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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사람 이야기는 좀 다르니.’
살짝 거리를 뒀다.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은 그런 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솔직히 한국의 통상 산업부를 통해서 이야기해도 의사 전달이 잘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더욱이 재정 경제원만 믿을 수도 없고요.”
최용욱 회장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전혀 예상도 못 한 이야기였다.
“하면 통상 산업부의 박대순 국장이 저에게 한 말도 IMF 때문이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처지에서는 일이 매끄럽게 흘러가도록 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
최용욱 회장은 잠깐 침묵했다. 그도 박대순 국장과는 안면이 있어서 알고 지내기는 했다. 다만 갑자기 그가 자신 앞에 나타나서 압박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도 그 부분을 고깝게 여기지는 않았다.
최근 나타나기 시작한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 때문이었다.
감당할 수준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자 폭이 계속 늘어난다는 거다.
박대순 국장은 통상 산업부를 대변해서 이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게 압박처럼 보였다.
최용욱 회장은 딱히 사업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손자 민혁을 호출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그런데 손자 민혁은 전혀 다른 소리를 했고 말이다.
싸게 산 주식을 비싼 값에 판다고 하는데, 뭐라고 하겠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자금을 적어도 국내로 들여오도록 권하고 싶었다.
무려 예상 금액으로 13조가 넘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말이다.
그 말을 해야 했는데.
‘하, 내가 그 녀석 눈치를 보게 되다니.’
이제 더 이상 손자 최민혁은 자신이 아는 그 최민혁이 아니었다.
부담스러워서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 한 것이었다.
그 결과가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의 방문이었다.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은 190이 넘는 덩치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멕시코 계열 남자였다.
그는 겉으로 봐서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드러난 면만 봐서는 말이다.
하지만 IMF 내의 위치를 봤을 때 단순히 그렇게 보기는 힘들었다.
최용욱 회장조차 상대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보다 피터 어빙 같은 인물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더 이상했다.
“…설마 민혁이 때문입니까?”
“…아니라고 말 못 하겠습니다.”
“이해는 합니다. 제 손자이니, 처음 성장할 때부터 도와줬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릅니다. 저도 어떻게 할 대안이 없습니다.”
“그래도 손자이지 않습니까? 더욱이 식사 시간에 늘 자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압니다.”
“…가족 식사 시간일 뿐입니다.”
“그것마저도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최민혁 실장과 같이 식사하면서 편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얼핏 봐서는 최용욱 회장을 비꼬는 것 같지만 실상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이 최용욱 회장을 넘어섰다는 뜻이었다.
그게 최용욱 회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는 이 상황 자체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피터 어빙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흠.”
피터 어빙 수석 자문관은 상대의 반응이 의아했지만, 장승일 실장이 나서서 중재해 주자 눈살을 찌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뭘 모르는 것이 있는 건가?’
* * *
당연히 피터 어빙 수석 자문관이 잘 모르는 것이 있었다.
최용욱 회장의 입장 말이다.
그는 통상 산업부를 비롯한 정부 기관만이 아니라 대기업 이곳저곳에서 압력을 받았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태반이지만 무시하기 힘든 것도 있었다.
이게 모두 손자 최민혁 실장의 방패막이 노릇을 한 인과응보였다.
최용욱 회장의 처지에서는 실로 황당했다.
그가 손자 최민혁의 대부 노릇을 할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손자 최민혁에게 연락해 봤다.
당연히 최민혁은 피터 어빙의 방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편한 대로 하세요. 제가 할아버지 손자란 것은 변치 않는 진실입니다. 전 늘 할아버지 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로 든든한 말이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도 못 한 답이었다.
[…무슨 대답이 그러냐?]
[그 어떤 일도 가족보다 우선순위일 수가 없습니다. 할아버지 말씀은 늘 옳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인석아, 나도 실수할 때가 있는 법이야.]
[그건 할아버지가 미처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해서 나온 실수일 뿐입니다. 명확한 정보를 안다면 그런 일을 할 분이 아닙니다.]
[이 할애비를 비꼬는 거냐?]
[아뇨. 전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냉랭한 최민혁의 지적.
겉으로는 최용욱 회장을 지지하는 것 같아도 잘 보면 질책하는 부분도 있었다.
다른 아닌 최민혁 실장 자기 일 말이다.
사실 최민혁 실장이 전생 기억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게 최문경 부회장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을 테니까.
최용욱 회장은 착잡하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가족끼리…….]
[압니다. 할아버님의 고상한 뜻을 말이죠. 돈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저도 옛날과는 달리 요즘은 할아버님 말씀을 다시 돌이켜 봅니다.]
[…고맙구나.]
[전 할아버님 손자입니다. 그런 말은 마세요.]
[그래. 그러면 내가 한 가지만 더 부탁하마. 문경이와…….]
[아뇨. 그건 곤란합니다. 최문경 부회장님과의 관계는 어차피 할아버지가 만든 것입니다. 그걸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하기는 힘듭니다.]
[쯧.]
최용욱 회장도 나직이 탄식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는 물론 최문경 부회장 일은 곧 잊어버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도 솔직히 최민혁 실장과 골프를 칠 때 잔소리를 좀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 자신이 골프장에서 느꼈던 손자 최민혁은 이미 거목이 되어 있었다.
‘허허허.’
그로서는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피터 어빙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다만 확인이 필요해서 장승일 실장에게 다시 질문했다.
“…무역 수지 적자가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거야?”
“여러 가지 일이 겹쳐 일어난 일이라서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GDP 대비 경상 수지 적자 비율이 비록 4.5%로 감당할 만합니다. 멕시코 위기 당시 7.9%에 비해서도 낮습니다. 다만 IMF의 경고치인 5%에 근접한 것이 문제입니다.”
