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973화 (973/1,021)

#

“우리 KM 건설은 다른 건설 회사와는 많이 달라. 그래.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네 조언대로 KM 건설 구조조정을 거듭했고, 다른 건설 회사와는 달리 재무 사정도 훨씬 좋아졌으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애니 아파트에만 집중하기도 쉽지 않을 거란 얘기입니다.”

“…그건 알아서 하는 중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삐딱한 말투.

이 말은 단순히 최동영 상무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성 물산의 애니 아파트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많은 문제가 생겨났다.

KMBOOK이 나섰고, 오성 전자의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도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시제품과 양산품은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아파트 내에 가전제품은 간섭 문제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런 간섭으로 말미암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을 추가해야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애니가 문제인지, 시스템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이지수 박사가 진두지휘해서 일하는데도 이랬다.

그런데 제3자가 과연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민혁은 굳이 사실을 말해서 정보를 줄 생각이 없었다.

최동영 상무는 그런 의미까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다만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을 옆에서 지켜본 최용욱 회장이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불쑥 끼어들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민혁이 말이 맞다. 매사 모든 일에 신중할 필요가 있어.”

실제로 오성 물산처럼 KM 건설 역시 애니 아파트에 따로 전담 팀을 만들어서 일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다만 KM 건설은 오성 물산처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애니 아파트와 관련해서는 외주를 줘야 하는 까닭이다.

결국 오성 전자와 손을 잡아야 했다.

그런데 이게 사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 때문에 오성 전자가 KM 건설과 손잡았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정보를 공개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결과만 넘겨주니까.

오성 전자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명분이 생기면 최민혁 실장에 대한 견제 수단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갔다.

KM 건설은 그 중간에 껴서 불만을 삼켜야 했다.

KM 건설의 상황은 갑과의 싸움에서 밀리고 밀려서 구석까지 몰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민혁도 굳이 오성 전자나 오성 물산에 압력을 넣어서 KM 건설에 특혜를 주지는 않았다. 그저 KM 그룹 계열사이니, 그걸 고려해서 도와줄 뿐이다.

“셋째 큰아버지는 세상을 아주 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오성 전자가 아무런 이유 없이 KM 건설을 도와줄 것으로 생각합니까?”

“…무슨 뜻이냐?”

최동영 상무는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분노해서 소리쳤다.

“날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최민혁은 이죽거렸다.

“철이 없는 애송이?”

“야, 최민혁!!!”

서재가 울릴 정도의 소리였다.

다들 최민혁 실장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최민혁 자신도 자신의 말이 심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사과하고 싶지 않아서 바로 서재를 나가 버렸다.

* * *

최동영 상무는 최민혁 실장 뒤를 따라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과 최민수가 잡은 덕분에 최민혁 실장의 뒤를 따르지 못했다.

최용욱 회장은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셋째 최동영 상무의 행동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하긴, 저 녀석 입장도 있으니.’

이전까지는 최문경 부회장.

지금은 손자 최민혁에게 눌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자기 눈치를 보면서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본 것은 최민혁의 에플 지분 매각이었다.

최민혁은 그 일로 천문학적인 이익을 봤다.

그것을 보고도 그냥 있는다면 그게 더 문제였다.

최용욱 회장은 오늘 모임을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앙금이 쌓인다면 풀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사용인을 시켜서 최민혁에게 잠깐 있어 달라고 말했다.

다행히 최민혁은 자기 말을 알아들었다.

최용욱 회장은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 KM 그룹의 전반적인 상황을 확인했다. 확실히 작년과는 내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사내에 현금이 쌓여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이게 선택과 집중의 결과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대상이라면 KM 산업이었다.

매출 증가가 눈부시다는 말로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특히 손자 최민혁 실장이 KM 그룹 자체를 띄운 덕분에 매출 증가가 가속도가 붙었다.

최용욱 회장은 KM 그룹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다시 바꾸었다.

그는 최동영 상무가 어느 정도 이성을 차리자 사용인을 시켜서 다시 최민혁을 호출했다.

최민혁은 절대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푸념 어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성 전자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KM 건설에서 손을 뗄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런 사안을 대비해서 일해야 할 겁니다.”

최동영 상무 역시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본 터라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KM 건설은 오성 물산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 더욱이 KM 전자가 오성 전자가 애니 관련 제품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그 일이 문제가 없도록 하려면 오성 전자에게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겁니다. 그런데 오성 전자가 눈독을 들이는 이동 통신 사업에 끼어들면 좋아할까요?”

“……이건 우리 KM 그룹 내부 사정이다. 오성 전자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야!”

“아니. 관련이 있어요. 사실 오성 그룹 같은 대기업 압박 때문에 이동통신 산업에 끼지 않으려고 했던 거죠.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닙니다.”

꽤나 꼰대스러운 말투.

하지만 이건 엄밀히 말해서 최동영 상무가 아니라 최민혁 실장이 통신 사업에 끼어든 거라고 볼 수가 있다. 실제로 최동영 상무가 하려는 일 모양새가 이런 형태였다.

얼핏 봐서는 오성 전자를 압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성 전자가 그렇게 만만한 기업이 아니었다.

최민혁 본인조차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으면서 일을 벌여 나간다.

