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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알아요. 그렇다고 해도 이번 일은 너무 나간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경고 같아요.”
“네? 그게 무슨.”
최민혁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플 지분 매각 말입니다. 일이 잘 끝났기는 하지만 아닐 수도 있죠. 그걸 잘 분석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차익 실현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랬다.
사실 클린턴 캠프 역시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파악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그들은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에게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았다.
그렇게 보기에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가 너무 이상했다.
실제로는 최민혁 실장이 목돈 마련을 위해서 한 일이지만 그걸 그대로 그렇게 보는 이는 없었다.
실상 최민혁 실장 본인도 이 자금을 통해서 IMF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니까.
미국 정부도 그 사태까지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다만 한국 국제 수지 적자가 올해 들어서 급증한 터라 다시 조사를 맹렬히 할 뿐이다.
IMF가 굳이 한국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결국 국제 수지 적자가 문제일 겁니다. 올해 들어서 예상치가 벌써 200억 달러를 넘는다는 소리가 파다하잖아요.”
“하긴.”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개정판 X 리포트 이야기를 꺼낼까 망설였다.
물론 최민혁 실장은 그 의문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보다는 데릭 모건 이사의 행보에 더 신경을 쓰세요. 아주 독이 잔뜩 오른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 * *
데릭 모건 이사는 내막을 알고 나서는 황당해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대선을 앞둔 미묘한 상황.
최민혁 실장은 이 시점에서 날카로운 신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덕분에 이제 최민혁 실장을 그냥 지켜만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에플 지분 매각으로 재미를 보자 무리수를 둬야 했다.
그가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마쿨라 이사였다.
마쿨라 이사를 에플로 들여보내서 스티븐을 견제하는 것 말이다.
이 방법이 오히려 최민혁 실장을 직접 건드리는 것보다 효과가 크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마쿨라 이사는 그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에플 파워북 제품의 문제점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런데 마쿨라 이사가 그 일을 하기도 전에 스티븐이 끼어들어서 막아 버렸다.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데릭 모건 이사는 뒤늦게야 이 일도 최민혁 실장이 끼어들어서 막았다는 것을 보고받았다.
그로서는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이 일을 어떻게 안 것인지 그게 더 신기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해?”
그의 최측근인 댄 스티븐 부장 역시 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에플 엔지니어 쪽도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고 하니까요.”
“아니, 그러면 더 이상하잖아? 에플 엔지니어도 모르는 사실을 최민혁 실장은 어떻게 안 거야? 최민혁 실장이 무슨 예언자라도 되는 거야?”
“…….”
댄 스티븐 부장 역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 일은 정말 불가사의했다. 사실 작년이라면 그냥 넘겼을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 해온 일 중에 이상한 일이 너무 많았고, 조금씩 그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데릭 모건 이사는 계속해서 댄 스티븐 부장을 괴롭히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지금 머리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제야 피터 어빙을 왜 IMF가 그냥 날려 버렸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은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이번 일도 속도만 좀 올렸다면 성공했을 것 같았다.
그는 결국 고민한 끝에 방법을 살짝 바꾸었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데니스 샐로먼 이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KM 그룹의 내부 인물인 최동영 상무를 이용하는 것이다.
‘잘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이번에는 반드시 될 거야.’
* * *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데릭 모건 이사의 지시를 받은 후에 최동영 상무를 만나서 넌지시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KM 그룹은 통신 사업에 관심이 없습니까? 관심이 있다면 우리 측에서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
최동영 상무는 기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최문경 부회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솔직히 샐로먼 브러더스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IMF를 이용해서 한국 정부에 압박을 넣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혀를 내둘렀다.
IMF라면 통신 사업에 끼어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물론 대놓고 할 수는 없지만, 정부에 압력을 넣을 수는 있으니까.
지금처럼 한국 국제 무역 수지 적자 폭이 커지는 상황에서는 한국 정부도 IMF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최동영 상무는 때문에 건물 내에 따로 TF팀을 꾸려서 통신 사업이 가능한지 확인해 봤다.
휴대폰 통신 사업은 역시 LC 그룹, HY 그룹 정도가 주였다.
다만 제2이동통신 사업과 관련해서는 HS 그룹이 빠지지 않았다.
여기 DL 그룹이 컨소시엄 명분으로 슬쩍 손을 내밀었고 말이다.
‘가만, 왜 우리는 안 될까?’
최동영 상무는 KM 그룹이 이전과는 달리 이미 매출 레벨이 한 단계 더 올라갔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KM 그룹은 구조조정과 개혁을 통해서 현금 보유고도 늘렸고 말이다.
무리한 은행 차입금이 없어서 제2이동통신 사업에 끼어들 수 있었다.
‘지금 사정이 나쁜 DL 그룹도 이렇게 무리수를 두잖아. 우리도 가능하지 않을까?’
DL 그룹은 물론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컨소시엄에서 탈락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여기에 DL 그룹을 대신해서 들어갈 수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최동영 상무는 결국 이동통신 사업을 곰곰이 살피다가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이 일에 반대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굳이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이번 주는 식사 시간을 좀 당기자.]
그때 마침 최용욱 회장에게서 가족 식사 시간을 당긴다는 연락을 받았다.
