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30화 (30/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30화

30. 학부모

“어, 안녕.”

쭈뼛거리며 오지수의 손에 끌려 우리 쪽에 온 김장명이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오랫동안 학관에서 친구 없이 지내서 오늘 먼저 따뜻하게 다가온 오지수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나도 안녕.”

나는 그런 김장명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곁에서 오지수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칭찬을 해줬다.

“공주님도 참 마음이 따뜻하세요.”

“뭘 그렇게까지.”

오지수가 흡족하게 웃고 있는데 곁에서 배수현은 찜찜한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나, 난 곧 수업이 시작되니 준비를 하러 내 자리에 가볼게.”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내가 그런 배수현의 속내를 알면서도 짐짓 그러는데 배수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쨌든 이날 한번 김장명에게 말을 건 이후 쉬는 시간마다 김장명은 나와 오지수가 있는 쪽으로 왔다.

김장명은 그동안 변변찮게 말을 나눌 사람도 없어서 그런지 상당히 수다스러웠다.

“명주는 이런 학관도 없어서 심심하긴 해. 명주는 동쪽 바다에 있는 곳이라. 그래서 사실 학관에 처음 왔을 때 좋았어. 다른 지역의 호족 자제들과 교류할 수 있다는 게. 아버님이 용돈만 많이 보내주시면 좋을 텐데. 조정에서 나오는 곡식만으로는 상당히 부족하다고.”

김장명은 그런 한탄을 했다. 당연히 명주의 김순식이 일체의 비용을 안 보내줬는데 김장명이 여태 살아 있는 것은 고려 조정에서 생활비를 줬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김순식과 불편한 사이라고는 해도 고려 조정 입장에서 기인인 김장명이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물론 딱 아슬아슬 먹고 살 만큼만 줬다.

그래서 김장명은 학관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고 어느 정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건 정말 맞아. 나도 폐하께서 용돈만 넉넉하게 내려주셨으면 좋겠어. 에휴. 정말.”

오지수는 손뼉까지 치며 그런 김장명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미 언급했듯이 왕건이 나주원에도 생활비를 넉넉하게 주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두 사람의 처지에 공감대가 있는지 대화가 술술 풀려 나갔다.

‘잘한다. 잘해.’

그런 오지수와 김장명의 모습을 보며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짐짓 김장명을 향해 나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너도 한번 장학금을 신청해 보는 것이 어때?”

놀라운 일이지만 옛날에도 장학금이 있었다. 물론 매일 전쟁만 해대는 지금 고려초에는 없었지만 고려 중기가 되면 난립하는 사립학원들에게 맞서 공교육을 지키기 위해 고려왕이 장학금을 조성하고 그랬다.

제대로 교육을 하려면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 시대에도 알고 있었다.

“장학금?”

김장명이 반색을 하며 묻자 내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학관 차원에서 있는 장학금은 아니야. 내가 이번에 관직도 얻고 개인적 녹봉이 생겨서 한번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장학금을 만들어서 당장 돈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지원을 해주는 제도를 만드는 거지.”

“그, 그럴 수는 없어.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은.”

김장명은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일방적으로 돕겠다는 건 아니야. 지금 학관은 각지의 호족 자제들만 다니는 곳이지만 나중에 전란이 끝나면 평민 자제들도 들어올 거야.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장학금 제도를 미리 만들어 놓자는 거지. 장명이 너도 나중에 명주로 돌아가면 여유가 생길 거 아니야? 그때 너도 크게 비용을 좀 대줘서 장학금을 크게 만들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 거지. 내가 나중에 너한테 많이 뜯어내려고 지금 주려는 거야.”

내가 반쯤 진심을 담아서 김장명에게 말했는데 오지수가 먼저 박수까지 치며 반응했다.

“우와 언니.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저도 나중에 장학금 조성에 참여할 테니 먼저 주시면 안 돼요?”

그러면서 오지수가 대뜸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하하하.”

나는 오지수의 부탁에 대답을 안 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김장명한테는 장학금을 줘도 금세 회수가 될 테니 퍼주는 거고. 지수야. 너한테 주면 회수까지 오래 걸리니 절대 국물도 없단다.’

내심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계속 웃는데 오지수는 내 그런 속내도 모르고 같이 웃었다.

“잠깐 나랑 말 좀.”

그런데 한쪽에서 이 수작을 보고 있던 배수현이 나를 끌고 갔다.

“어, 어.”