“확실히 IMF가 끼어들 만하군. 결국, IMF를 이걸 명분 삼아서 정부에 간섭할 생각이었다는 소리겠어. 그런데 민혁이 그 녀석이 에플 지분을 무려 12%나 팔아치우려 했으니.”
“현재까지 8% 지분을 매각했습니다. 매각 대금은 최하가 10조가 넘습니다. 현실적으로 봐서는 13조는 잡아야 합니다.”
“…그 달러가 국내로 들어왔다면, IMF가 뒤집어질 만하군.”
“애초에 IMF의 의결권을 가진 나라가 미국입니다. 그런데 헤지펀드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태국 바트화를 노린 것이 그 증거입니다.”
“…….”
최용욱 회장은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이번 일이 결코 단순하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점을 느꼈다.
그는 그제야 피터 어빙이 왜 자신을 방문해서 굳이 최민혁 실장을 설득해서 에플 매각 자금을 가지고 IMF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피터 어빙에게 다시 연락해 봐.”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 역시 침중한 얼굴을 한 채 곧 대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최용욱 회장과는 좀 다른 관점에서 이 사태를 쳐다보았다.
‘맙소사. 전부 다 최민혁 실장님이 예측한 개정 X 리포트대로 움직이잖아.’
물론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다만 그게 큰 흐름을 건드릴 정도는 아니었다. 개정 X 리포트는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 * *
최용욱 회장은 이번에 자신의 초대에 응한 피터 어빙을 보자 단도직입적으로 한 가지를 지적했다.
“아무리 그래도 IMF의 최고 의결권을 가진 국가가 미국인데, 제 손자 눈치를…….”
하지만 피터 어빙은 이전의 그 모습과는 좀 달랐다. 그는 냉랭하게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미국 하원에서 미국 안보에 있어 가장 위험한 0순위로 꼽은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 무인 항공기와 사드를 가지고 미국 국방성을 상대로 압박까지 하고 있습니다.”
“…….”
최용욱 회장은 이마를 손으로 잡았다. 얼핏 듣기는 한 내용이다. 다만 그 내용을 말하는 사람이 IMF 고위 관료라는 점이다.
‘…미국 정부의 비공식적인 압박인가?’
그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져 갔다.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은 원래 소모성 이야기로 대화를 풀어가려고 했다. 그게 분위기를 더 좋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지 못했다.
심각한 이야기만 계속되었다.
결국 최용욱 회장이 굳은 얼굴을 한 채 진지하게 나갔다.
“하면 저보다 민혁이 그 녀석을 직접 만나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최용욱 회장님이 직접 말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괜한 이야기로 최민혁 실장님과 대립하고 싶지 않습니다.”
“민혁이 성정 때문입니까?”
“…….”
피터 어빙 수석 자문관은 솔직히 최민혁 실장이 부담스럽다는 뉘앙스를 보였다. IMF 내의 핵심 실무진이 말이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실로 황당한 일이었다.
“허허허.”
최용욱 회장은 이번에는 정말 놀랐다. 그도 요즘 와서야 손자 민혁의 악명(?)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얼마 전까지는 국내를 위주로 움직였는데, 요즘은 미국으로 반경을 넓혔다.
당장 국내만 해도 10대 대기업 중의 하나인 HY 그룹, LC 그룹, 오성 그룹이 손자 눈치를 봤다.
그도 뒤늦게야 애니 융합 기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막상 그 기술이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혹시나 먹을 것이 있을까 싶어서 장승일 실장에게 TFT팀을 꾸려서 조사시켰다.
그리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
이 일에 끼이기 위해서는 LC 전자 수준의 재조업과 자본 기반이 있어야 했다.
KM 그룹 계열사 중에 그게 가능한 기업은 KM전자뿐이었다.
지금 KM 그룹으로서는 대안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 새로 생긴 KM 센서와 같은 계열사에 집중하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결국 현실적인 후보 중에 하나인 HY 그룹은 최민혁 실장과의 협업에 정말 진심으로 매달렸다.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은 마치 영업 사원 같은 포즈를 한 채 비서가 내온 녹차를 음미했다.
“그보다는 최민혁 실장님의 포지션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도 최민혁 실장님을 건드리기가 불편합니다. 그렇다면 차선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용욱 회장은 어이가 없었다.
“하면 저는 만만하게 본 겁니까? 설마 제가 IMF의 압력이 두려워서 민혁 그 녀석에게 압박을 넣을 거로 생각합니까?!”
격앙된 목소리.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은 혀를 찼다. 자신이 너무 서둘렀다고 생각했다.
‘안병우 때문에 너무 무리수를 뒀나?'
하지만 이번 일은 안병우 차관보와는 별개였다.
IMF 내에서도 최민혁 실장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미국 하원 쪽과 관련된 인물들이 말이다. IMF가 흔히 음모론에서 말하는 범죄 조직은 아니지만, 최민혁 실장 같은 인물을 가만히 두지는 않았다.
IMF 의결권의 18%를 보유한 곳이 미국이기 때문이다.
그가 굳이 안병우 차관보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단순히 하버드 대학 동기라서 이야기를 들어준 것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이 그들 일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좋았다.
최민혁도 재벌 3세로 조용히 살았다.
그런데 에플 지분 매각을 시작으로 그 흐름이 바뀐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앞으로 재벌 3세를 뛰어넘어서 시끄럽게 살 의도인 것 같았다.
피터 어빙 재정국 수석 자문관은 굳이 협박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