최동영 상무는 난감한 얼굴을 한 채 일단 최용욱 회장의 저택을 찾았다.
그곳에는 이미 평소보다 일찍 와 있는 이들이 많았다.
당장 최민수, 김기범이 자신을 보고는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어, 그래, 가만, 기범이 넌 여기 웬일이냐?”
김기범은 최씨 가족 분위기를 살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민수가 좀 힘든 것 같아서요.”
“아, 그래?”
최동영 상무는 힐끗 김기범 표정을 살폈다. 정확히는 막 안에서 나서는 김여정을 봤다. 최용욱 회장 앞에서는 늘 울기만 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짜증만 가득했다.
그녀는 최동영 상무에게 간단한 눈인사만 하고는 최민수를 끌고 한쪽으로 갔다. 그곳에서 최민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김기범은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날카로웠다. 마치 첩자처럼 말이다. 무슨 정보라도 얻고 싶은 눈치였다.
‘하, 기가 막히네.’
* * *
최동영 상무가 딱히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김기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최용욱 회장조차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오히려 최민수를 째려봤다.
김여정이 오히려 나서서 김기범을 감싸 안았고 말이다.
그녀의 친오빠인 김용만 전무의 장남 김기범을 챙겨준 것이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처럼 이들은 묘하게 서로 잘 어울렸다.
상황이 이러니 최용욱 회장의 표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장 늦게 도착한 최민혁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분위기가 별로라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최동영 상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기범 때문에 입을 쿡 다물었다.
그도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이 김기범의 입을 통해서 DL 그룹 귀에 들어가도록 할 수는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기범아, 어지간하면 이런 자리에는 좀 삼가라.”
“네? 하지만 전 어디까지나 민수를 순수하게 위로하기 위해서…….”
“그래. 우리 가족이 민수 저 녀석을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좀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남이 우리 가족사에 끼어드는 것은 원치 않아.”
“하지만 전 남이 아닙니다.”
“너의 순수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 최씨 일가는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오히려 나선 것은 최민수였다.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기범이 형은 제가 너무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됐다!”
최문경 부회장도 이 상황이 마땅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악어의 눈물을 훌쩍이는 김여정의 표정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는 누구보다 지금 방에 들어가 있는 김여정의 남편 최훈열 전무의 술수를 잘 알았다. 평소라면 김기범을 반겼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오늘 가족 식사 시간은 평소와도 많이 달랐다.
갑자기 일정이 당겨져서 일어난 일이다.
최용욱 회장이 어지간해서는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때문에 최민수, 김기범의 행동이 석연치 않다는 것을 느꼈으면서도 모른 척했다.
“아버지, 할 이야기가 있으면 서재에 가서 따로 하시죠.”
“…그래.”
최용욱 회장은 오히려 혀를 찼다. 다만 그 역시 김기범의 표정을 살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꼭 살쾡이 새끼 같아서 보기가 불편해.’
* * *
최용욱 회장은 식사를 간단하게 끝내고는 가족을 서재로 불러 모았다.
이번에는 딱 찍어서 최문경 부회장, 최동영 상무, 최민혁 실장 이렇게 네 사람만 말이다.
최민수가 조심스럽게 서재로 들어왔다.
그를 밀어 넣은 것은 다름 아닌 김여정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악어의 눈물을 흘리면서 최민수를 서재로 밀어 넣은 것이다.
“…….”
최민혁은 순간 최민수를 째려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최민수를 상대로 그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한숨을 내쉬었고 말이다.
최동영 상무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이 혀를 차면서 결국 최민수에게 자리를 권했다.
최민수는 위치상으로 볼 때 최민혁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최동영 상무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슬그머니 한 가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이제 우리 KM 그룹 구조조정이 막바지 단계입니다. 선택과 집중을 한 덕분에 현금 보유고는 급증했습니다. 이제는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용욱 회장은 갑작스러운 최동영 상무의 주장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평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최동영 상무는 굳이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제2이동통신 사업 말입니다. DL 그룹도 컨소시엄에 슬쩍 발을 담그려고 하는 중입니다. 우리라고 해서 못 할 것이 있습니까?”
"그건 어려울 거다. 김 회장 욕심이 많은 것은 다 알잖아. 이번에도 무리수를 둔 거야. 아마 하다가 그냥 말 거다.“
“아뇨. 제 말은 DL 그룹이 중간에 포기할 수 있으니 우리가 그 기회를 가로채면 되지 않겠습니까?”
“글쎄다.”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 실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최민혁의 눈치를 본 것이었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KM 그룹은 이동통신 사업에 끼어들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지금의 KM 그룹은 얼마든지 이동통신 사업에 끼어들 수가 있었다.
비록 지금 당장은 늦었다고 해도 방법은 많았다.
특히 그 자신은 재정 경제원이나 산업 통신부 쪽과도 깊이 소통하는 사이다. 그들이 원하는 이권을 준다면 못 할 것도 없다.
다만 그 이권의 소유주는 손자 최민혁 실장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피식 웃었다.
“셋째 큰아버지가 직접 고안한 겁니까?”
최동영 상무는 노골적인 조카 최민혁 실장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KM 건설 말입니다. 아직 상황이 마음을 놓을 정도는 아닐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