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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29화 (29/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9화

29. 명주

오지수에게 예를 갖춘 배수현은 재빨리 내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최승우를 꺾을 수 있으면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대뜸 나서다니.”

“아니 백제인을 혼내주겠다고 말하고 나갔는데.”

내가 그리 말하자 배수현은 혀를 살짝 내밀면서 말했다.

“나는 네가 달려 나가서 최승우 뺨이라도 한 대 때릴 줄 알았어.”

나는 그런 배수현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는데 곁에서 오지수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언니도 연우 언니가 최승우를 이기는 장면을 봤나요?”

“예, 공주 마마. 바로 앞에서 지켜봤습니다. 제가 최승우의 횡포에 분개하는 모습을 보고 연우가 나선 거예요.”

배수현의 대답을 듣고 오지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한테 그때 일을 자세하게 말해주세요. 연우 언니한테는 물어도 그냥 서예 대결로 최승우를 이겼다고 짧게 대답만 해요.”

그런 오지수를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건조하게 사실을 요약해서 잘 얘기해 줬는데 왜 저래?’

그런데 배수현은 오지수를 앉혀놓고 자랑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한림원령과 친분이 있는 최승우가 학관에 와서 지극히 오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주 생긴 게 얍샵해 보였어요. 말끝마다 트집도 잡고요.”

“응응.”

그렇게 배수현과 오지수가 떠드는 사이 내가 들어오는 순간 잠시 적막해진 교실 안도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탕탕탕.

그리고 거센 목탁 소리와 함께 최언위가 몹시 피곤한 기색으로 들어왔다.

“3일 동안 쉬었더니 다시 원상복귀 됐습니다. 예전처럼 시끄럽군요. 모두 조용히 하십시오.”

계속 목탁을 치며 교실을 진정시킨 최언위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연우 아가씨 잠시 나와주십시오. 아가씨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

콕 나를 지목하는 최언위를 보며 나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나섰다. 최언위는 소매 속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나에게 건넸다.

“폐하의 명에 따라 한림원 직원이 되신 연우 아가씨께 고신을 드리겠습니다. 최승우를 꺾은 공을 세웠으니 드리는 것입니다. 이로써 아가씨는 고려의 관원이 되셨습니다. 아가씨께 특별히 드릴 일은 없으니 여태까지처럼 이 학관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어쨌든 직원이 되셨으니 3개월마다 녹봉을 받아가십시오. 물론 상산백의 따님인 아가씨 사정에 그런 녹봉이 중요치는…….”

“아닙니다.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나는 고신을 받아들며 엄숙하게 말했다. 고신은 바로 내가 관직을 받았다는 일종의 증표였다.

‘그러고 보니 관직을 받으면 당연히 녹봉도 받는 건데. 기분 째지는군. 전생, 현생 통틀어 정규직으로 취업해 월급을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가?’

현대의 김선우일 때도 돈을 벌기는 했으나 다 알바를 해서 벌었다. 드디어 정규직이 됐다는 생각에 감개무량했다.

물론 유력 호족인 임희의 딸로 태어났고 용돈도 원하면 많이 받을 수 있었지만 내 힘으로 버는 돈은 감회가 남달랐다.

‘하긴 왕건도 구해주고 최승우도 꺾어줬는데 이 정도는 보답받아야지.’

내가 그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교실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짝짝짝!

오지수나 배수현을 필두로 한 정윤파 소속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열광적으로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도 이 분위기에 휩쓸려 하나둘씩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가볍게 한 손을 들어주며 그런 환호에 응했다.

사실 마음속으로 찜찜하기는 했다.

‘정윤 왕무와의 혼사를 피해야 하는데 정윤파 사람들이 너무 나를 잘 밀어주니. 이거 참 미안하네. 아냐. 이제 곧 모든 문제를 끝낼 수 있다.’

내가 고신을 받고 자리에 돌아가자 최언위는 수업을 재개했다.

* * *

그리고 이날 수업이 끝나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 학관에 새로 들어오게 된 오지수를 위한 신례도 열렸다.

나는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만 남아 있는 학관에서 쭈뼛거리는 태도로 나서는 오지수를 바라보며 깊은 허탈감을 느꼈다.

“자 우리 모두 학관에 새로 들어온 오지수 공주의 노래를 듣고 미리 준비해 둔 간식을 나눠 먹고 귀가하자.”