키가 커서 그런지 배수현은 힘도 좋았다. 나를 한쪽으로 끌고 간 배수현은 울먹이기까지 하며 말했다.

“장명이 쟤한테 돈까지 주다니 무슨 생각이야? 나중에 잘못되면 어쩌려고? 지금 너와 오지수 공주님이 김장명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고 황보인혜 공주님과 유설란 공주님이 기뻐하는 기색이야. 그에 관해 걱정된다고 나한테 말하는 친구들도 있고.”

“너무 불쌍하잖아. 장학금을 명목으로 주면 별문제도 없을 거야. 장학금 얘기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았니? 나는 앞으로도 장학금 제도를 진지하게 만들어볼 작정이야.”

내가 착한 척을 하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돈까지 주는 건…… 그건 증거가 남아.”

배수현이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걱정되긴 하나 보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동안 나를 봐왔으면 내가 아무 대책 없이 이러는 것은 아니란 걸 알 거 아니야?”

“그야 그렇지. 엄청난 위기가 올 때마다 연우 네가 잘 빠져나가긴 했어. 그런데 이 일은 진짜 큰일이라.”

배수현은 또 내 말에 혹한 표정이었다.

“나만 믿고 있어. 김장명한테 너도 말이라도 몇 번 걸어주라고. 오래지 않아 내가 왜 이런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나는 호탕하게 말했다.

* * *

나는 우선 한림원 직원이 되어 받은 녹봉을 몽땅 다 장학금 명목으로 김장명에게 주었다.

“정말 고마워. 나중에 이자를 붙여서 장학금에 보탤게.”

김장명은 장학금을 받고 싱글벙글했다. 여러모로 쪼들리는 형편에 돈이 들어오니 기쁘긴 할 것이다.

‘그 기분 나도 잘 알지. 진짜 급한데 꽁돈이 생기면.’

어쨌든 김장명은 내가 대준 비용으로 번듯한 비단옷부터 구입했다. 귀족학교인 학관에 다니면서 옷차림이 허름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겉으로 보기에 김장명이 그럴듯해지니 다른 학생들도 예전처럼 김장명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공주인 오지수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떨떠름한 표정으로나마 김장명과 인사 정도는 하게 됐다.

김장명은 예전과는 다른 밝은 표정으로 학관에 다녔다.

그리고 학관에서는 아무 일 없는 조용한 일상이 이어졌다.

* * *

“벌써 일주일이 지났구나. 어차피 한 달 뒤에는 또 와야 하니 짐 같은 것은 다 놓고 가렴.”

나주 왕후는 나를 보며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언니. 그냥 계속 나주원에서 지내면 안 돼요?”

오지수는 어리광을 부리듯 나에게 말했다.

“아니야. 상산저에 아버님과 오라버니도 계시고. 가봐야지.”

나는 그런 말을 하고 나주 왕후와 오지수에게 인사를 하고 궁을 나섰다. 왕무는 또 군사일을 본다고 얼굴도 안 보였다.

그동안 나주원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는데 막상 이리 떠나게 돼도 마음이 기쁘지는 않았다. 학관에서의 일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관이 계속 조용한 게 마음에 안 들어. 슬슬 뭔가 일이 터져야 하는데.’

그렇게 내가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며 학관을 오가는 어느 날이었다. 한림원령 최언위는 이날 따라 열변을 토하며 강의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삼한을 통일한 문무왕께서 죽음에 임해 남기신 ‘문무유조’를 공부하겠습니다. 내가 당나라까지 가서 수많은 글을 읽었지만 이 문무유조에 비할 글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실로 우리 삼한 땅의 명문이니 집중해서 공부합시다.”

누가 봐도 최언위 본인이 매우 좋아하는 글이란 것이 느껴졌다. 나를 비롯한 학생들은 자세를바로 잡고 책을 열심히 보는 시늉을 했다.

‘오늘은 딴청 부리면 최언위가 그냥 안 넘어갈 거 같아.’

그렇게 최언위는 약간 흥분한 채로 문무유조를 읽어내리며 강의를 이어 나갔다. 그때였다.

벌컥!

교실 앞문이 급하게 열렸다.

“누구냐? 감히 수업 중에.”

평소에는 온화하던 최언위가 호통을 쳤다. 자기가 좋아하는 글을 강론하다가 끊기니 열이 받은 것이다.

교실에 들어온 노인은 화들짝 놀라더니 뒷걸음질 쳤다.

“이거 참 미안하오. 한림원령. 내가 급하다 보니.”

