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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란 말의 어감은 이전의 그 어감이 아니었다. 그저 손자가 조부에게 하듯 편안한 말이다. 다만 이런 느낌은 최용욱 회장에게 있어 생소했다.
특히 다시 건강을 회복해서 KM 그룹 경영권을 쥐어 잡은 최용욱 회장에게 있어서는 말이다.
최용욱 회장은 다시 에플 지분 매각과 관련된 기사 부분을 내밀었다.
“…이거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거냐?”
“에플 주식 판 거요? 그거야 주가가 많이 올라서 그렇죠.”
“아니, 내 말은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잖아. 무려 1조 가까운 물량을 갑자기 판 것을 말하는 거야!!”
최민혁 실장은 잠깐 최용욱 회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 봐서는 단순히 최용욱 회장 개인 생각만은 아닌 듯했다.
그건 최용욱 회장의 표정에서도 드러난다.
초조. 당혹. 당황.
온갖 감정이 가득했다.
이건 최용욱 회장이 보일 수가 없는 반응이다.
‘압박이 생각보다 심한 건가?’
최민혁 실장은 최용욱 회장을 압박한 명단을 쭉 떠올려 보았다. 후보자는 생각보다는 많았다. 아마 그들은 최민혁 자신을 감싼 최용욱 회장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노했을 것이다.
그는 굳이 그들이 누구인지 더 생각하지 않았다.
자잘한 문제 따위는 굳이 자신이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이보다는 앞으로가 문제다.
‘어차피 힘숨찐 놀이는 그만하기로 했으니까.’
그렇다면 이전과는 외부 대응이 다를 것이다.
그건 이번 세계 경영자 모임 분위기가 잘 증명해 준다.
심지어 MPEG-2 관련 일본 기업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이제는 MPEG-2 가치를 MP3룰 통해서 유추했을 것이다.
극한 반발은 언제라도 나올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터진 것도 당연했다.
최민혁은 설령 최용욱 회장이 다 잡은 물고기라도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골프채를 김명준 과장에게 넘긴 후에 천천히 걸었다.
침묵이 감돌았다.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 실장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황당한 것은 그 자신이 마치 최민혁 실장의 비서 같은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의 기백에 질린 것이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다.
최민혁 실장의 등은 오늘따라 최용욱 회장에게도 유독 거대하게 다가왔다.
‘허, 이 녀석이.’
확실히 손자 최민혁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니, 달랐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중간 경영자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재벌 총수 못지않은 기백을 보였다.
단순히 국내 재벌 수준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 회장 수준 말이다.
그건 최민혁 실장 뒤를 따르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들 숨을 죽인 채 이 젊은 절대자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 * *
최민혁 실장이 과거 에플 지분을 매각한 금액은 2조 6천억이다.
에플 지분 8%다.
이 지분을 누가 사들였는지는 솔직히 지금 와서는 알기 어렵다.
대부분이 차명으로 사들인 탓이다.
이쪽저쪽에서 말이다.
하이에나 떼는 떼거리로 몰려와서 최민혁 실장이 뿌린 고기를 먹었다.
따라서 이들 세력의 처지에서는 에플 주가가 오르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최민혁 실장의 에플 지분은 그만큼 복잡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골드만 삭스가 무리수를 둔 것도 그런 성격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은 굳이 복잡한 정치 역학 따위는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최용욱 회장의 모습에 쓰게 웃었다.
이보다는 골프에 집중했다.
오늘만큼은 골프를 즐기고 싶었다.
그는 과감하게 골프채를 휘둘렀다.
골프공은 마치 그 자신이 원한대로 쭉쭉 뻗어 나갔다.
“…….”
최용욱 회장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저 손뼉을 칠 수밖에 없었다.
환호도 했고 말이다.
최민혁은 굳이 그린 읽기, 방향 조절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냥 하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툭 친 골프공은 정교하게 굴러서 홀 안으로 들어갔다.
환호 갈채가 이어졌다.
최민혁은 그제야 다시 골프채를 김명준 과장에게 내밀었다.
김명준 과장은 신기한 눈으로 골프채를 이리저리 만졌다.
그는 지금 사정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속임수가 있는 가 하는 눈치였다.
최민혁 실장은 혀를 찼다. 그 역시 오늘 날씨처럼 골프가 아주 잘되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최용욱 회장에게 슬쩍 말했다.
“…주식 투자의 정석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 아닙니까?”
최용욱 회장은 골프채를 장승일 실장에게 내밀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과 나란히 걸으면서 힐끗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곳 골프장을 찾은 이들이 마치 프로 골프 무대를 관람하는 것 같은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
괜한 비교.
골프채를 휘두르기만 불편했다.
“아뇨.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 주식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
하지만 그도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모르는 전화번호라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아는 이였다.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님?]
그는 결국 최용욱 회장에게 말한 후에 슬쩍 거리를 뒀다.
다만 굳이 최용욱 회장에게 숨길 생각이 없어서 슬쩍 휴대폰 음량을 최대한 올렸다.
[네, 말씀하세요.]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크게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도대체 어쩔 생각입니까?!]
밑도 끝도 없는 말이 뜻하는 바는 즉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 역시 크게 당황했다는 것이었다.