여자 학생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 유설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와아아아!

그리고 학생들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진 오지수를 바라보며 환성을 지르고 있었다.

오지수는 차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가 민망한지 입을 못 떼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참 가소로운 상황이었다.

‘나는 말이야 신례를 하다가 진짜 익사할 뻔했는데.’

물론 오지수가 내가 겪은 강도의 시련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왠지 억울하고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내 곁에서 배수현이 말했다.

“이게 다 연우 네 덕이야.”

“뭐가?”

“연우 네가 저번 신례 때 큰일을 치렀잖아. 그 이후로 학관에서 신례를 열 때 안전에 유의하라고 명이 떨어졌어. 오지수 공주님은 그래서 이 정도로 끝나는 거지. 그런 명이 아니었으면 신레를 빌미로 오지수 공주님을 곤경에 빠뜨렸을 거야.”

그러면서 배수현은 한쪽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황보인혜, 유설란 쪽으로 눈짓을 했다.

‘왜 나는 배수현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을까? 내 희생으로 악습이 사라진 건데 기분이 왜 이리 안 좋지?’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노래를 마친 오지수가 박수갈채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도 상기된 얼굴로 오지수가 나에게 말했다.

“연우 언니 말대로 정말 신례가 만만치 않네요.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라니.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 오지수의 투정 소리를 들으니 또 약간은 억울했던 내 마음이 풀렸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날은 학관에서 밤늦게까지 음식을 나눠 먹고 별일 없이 모두 귀가했다. 나도 오지수와 함께 나주원으로 돌아왔다.

나주 왕후에게 돌아왔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 내 처소에 들어온 나는 잠자리에서 계속 몸을 뒤척였다. 아직도 영 나주원이 낯설었다.

‘안 그래도 생각할 것이 많아서 피곤한데.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영 잠이 안 오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새벽에야 겨우 잠깐 잠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학관을 가기 전에 나주 왕후, 오지수, 왕무와 함께 식사를 했다.

‘아침을 그냥 안 먹고 싶은데. 잠이나 더 잤으면.’

상산저에 있었다면 진짜 내 마음대로 했을 텐데 나주원에서는 그럴 수가 없어서 갑갑했다. 반찬으로 나온 닭고기를 씹는데 목에 잘 안 넘어갔다.

그래도 억지로 닭고기를 씹으며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제는 시간이 없다. 어서 학관에서 계획대로 오지수를 움직여야 해. 진짜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다 끝난다. 흐흐흐.’

그 생각을 하니 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어제처럼 나는 오지수의 팔짱을 끼고 학관에 등교를 했다. 학관 안의 풍경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난장판이었다.

‘내가 와서 조용해지는 것도 딱 하루 가는군. 어제는 내 얼굴을 보고 조용해지더만.’

최승우를 꺾어도 약빨이 하루 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지수와 함께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여느 때와 같이 배수현과 그를 따르는 아이들이 자연스레 모였다.

그사이 교실 안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내가 찾던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김장명이었다.

김장명은 약간은 우울해 보이는 얼굴로 혼자 앉아 있었다. 친구가 없는 것이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아 있는 오지수를 보며 말했다.

“저기 저 학생은 곁에 사람도 없고 왠지 쓸쓸해 보이네요. 저런 친구들에게 손을 먼저 내미는 게 좋은 일이죠. 공주님께서 한번 용기를 내서 저 학생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정 심심하면 저 친구도 여기 끼라고 말씀해 보세요.”

나는 턱끝으로 김장명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이네요. 언니. 쟤만 혼자 있어요. 언니 말대로 해볼까요?”

내 명성을 듣고 나를 따르는 마음이 강한 오지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내 말을 따를 기세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배수현은 사색이 돼서 외쳤다.

“안 됩니다. 공주 마마. 연우야 너 대체 왜 그래? 너도 알잖아. 김장명은 김순식의 아들이라고!”

“공주님. 왕족으로 태어나신 만큼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해야 해요. 누구 아들이라고 피하거나 하면 안 되죠.”

내가 짐짓 성인군자가 된 것처럼 오지수에게 말했다. 말이야 내 말이 그럴듯했다.

“연우 언니 말이 맞아요.”

내 말을 들은 오지수는 정의감에 휩싸여 성큼성큼 김장명을 향해 걸어갔다.

