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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964화 (964/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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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시겠지만 통상 산업부에서도 회장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그 배후에는…….”

“당신들이 있다?”

피터 어빙도 강하게 나오는 최용욱 회장의 태도에 혀를 찼다.

“아뇨. 제가 이 자리에 온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의 올해 국제 수지 적자가 막대할 겁니다.”

“…그건 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입니까?”

“한국을 걱정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꾸 비협조적으로 나오시면 저희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예외 처리를 할 수밖에요. 최 회장님이 최소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진지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조용한 협박.

불행히도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국제 무역 수지 적자를 실감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의외로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개정 X 리포트 내용 일부분을 떠올렸다. 거기에서 국제 수지 적자와 한국 미래를 자세하게 언급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저, 정말 X 리포트대로 상황이 흘러가는구나.’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은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였다. 막대한 국제 수지 적자가 어떤 영향을 주는지 말이다.

“나머지는 시간을 들여서 직접 조사해 보기 바랍니다. 차입금 사태를 피한 KM 그룹은 무사할 겁니다. 하지만 다른 한국 대기업들도 그럴까요? 아니면 통산 사업부 쪽에 자문해도 됩니다. 그들이 최용욱 회장님에게 듣기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럼 전 이만.”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은 가벼운 인사와 동시에 서재를 나가 버렸다.

최용욱 회장은 바로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저 내용을 확인해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부산스러운 최용욱 회장 저택.

사용인조차 긴장 어린 표정을 한 채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본 최민수와 김기범은 고개를 갸웃한 채 사용인에게 질문했다.

뒤늦게야 외국인 몇 사람이 최용욱 회장의 저택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았다.

둘은 그들이 나서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저 사람은…….’

* * *

DL 전자 김용만 전무의 장남인 김기범은 보석으로 풀려난 후에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이를 갈았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민혁 실장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 나빠만 갔다.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은 이젠 그 자신이 넘볼 수도 없을 만큼 커져 버렸다.

다행이라면 최민혁 실장에게 이를 가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부친 김용만 전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니, DL 그룹 일가 모두가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앙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 DL 그룹 재정 상태가 극도로 나빠진 것이 다 최민혁 실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랬는데, 그저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이 어떤 식으로 수작을 부렸는지 몰랐을 뿐이다.

김기범은 덕분에 DL 그룹 차원에서 도움을 받아서 머리를 굴렸다.

그가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역시 최민혁 실장에게 치를 떨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바로 최훈열 전무의 장남인 최민수였다.

“야, 민수야, 그 지분 받은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너도 알잖아. 요즘 네가 증여받은 KD 통신이 얼마나 나쁜지.”

KD 통신은 장밋빛 기대와는 달리 날이 갈수록 재정 적자가 쌓여만 갔다.

최민수 역시 KD 통신 지분 일부를 증여받고 난 후에 최민혁 실장에게 고맙다고 했지만, 이제는 좀 생각을 달리했다.

‘설마 정말 이럴 줄 알았던 거야?’

그런데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었다.

다른 최씨 일가와는 달리 이미 최용욱 회장에게 증여를 받았으니 말이다.

만약 저 지분이 종이 쪼가리가 되면, 단 한 푼도 물려받지 못하게 된다.

‘마, 말도 안 돼. 미, 민혁이가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문득 최민혁 실장과 지금 감방에 가 있는 최훈열 전무와의 악연을 떠올리자 최민혁이 이렇게 일을 벌인 동기는 차고도 넘친다는 데에 생각이 닿았다.

최민수는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했다.

그는 결국 어머니 김여정의 도움을 받아서 최용욱 회장 저택을 주기적으로 오갔다.

김기범과 같이 말이다.

* * *

김기범은 최용욱 회장을 보면 늘 존경 어린 인사를 보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

최용욱 회장은 평소와는 달리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뒤늦게야 김용만 DL 전자 전무의 수작이 뭔지 눈치챘다. 그러니 김기범이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그가 그렇다고 한가족인 김기범을 대놓고 타박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최용욱 회장은 순간,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과연 김기범 같은 인물을 가족으로 여겨야 하느냐.

뒤늦게야 그는 손자 민혁의 입장을 떠올리고는 탄식하고 말았다.

그런데 KM 그룹과 DL 그룹은 일단 정략적이라고는 해도 혈연으로 묶인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김여정이 늘 지금 감방 생활을 하는 남편 최훈열 전무를 걱정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 최용욱 회장도 이제는 최훈열 전무를 감방에서 빼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최민수는 덕분에 감방에 가 있는 최훈열 전무의 장남 행세를 하면서 최용욱 회장에게서 동정표를 받으려고 했다.

그는 정말 최용욱 회장 저택을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드나들었다.

‘어, 저 사람은 누구지?’

그러다가 본 사람이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김기범이 그를 알아본 것이었다.

“맙소사 IMF의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이잖아.”

그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신문이었다.

신문 1면에 대문짝만 하게 IMF의 이번 일을 실어놓은 것이었다.

“…이게 뭐예요?”

“너 몰라? IMF 재정국 수석 자문관이잖아.”

“아니, 제 말은 왜 우리 정부가 굳이 IMF의 조언을 이렇게 듣냐는 거예요. 이건 어디까지나 권고 사안에 지나지 않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으니, 문제야.”

양아치 김기범은 탄식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에게 된통 당한 후에 세상의 한파를 경험하고 나서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과거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보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최민수는 의아한 눈으로 김기범을 쳐다보았다.

그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김기범은 DL 그룹 차원에서 지지를 받는 덕분에 최근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중에는 DL 그룹도 무시하기 힘든 것이 있었다.