최동영 상무는 그런 미묘한 점까지는 알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오해한 최동영 상무는 최민혁 실장을 째려봤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이렇게 정작 억지를 부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하는 말은 그저 단순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이 그런 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최동영의 말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민혁아, 왜 그렇게 까칠하게 말하느냐. 동영이 말을 무시할 수는 없어. 이동통신 사업이 돈이 되는 것은 사실이니까. 더욱이 지금 우리가 못 할 일이 아니지 않느냐?”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그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이제 IMF가 슬슬 시작할 시기라서 그래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거야 순수한 사업으로만 놓고 보면 그렇죠. 하지만 셋째 큰아버지는 자신이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부추김에 놀아나서 하는 말입니다.”

“…사실이냐?”

최동영 상무는 최용욱 회장의 안색이 굳은 것을 보자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힐끗 최문경 부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 역시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는 최동영 상무의 행동이 석연치 않았다.

최민혁 실장은 상황이 계속 늘어지도록 두지 않았다.

“샐로먼 브러더스 측에서 제안한 거 아닙니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아니라고 말해보세요!”

최동영 상무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아니라고 부정하려다가 차가운 최용욱 회장의 시선을 접하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정말이야? 민혁이 녀석 말이 사실이냐?!!”

최용욱 회장 어조가 곱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도 지금에 와서야 과거 차입금을 다시 떠올렸다. 그게 결국 KM 그룹 목을 조를 목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이제 다 지난 일이다.

정확히는 지나고 보니, 샐로먼 브러더스가 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KM 그룹이었다.

그 차입금을 받아서 무리수를 뒀다면 KM 경영에 큰 타격을 줬을 것이다.

만약 한국 경제 사정이 지금처럼 나빴다면 더 큰 타격이 된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그 시점을 노린 것이고 말이다.

한데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최문경 부회장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그는 최동영 상무가 만약 샐로먼 브러더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도 최용욱 회장의 안색을 보자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최민혁은 마치 밀고라도 하는 것처럼 최동영 상무가 하려는 일을 죄다 불어버렸다.

“저도 사실을 안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이상할 정도로 우리 KM 그룹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대안을 찾다가 셋째 큰아버지와 협상을 하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용욱 회장을 째려봤다.

“이미 한 번 경험이 있으시죠? 대충 그 짝이 요구한 대로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예상할 수 있겠죠? 이번 일도 그래요. 제 말이 심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

최동영 상무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최용욱 회장은 차가운 눈으로 최동영 상무를 쳐다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영아, 잠깐 이야기 좀 하자.”

“……”

최문경 부회장은 최용욱 회장에게 끌려나가는 최동영 상무를 보면서 혀를 찼다. 그는 잠깐 최민혁 실장을 째려봤다.

“꼭 그래야 했냐?”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샐로먼 브러더스 말이다. 그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동영이에게 한 제안인 이동통신 사업도 나쁘지 않아.”

“통신 사업이라? 맞죠. 괜찮은 사업이죠. 셋째 큰아버지 본인이 하겠다면 말리지 않습니다. 다만 절 이용할 것이 분명한 일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꼭 그렇게 말해야 하니? 가족끼리 도와줄 수도 있잖아?”

최민혁은 콧방귀를 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그래. 솔직히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 가족 아니야? 가족끼리 얼굴을 붉힐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거 다 지난 일이다.”

“…….”

최민혁 실장은 한동안 최문경 부회장의 눈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는 이 뻔뻔한 첫째 큰아버지의 행동에 내심 감탄했다.

계속 이 자리에 있다가는 쌍욕을 할까 싶어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오늘 이 자리에 온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혀를 차다가 격한 갈등 때문에 겁을 집어먹은 채 한쪽에서 눈치만 보는 최민수를 쳐다보았다.

“하, 너도 참 딱하다.”

“…죄송합니다.”

“네가 무슨 죄가 있냐. 에이구, 나도 모르겠다.”

최문경 부회장도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이번 일이 어쩌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자신이 아니라 최동영 상무가 나선 것이기 때문이었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완전히 바보는 아니라니까.’

* * *

TRS 사업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경우라면 역시 기술 표준화다. 다양한 TRS 표준화가 있는 덕분에 제대로 통일이 되지 않았다.

각 업체는 자신의 기술을 표준으로 삼으라고 했다.

과거 KM 그룹이 손을 잡은 지오텍은 주파수 호핑 방식을, KA 그룹은 아이덴 방식을, DL 그룹은 이닥스 표준을 채용한 에릭슨사와 제휴했다.

그런데 아직도 이 표준이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KM 그룹은 TRS 사업을 넘긴 덕분에 혼란에 빠진 TRS 사업 갈등에서 멀리 떨어져서 이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최용욱 회장은 이후에도 TRS 사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은 터라 계속 보고를 받았다.

이 TRS 사업만 해도 그렇다.

그렇다면 다른 통신 사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겉으로야 쉬쉬하면서도 통신 사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때문에 겉으로는 최동영 상무에게 화를 냈지만, 정원으로 나와서는 입을 다물었다. 아니, 잠깐 침묵하다가 정원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뭐가 불만이냐?”

최동영 상무는 예상과는 다른 최용욱 회장의 모습에 안도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늘 공정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저도 민혁이의 안목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TRS 사업이 그 경우입니다. 표준 작업이 늘어지면서 CDMA 상황과는 많이 달라졌습…….”

그런데 그도 최문경 부회장이 슬쩍 정원에 나타나서 의자를 가져와 앉자 깜짝 놀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