“안 돼!”

배수현은 깜짝 놀라서 오지수의 소맷자락을 낚아채려는데 내가 재빨리 나서 배수현을 가로막았다.

“괜찮아. 진정해.”

나는 기겁을 하는 배수현을 말렸다. 나는 배수현이 이러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김순식의 지금 정치적 위치를 고려하면 배수현이 이러는 것도 당연하다.’

김순식은 명주에서 세력을 떨치는 호족이었다. 현대 지명으로 따지면 강릉이다. 거의 이 후삼국 시대 최강의 호족이라고 불러도 될 인물이었다.

‘지금도 견훤, 왕건을 제외하면 김순식의 군사력이 가장 막강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거기에 신라 진골 출신으로 명문 출신이기도 하고. 그냥 진골도 아니고 저 유명한 태종 무열왕의 직계후손이니.’

신라 말에 내전이 심해서 진골왕족들도 무열왕의 직계 후손들과 내물왕의 직계 후손으로 패를 갈라 싸웠다.

여기에서 무열왕의 후손들이 져서 서라벌을 떠나 명주에 가서 은거했다. 그리고 대를 이어가며 세력을 키웠는데 지금 명주 김씨의 당주가 김순식이었다.

다만 지금 고려 조정 입장에서는 문제가 이 김순식이 궁예와 매우 친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했다. 이때 궁예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궁예의 직계 부하들도 다 도망치거나 그대로 왕건에게 항복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궁예를 지키려고 군사를 일으켜서 왕건과 대치한 사람이 김순식이었다.

궁예가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적극 협조한 사람이 김순식이기도 했다.

궁예도 그런 김순식을 믿고 철원에 수도를 정했다. 철원은 김순식의 근거지인 명주와 매우 가까운 도시였다.

‘왕건과 김순식 사이에 전쟁이 안 난 것은 태백산맥 덕이지.’

명주, 즉 강릉은 험준한 태백산맥 동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그래서 태백산맥을 넘어야 서쪽으로 갈 수 있었다.

이 당시에 군사들을 거느리고 태백산맥을 넘으려면 대관령이란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즉 이 대관령만 봉쇄하고 있으면 김순식이 아무리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어도 그냥 명주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신라 조정이 내전에서 패한 무열왕계의 후손들을 살려준 이유가 이거지.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의 후손들을 다 죽이면 욕을 먹을 게 뻔하니. 대신 명주 땅에 그 사람들을 몰아넣으면 대관령을 이용해 가둬둘 수 있으니.’

왕건이 궁예를 제거하고 나서 기민하게 대관령을 잘 봉쇄하고 군사를 배치시켜 놨기에 김순식은 아무리 화가 나도 뭘 할 수 없었다.

거기에 궁예 본인도 도망치다가 죽어버렸기에 김순식이 뭘 하려 해도 더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주변의 사람들도 김순식에게 방법이 없으니 참으라고 했다.

“옛다. 항복은 한다.”

마침내 한동안 시간을 끌던 김순식도 주변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왕건에게 항복은 하고 아들인 김장명을 왕건에게 보냈다.

하지만 김순식은 군사나 세금을 왕건에게 바치지도 않고 왕건에게 가 있는 아들을 위한 비용도 일절 보내지 않고 있었다. 맘대로 해보라는 태도였다.

이 상황이니 배수현이 김장명을 멀리하는 것도 당연했다.

‘고려 조정 입장에서 김순식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어. 사실상 기회만 있으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게 김순식이니.’

지금 고려 조정도 김순식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명주로 들어가려면 고려군도 대관령을 넘어야 하는데 김순식도 군사를 동원해 대관령 입구를 봉쇄해 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고려중신들 입장에서는 자녀들에게 김장명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김장명과 어울리면 딴마음을 품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 있었다.

거기다가 김순식이 진짜 반란을 일으킬 확률도 높아 보였다. 까딱 잘못하면 김순식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내부 동조자로 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장명은 학관에서 고독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배수현은 내가 오지수를 김장명에게 보내는 것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연히 김순식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으니 내가 이러는 거지. 김순식은 오히려 결국 왕건을 돕는다고. 흐흐흐.’

미래 지식이 있는 나에게는 숨 쉬듯 당연한 이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오지수의 손에 끌려 쭈뼛거리며 내 쪽으로 다가오는 김장명을 보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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