졌다. 영토를 넓히겠다고 이웃 영지에 수작을 부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을 벌였다가는 중앙 정부의 왕건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임희와 임명필의 관계는 묘했다. 먼 친척 관계이기에 임명필이 상산에 간섭할 명분이 있었다.
임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임명필이 같은 임씨를 돕는다고 명목으로 군사를 보내든지 해서 상산을 꿀꺽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임명필은 왕건의 장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하고 인맥이 엄청난 사람이라 그런 일을 벌이고도 무마할 실력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임희는 진주의 임명필을 극도로 경계하며 상산에서도 항상 진주 쪽 길목에 수비군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임희와 임명필이 불편한 관계라는 것은 고려 정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님이 병부령이 되고 임명필이 순군부령이 되었을 때도 사람들이 말이 없었지.’
병부와 순군부 모두 고려 내에서 국방과 관련된 부서였다. 그런데 여기에 모두 임씨가 임명됐으니 임씨가 고려의 군권을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잠잠했던 것은 임희와 임명필이 서로 험악한 관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병부와 순군부도 임희와 임명필이 수장이었을 때 오히려 서로 견제하며 암투를 벌여서 군권이 한쪽에 쏠리지 않았다.
‘결국 미래 역사의 흐름을 보면 임명필을 그리 싫어했던 임희의 판단이 옳았어.’
먼 훗날 정윤 왕무가 왕으로 즉위하고 상산 임씨도 외척이 되었다.
그럼에도 먼 친척인 임명필은 상산 임씨를 안 돕고 상황을 살피다가 유긍달 쪽에 붙어버렸다.
상당한 세력을 지닌 임명필이 그쪽에 가서 붙자 왕무는 더욱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버렸다.
어쨌든 이런 상황이기에 먼 친척임에도 불구하고 임희나 나는 단 한 번도 임명필 쪽과 교류도 연락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런 서신이 온 것이다.
“명절이라고 서로 반갑게 볼 사이가 아님에도 이런 서신을 보낸 것은 뭔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안 가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해 보고 임희에게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굳이 임명필의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으나 왜 우리를 초청한 것인지 궁금하기는 하구나. 우선은 가봐야 하는데. 단단히 채비를 하거라.”
임희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 * *
추석까지는 별로 시간이 남지도 않았다. 나는 임희의 명대로 옷차림을 제일 화려하게 하고 진주원 앞에 왔다. 임희 역시 각별히 옷차림에 힘을 주고 왔다.
“괜찮으냐?”
그리고 나에게 묻기까지 했다.
“예.”
“그럼 들어가자. 참 만나야만 하니 그 인간을 보는 거지만.”
임희는 평소답지 않게 투덜거리며 진주원 안에 들어섰다. 확실히 임명필도 세력이 상당하기에 진주원도 전각이며 정원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허름한 나주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서 오십시오.”
진주원을 지키는 시녀들이 우리를 안내했다. 그리고 곧이어 임명필과 진주원 부인이 마중을 나왔다.
임명필은 임희보다 한 10살쯤 많아 보였다. 진주원 부인은 날씬한 몸매의 미녀였다.
“형님. 진작 찾아왔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습니다.”
그런 임명필을 보자마자 임희는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난세를 뚫고 살아남은 임희답게 자기 속마음을 숨기는 것이다.
“허허허. 나라도 찾아갈 것을. 요새 자네 활약은 내가 잘 듣고 있어. 우리 임씨의 명성이 드높아지니 나도 기쁘네.”
임명필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임희를 반겼다.
“부인을 뵙습니다.”
나 역시 진주원 부인에게 예를 갖추었다.
“자 우선은 모두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를 나누지.”
임명필이 말을 꺼내자마자 진주원의 시녀들이 으리으리한 상을 하나씩 가져와 나와 임희 앞에 놓았다. 귀한 소고기며 구하기 힘든 과일, 신선한 오곡으로 차린 상이었다. 다만 나는 그 상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설마 이리 뻔히 보이게 독살을 하든가 하지는 않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다행히도 식사는 아무 탈 없이 끝났다.
식사도 마치고 나와 임희는 임명필, 진주원 부인을 따라 정원에 지어진 정자에 들어가 차를 마셨다.
“…….”
장내에는 갑갑한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 험악한 관계인데 친한 척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서로 할 말이 없어 이런 상황이 된 것이다.
그때였다. 진주원의 시녀 하나가 정자에 달려와서 말했다.
“유긍달 대인과 황보제공 대인께서 대광 어른을 만나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이미 찾아온 손님이 계시다고 전해드렸지만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고 하셔셔.”
“이걸 어쩐다?”
임명필이 임희 쪽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두 분 대인도 드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임희는 긴장된 낯빛으로 말했다. 임희도 드디어 오늘 임명필이 우리 부녀를 굳이 초대한 이유를 눈치챈 듯싶었다.
‘자연스레 유긍달, 황보제공과 만나게 하려고 친족이란 핑계로 우리를 불렀군. 역시나 은제련소까지 지어지니 반응이 오는군.’
나 역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나는 정윤과의 혼사를 피하기 위해 상산의 위상과 세력을 키우는 계략을 구사했다.
상산의 힘이 커지면 다른 호족들이 오히려 정윤과의 혼사를 방해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동안 다른 호족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어 갑갑했는데 오늘 결국 저들이 회동을 청한 것이다.
그리고 시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유긍달, 황보제공 두 사람이 마침내 정자에 합류했다. 유긍달은 내 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맨 처음 개경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만났을 때부터 비범한 인재임을 알았지만 과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유긍달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칭찬을 건넸다.
“과찬이십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유긍달의 시선을 잠시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