“아니 시중 각하께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호통을 친 최언위가 오히려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시중이면 지금 고려 내각을 총괄하는 김행선이 왔다고?’

내가 두 눈을 빛내는데 김행선 뒤에서 한 중년 남자가 미안한 기색으로 나서서 굽신거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수업 중에 예가 아니란 것을 알지만 워낙 마음이 급해서.”

“아닙니다. 아이고 시중 각하. 방금 전엔 제가 미처 시중 각하께서 오신 것을 미처 모르고.”

최언위는 중년인의 사과는 받지도 않고 연거푸 김행선에게 굽신거렸다.

그사이 중년인은 교실 안을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살피더니 문득 외쳤다.

“장명아!”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서 김장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중년인을 향해 뛰어갔다.

“숙부님!”

그리고 김장명은 막 교실에 들어온 중년인의 품에 덥석 안겼다. 중년인은 김장명을 껴안으며 말했다.

“우리가 너무 무심했구나. 너를 보내놓고 한번 들여다보지를 않았으니. 몇 년 사이에 많이 컸구나. 컸어. 형님께서도 너를 보내놓고 그리워하다가 이번에 너를 직접 보려고 명주에서 곧 오실 거다.”

“아버님께서 직접 오신다고요? 정말요?”

김장명은 진짜 뛸 듯이 기뻐하는 기색으로 외쳤다.

웅성웅성.

그 모습을 보며 학관 안의 학생들은 모두 경악하며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럼 명주의 김순식이 지금 이 개경으로 온다는 거 아니야?

학관에 다니는 학생은 거의가 배수현처럼 고려의 정치적 상황에 관심이 많고 잘 알았다. 오지수야 학관에 막 들어와서 순수한 거고 이런 학교를 오래 다니면 정치에 대해 알 수밖에 없었다.

‘오늘만 해도 김순식이 개경에 온다는 특급정보를 학관에 다니는 덕에 학생들이 빠르게 입수했지. 이런 환경에서는 학생들이 정치에 능해질 수밖에 없어. 이걸 의도하고 학관에 호족 자제들을 모아놓은 것이기도 하고. 어쨌든 흐흐흐. 내 생각대로군.’

한편 김장명과 감격의 재회를 한 중년인은 그의 위아래를 살피더니 감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개경에서도 장명이 너는 명주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 신색이구나.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어.”

“뭐 그렇죠.”

김장명은 숙부의 칭찬에 머리를 긁적였다. 중년인은 김행선과 최언위를 향해서도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조카를 보내놓고도 한번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폐하와 고려 조정이 제 조카를 이리 귀히 대접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비단옷에 또한 삼최 중 한 분이신 최언위 공의 열정적 강의까지. 명주에 있을 때보다 더 후한 대접을 조카가 받았습니다.”

“……커흠, 뭐 우리 폐하의 도량에 대해서는 김순우 공께서도 익히 아시지 않습니까? 명주의 공자께서 개경에 머무르시는데 당연히 후히 대접해야지요.”

시중 김행선은 잠깐 말을 못 잇다가 순식간에 얼굴표정을 수습하고 둘러대었다.

‘역시 정치판에서 오래 굴러서 그런지 시치미를 잘 떼는군. 그동안 김장명을 홀대해놓고서는.’

막 개경에 도착한 김순식의 동생 김순우는 김장명의 겉모습을 보고 여태 계속 대접을 잘 받아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고비를 넘긴 김행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김장명은 약간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지수와 내 쪽을 한번 보더니 김장명은 곧 입을 꾹 다물었다.

‘과연 왕건의 딸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그녀가 곤란할까 봐 그동안의 홀대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 하겠군.’

아직은 어린 김장명의 심리가 내 눈에 훤히 보였다.

“제가 변경에서 온 사람이라 예의를 몰라 이리 수업을 방해했습니다. 한림원령과 학생들에게 너무 죄송합니다. 그러나 몇 년간 소식도 모르던 조카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개경에 오자마자 이리 달려온 것입니다. 어찌 사죄를 해야 할지.”

“사죄라니요? 허허허. 학생들은 오히려 오늘 하루 지루한 수업에서 벗어나게 돼서 좋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학생 여러분. 오늘은 친구가 오래간만에 가족을 만났으니 모두 일찍 귀가합시다.”

시중 김행선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김순우를 달래며 학생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딴말을 하면 가만히 안 있겠다는 기세였다.

“네.”

학생들은 재빨리 입을 모아 그런 대답을 하고 책을 챙겨 나가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