“올해 들어와서 무역 수지 적자가 계속 심각해지고 있어. 당장 지난주까지 드러난 수치만 봐도 50억 달러를 돌파했으니까.”

“무, 무역 수지 적자가 그렇게 많아요?”

“말도 마라. 올해 예상 무역 수지 적자는 200억 달러를 넘는다고 하니까.”

문제는 무역 수지 적자 역시 GDP 대비 그 비중이 사상 최대치를 돌파할 것이라는 점이고, 이게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도 우리 경제 여건이 좋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되지 않을까요?”

“아니, 단기간에는 힘들다고 해. 다들 쉬쉬하지만 통상 산업부 내에서는 정말 말들이 많아.”

“…형이 그런 것까지 알다니, 다시 봐야겠어요.”

김기범은 쓰게 웃고 말았다. 그가 이 사실을 알고 싶어서 아는 것이 아니었다.

국제 수지 적자의 증가와 고착화는 환율에 악영향을 준다.

일본에서 단기로 막대한 차입금을 확보한 DL 그룹은 내부적으로 말이 많았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김기범이 아무리 양아치라고 해도 자신이 물려받을 유산 일부가 박살이 나게 생겼으니,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알게 된 사실이다.

하지만 통상 산업부도 뾰쪽한 대안이 없었다. 그들이 굳이 최용욱 회장을 상대로 압박하거나 아니면 다른 대기업을 이용해서 압력을 넣은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심지어 최용욱 회장조차도 이 상황을 잘 몰랐다. 그는 DL 그룹과는 입장이 좀 달랐다. 환율 문제는 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에플 지문 매각으로 얻은 달러 때문에 이익이었다.

그러니 그는 그걸 나중에서야 IMF 방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말이다.

상황이 이 정도였으니.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최민수는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진지하게 김기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김기범 역시 자신이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다면 알기 힘든 일이었다.

“…저기 IMF 인사가 최용욱 회장님을 방문한 것도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게 좀 의아하지. 가만.”

김기범도 이점은 의아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답을 떠올렸다.

“민혁이 그놈이 에플 지분을 막 팔아치우고 있잖아. 그 때문이 아닐까?”

“설마요?”

“아니, 생각을 해봐. 지금 민혁이 그놈이 에플 지분을 무려 10조 넘게 팔아치웠다는 소리가 파다해. 오죽하면 에플 주가가 결국 100달러 밑으로 내려갔겠어?”

최민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10조라니……”

“아니, 10조가 최저란 소리가 있어. 130~150달러 선에서 팔아치웠을 테니까.”

“…현실감이 너무 떨어져서 도저히 믿기지가 않네요.”

“그러겠지.”

김기범 역시 순순히 수긍하고 말았다. 그는 이 일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금 이곳에 있는 것도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아버지에게 이야기해야겠어.’

* * *

최민혁은 피터 어빙 수석 자문관과 최용욱 회장의 만남을 보고받았다.

자세한 내용까지는 몰랐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이 직접 전화해서 자세한 내막을 알렸다.

그는 알아서 하라고 말만 했다.

다만 내심은 좀 달랐다.

생각해 볼 일이 많았다.

‘할아버지를 압박한 통상 산업부 쪽도 한번 손을 써야겠어.’

어차피 지금은 딱 상황이 좋았다.

정부도, 에플 투자자도, IMF도, 샐로먼 브러더스도 미친 듯이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서 움직이니 말이다.

그는 결국 조성돈 팀장에게 지시해서 통상 산업부의 박대순 국장과 허원호 과장을 만나도록 손을 썼다.

조성돈 팀장은 박대순 국장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통상 산업부 관료 중에는 눈치가 빠르고, 소통이 능한 인물입니다. 다른 고위직과는 달리 의사소통도 쉽습니다.”

“뇌물을 달라고 하지는 않나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아예 안 받는 것은 아니지만, 대놓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나쁘지 않네요.”

“아마 최용욱 회장님을 만나서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을 겁니다. 물론 최용욱 회장님은 협박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지만 그럴 사람은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골프장에서 만난 최용욱 회장 얼굴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썩 좋은 협상 대상은 아닙니다.”

“그렇겠군요.”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최용욱 회장의 주변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최용욱 회장이 골프 미팅을 할 때 보인 그 걱정 가득한 모습.

바로 통상 산업부가 압력을 넣은 것이다.

그런데 이걸 통상 산업부만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조성돈 팀장이 그런 점을 지적했다.

“아무래도 에플 주식 매각 대금을 비롯한 벨린 투자가 얻은 이익 태반을 미국, 유럽 쪽에 묶어두기 때문에 일어난 일 같습니다.”

“그거야 세금 때문이잖아요?”

“맞습니다. 다른 대기업도 그런 식으로 처리하니까요. 다만 지금은 국제 수지 적자가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상황이어서 좀 다릅니다.”

만약 최저 13조가 넘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국내로 유입된다면 국제 수지 적자 문제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전생의 기억을 쭉 떠올려 보았다. 국제 수지와 관련된 안건은 많았다. 특히 적자와 관련해서 말이다.

“그거야 어쩔 수가 없죠. 경제 전반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놓인 상황이니, 국제 수지 적자를 바로 돌릴 수는 없잖아요.”

“올해 무역 수지 적자 폭이 무려 200억 달러가 넘으리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 그거야 정부 사정이죠. 그걸 왜 우리가 걱정해야 합니까?”

“정부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아니면 다른 강제 수단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냉랭한 최민혁 실장의 말에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통상 산업부의 행동도 한편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죄다 달러와 금으로만 모아 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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