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8화
28. 만남
나주원은 초라하긴 했어도 터 자체는 넓었다. 시녀는 나주원 한쪽에 그래도 잘 청소된 소박한 건물로 나를 안내했다.
“이곳이 앞으로 일주일 동안 아가씨께서 지내실 방입니다.”
나주 왕후가 붙여준 시녀가 나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몇 명이지?”
“모두 7명입니다.”
시녀의 대답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돈에 쪼들리는 나주원은 많은 사람을 못 쓰고 있었다.
궁에서 사람을 쓰면 우선 그 사람들의 숙식을 책임져야 했다. 거기에 약간의 급료까지 준다고 생각하면 인건비가 엄청 들어갔다. 나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그럼 식사를 담당하는 사람은 그중 몇 명인지?”
“저와 다른 2명은 왕후 마마과 공주 마마를 시중들고 나머지 4인이 식사와 청소를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왕후 마마와 공주 마마를 곁에서 시중드는 그대와 다른 2명은 나주에서부터 왕후 마마를 따라온 사람 같은데?”
내가 그리 짐작하고 물었다. 나도 내 몸시중은 상산에서부터 따라온 믿을만한 경란이에게만 맡겼다.
“맞습니다. 오랜 세월 왕후마마를 모셨습니다.”
내 물음에 시녀는 좀 자랑스러운 듯 대답했다.
“오호 그럼. 식사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교대로 일을 하나?”
“그렇게까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내가 꼬치꼬치 캐묻자 시녀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럼 부엌에 가보지.”
“알겠습니다.”
시녀는 그렇게 말하며 건물 밖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러나 건물 밖에 나오자마자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건물 밖에 차마 안으로 못 들어오고 서성이는 정윤 왕무의 모습이 보였다.
“정윤 전하를 뵙습니다.”
시녀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이 시녀는 눈치가 빠른지 슬며시 눈을 좀 굴리더니 재빨리 내빼기 시작했다.
“어어, 어디가? 부엌에 안내를.”
내가 외쳐도 시녀는 무시하고 달려갔다. 그리고 정윤 왕무가 성큼 내 앞으로 걸음을 디뎠다.
비밀통로의 횃불 아래에서가 아니라 한낮의 햇살 아래서 왕무의 모습은 진짜 더 잘생기긴 했다.
속알맹이는 평범한 남자인 나는 그런 왕무의 모습을 보고 살짝 우울감마저 느꼈다.
약간 잘생긴 정도의 남자라면 질투하고 분노하지만 너무 잘생기면 분노마저 사라지고 약간의 우울감만 남는데 지금 내 기분이 딱 그랬다.
임희는 내가 왕무에게 반할 것을 걱정했지만 나는 계속 왕무 얼굴을 보다가 우울증에 걸릴까 봐 근심이었다.
“정윤 전하.”
그래도 신분제 사회라 감히 정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예를 갖추는데 왕무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왕후 마마께서 연우 그대가 한동안은 여기서 머물게 됐다고 말씀하셔서 한번 와봤다.”
“폐하의 명을 따르기 위함입니다.”
내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왕무가 문득 말했다.
“그때 분명 비밀통로에서 수수께끼를 푼 공을 가로채지 않겠다고 내가 말했어. 그런데 그대는 왜 작은 할아버님께 내가 수수께끼를 푼 것처럼 말했지?”
“전하. 저는 분명 전하께서 비밀통로를 열었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때 전하께서 석문을 연 것은 사실 아닙니까?”
내가 미리 준비해둔 변명을 하는데 왕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총명한 그대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작은 할아버님이 오해하실 거라는 것을 모를 리 없어. 실제로 작은할아버지는 내가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믿고 계시다.”
그러면서 왕무는 제법 준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그래서 정윤 전하께서 기분이 나쁘셨습니까? 왕숙께서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푼 전하를 위해 가만히 계시진 않았을 텐데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왕무는 머뭇거리더니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기분이 나쁘긴커녕 오히려 좋았다. 작은 할아버님이 나를 칭찬해 주시고 다른 집안 친척들과도 만나서 교제할 기회도 주시고. 이제까지는 형편이 이래서 집안 친척들과 제대로 교제할 상황이 아니었어.”
왕무는 어깨를 으쓱하며 초라한 나주원을 둘러보더니 쓸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시대에도 사람들을 만나 교제를 할 때는 돈이 필요했다.
특히나 전란의 시대라 왕씨 일족들은 하나같이 변경 요지에 주둔하거나 수군을 관장하거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뭔가 주고받는 게 있어야 했다. 실제로 충주 유씨나 황주 황보씨 같은 경우에는 물자와 인력을 지원하며 왕씨 일족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윤 왕무는 외가의 지원이 없어서 이런 활동을 못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왕평달의 주선으로 뭔가를 해본 모양이었다.
“그럼 잘된 일 아닙니까?”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왕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았지만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어. 이런 식으로는…….”
정신연령은 30대 아저씨인 나와 다르게 아직은 소년인 왕무는 순수한 뭔가가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확실히 왕무의 심리를 알 것 같았다. 나도 저 나이 때는 저랬던 것 같다.
“알겠습니다. 정윤 전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유의하겠습니다.”
어른답게 그런 왕무의 순수성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나는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야. 그대가 사과할 필요는.”
근데 왕무는 더욱 허둥대며 말을 더듬었다.
“음.”
이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왕무를 당황하게 할 것을 눈치챈 내가 입을 다물고 있는데 왕무가 또다시 말했다.
“이번에 상산백과 함께 막대한 예물을 가져온 것은 고맙지만…… 또 다음에 올 때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나주원이 검소하긴 해도 그대 하나가 머문다고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니까.”
딱 이 나이 때 소년답게 또 상산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은 것도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아버님께는 제가 비밀통로에서 있었던 일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정윤 전하 덕에 제가 목숨을 건진 것을 안 아버님이 감사의 표시로 올린 예물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다음부터는 전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또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나도 다음부터 아버님이 예물을 퍼주려고 하면 말릴 생각이었어. 이런 식으로 계속 돈을 대다가는 집안 기둥뿌리가 뽑힐 지경인데.’
“그, 그럼 푹 쉬도록.”
약간 말을 더듬던 정윤 왕무는 용건을 마쳤는지 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또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런 왕무를 보며 나는 혀를 찼다.
“부엌이 어느 쪽에 있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안내를 해줄 시녀도 안 보이고. 내가 찾아봐야겠군.”
나는 한숨을 쉬며 황량한 나주원 이곳저곳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나주원 부엌을 찾은 나는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부엌을 담당하는 4명의 여종들이 2명씩 조를 짜서 오전, 오후로 나뉘어 교대로 일을 하는군.”
나는 아예 여종들의 근무표까지 받아왔다. 나는 그것을 들여다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다.
“왕후 마마께서 함께 식사를 하시자고 부르십니다.”
시녀가 나에게 와서 알렸다.
“아니 방금 전에는 왜 나를 부엌까지 안내하지도 않고 도망친 건가요?”
조금 전에 정윤 왕무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뺀 시녀가 또 와서 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호호호. 정윤 전하와 좋은 시간을 보내라고 기민하게 움직였습니다. 굳이 감사의 인사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자 시녀는 나에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가 고마워할 줄 안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래? 기가 막혀서.’
내심 그런 생각을 했으나 너무 어이가 없어서 따질 힘이 없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시녀의 뒤를 따라 식사가 이루어지는 건물에 들어선 나는 잠시 멈칫했다.
잔잔한 미소를 띠며 앉아 있는 나주 왕후 좌우에 정윤 왕무와 오지수의 모습이 보였다.
나주 왕후, 오지수, 왕무 앞에 각각 그들을 위한 상이 각각 하나씩 차려져 있고 그 옆에 나를 위한 상도 하나 있었다.
‘1인당 상이 하나씩 나오니 차리기도 힘들고 정리하기도 힘들겠어.’
내 얼굴을 보고 오지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하지만 내가 없는 사이 나주 왕후에게 단단히 혼났는지 처음 봤을 때처럼 껴안거나 하지는 않고 가볍게 눈인사만 했다.
정윤 왕무는 또 나와 눈도 안 마주치고 무슨 생각에 잠긴 듯 자신의 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왕건의 속내가 보이는군. 이런 식으로 계속 얼굴을 보고 밥도 같이 먹고 하면 내가 정이라도 들까 봐 여기에서 지내라고 했어. 백날 그래 봐야 소용없는 것을.’
다만 나는 겉으로는 조신한 척 내 몫의 상에 앉아서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식사가 시작되었다.
질겅질겅.
내가 푸성귀를 열심히 씹고 있는데 나주 왕후가 입을 열었다.
“연우 너에게 미안한 부탁을 하나 해야겠구나.”
“부탁이라시면?”
내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는데 나주 왕후가 말했다.
“우리 지수도 곧 학관에 입학할 때가 됐는데 연우 네가 마침 나주원에 와 있으니 우리 지수와 함께 학관에 가줬으면 하구나. 참 미안하지만 걱정이 돼서.”
나주 왕후는 약간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황보인혜, 유설란 같은 애들이 도사리고 있으니 걱정할 만하겠지. 신례랍시고 우물 속으로 사람을 밀어 넣는 애들이니.’
오지수가 아무 방패막이 없이 학관에 입학하면 볼만하긴 할 것이다.
“공주 마마를 잘 보필하겠습니다.”
나는 믿음직스럽게 대답했다. 오지수의 학관 입학은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참 고맙구나.”
나주 왕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와!”
오지수는 식사 도중임에도 두 손을 번쩍 들어 환호성을 지르려다가 나주 왕후가 노려보자 재빨리 손을 내리며 입을 다물었다.
식사를 하면서 나는 오지수에게 학관에 갈 때 필요한 책들과 수업에 대해 찬찬히 일러주었다. 그 와중에도 왕무는 식사만 묵묵히 할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 * *
2일 뒤. 마침내 학관이 정상적으로 수업을 시작하는 날이 되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첫 등교를 하게 된 오지수는 신이 나서 나주 왕후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내 팔짱을 꼈다. 거의 나에게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를 않았다.
“잘 다녀오거라.”
나주 왕후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와 오지수는 나란히 시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학관으로 향했다.
왕궁에서 학관까지는 금방이었다. 언덕에 있는 왕궁을 내려오면 바로 구정이 나왔고 여기에서 학관은 그냥 지척이었다.
나와 오지수는 순식간에 학관 앞까지 당도했다.
“우와. 진짜 궁 밖에는 오래간만에 나와봤어요. 너무 재밌어요.”
그러나 오지수는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매일 나오실 수 있을 거예요. 아마 오늘은 궁에 못 들어가실 겁니다.”
“왜요?”
오지수가 묻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학관에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신례가 있습니다. 매우 혹독합니다. 공주 마마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학관에 들어섰다. 내 말을 듣고 오지수는 적지 않게 겁을 먹었는지 나에게 더 바짝 붙었다.
“…….”
그리고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침묵이 감돌았다. 이제는 여자아이들뿐만 아니라 남자아이들도 나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최승우를 꺾고 첫 등교군. 그래서 그런가?’
나도 이제는 아이들의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나는 나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사이 여느 때처럼 배수현과 그녀를 따르는 여자아이들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배수현은 오지수를 보자마자 먼저 예를 갖추었다. 이미 정윤 파벌에 속한 가문 자제들은 오지수의 입학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재빨리 그녀를 엄호하기 위해 이리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