[지분 판 거 말인가요?]
[네, 아니, 에플 주식을 블록딜로 거래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그걸 왜 세상에 다 알린 겁니까? 설마 언론에도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린 겁니까?!]
이건 최민혁 실장이 지시한 것이 아니었다. 주식을 매입한 이들 중에 누가 흘린 것이 분명했다. 굳이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말하지 않았다.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최민혁 실장에게 부탁까지 했는데, 자신의 제안을 무시한 것 같아서 단단히 화가 났다.
최민혁이 그걸 모르지 않았다.
[제가 혹시 불법을 저지른 겁니까?]
[하,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최민혁 실장님의 영향력에 대해서 몇 번이나 말했지 않습니까? 다른 분과는 달라서 문제가 된다고!!]
최민혁 실장은 슬쩍 자신 주변에 모인 구경꾼들을 쳐다보았다.
[아, 그 정도는 직접 체감하고 있으니, 굳이 두 번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시는 분이 일을…….]
[제가 알린 것 아닙니다.]
[설마 그럼 골드만 삭스 측에서 알렸다는 말입니까?]
최민혁은 혀를 찼다.
‘하여간에 입이 정말 가볍다니까.’
[그건 그쪽에 물어보거나, 언론사 측에 확인해야 할 겁니다.]
그도 뒤늦게 자신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과거에 한 일이 있어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하, 하지만 최민혁 실장님이 이런 상황을 모를 리가 있습니까. 최민혁 실장님이 사전에 손을…….]
[저도 그렇게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게 문제가 될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그 여파가 어느 정도인지 추론할 수가 없었습니다. 괜히 오해를 받을 바에는 차라리 그냥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손을 안 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왜요? 쉽게 생각하죠. 에플 주가가 올랐잖아요. 아니, 거품이 많이 껴서 문제죠. 그러면 당연히 주식을 팔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
한동안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희미한 욕설이 들릴 뿐이었다.
[…조, 좋습니다. 하면 앞으로 이렇게 계속 일을 공개적으로 처리할 생각입니까?]
[상황 봐서요.]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주식 매각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적 자체는 돈이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부탁하지만 에플 주식을 매각해도 속도 조절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쪽에서도 상황을 확인해 봐야 하니까.]
[물론이죠.]
* * *
최용욱 회장은 전화가 끊어지자 최민혁 실장 옆으로 다가왔다. 그도 망설였지만, 도저히 전화 내용이 간단하지가 않았다.
더욱이 정확한 내용을 듣지도 못했다.
“누구 전화인지 내가 알 수 있냐?”
최민혁 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다.
“조시 로버트 미국 국무부 아태 차관보입니다.”
“…그렇구나.”
최용욱 회장은 반사적으로 대답하기는 했지만 ‘아태 차관보’란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옆에 귓속말로 ‘아태 차관보’의 위치에 대해서 말하는 장승일 실장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당연히 한숨부터 내쉬었다.
솔직히 미국 국무부가 어째서 손자 최민혁과 연락하는 지부터가 의아했다.
더욱이 두 사람의 대화로 봐서는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했다.
“…원래 미국 국무부와 알고 지냈느냐?”
“정확히는 SEC에 있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 국무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저랑 서로 알고 지내는 처지라서 큰일이 있을 때면 연락합니다.”
“그렇구나.”
SEC는 또 뭔가.
이야기하면 할수록 의문은 더 쌓여만 갔다.
아니, 그는 질문하는 것조차 이제는 부담스러웠다.
최용욱 회장은 ‘미국 국무부’라는 말에 머리가 아파서 더 질문하지 못했다. 손자 최민혁이 뭘 하는지 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원래 최민혁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결국 혀를 내두른 채 아무런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에플 주가 거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조차도 이제는 에플 주식을 다시 사들이는 게 부담스럽기만 했다.
이제까지 사고팔고 해서 차익을 많이 벌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에플 주식을 끝까지 들고 있는 사람은 손자 최민혁이었다.
“…이번 블록딜로 얼마나 번 거냐?”
“1달러에 매입했으니, 대충 판 가격 기준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최민혁 실장이 에플 주식을 매입한 초도 지분은 40%였다.
이 중에 8% 지분을 매각했고 말이다.
32%를 기준으로 해서 에플 주식을 팔고 있었으니.
이걸 다 감안하면.
“…1조 2천억이라니.”
“세금을 고려해야죠.”
“그렇겠지. 어느 정도 지분을 매각할 생각이냐?”
“합쳐서 총 12%입니다.”
“…….”
최용욱 회장은 순간 안 돌아가는 머리로 암산하고 나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려 12조, 이게 최소 금액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도 100달러 기준이다.
지금 에플 주가는 다시 140달러를 돌파했으니.
그는 올해 들어와서 자신이 했던 모든 경영 활동이 허무하기만 했다.
‘…돈은 이렇게 버는구나.’
자신조차 허탈했다.
왜 자신을 공격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줘도 믿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에플 주식을 가장 오래 들고 있던 사람은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는 뒤늦게야 초대박을 쳤다고 생각한 에플 지분 매각을 후회했다.
만약 지금 에플 주식을 판다면 400% 이상의 수익이 나올 것이다.
단위가 천억 단위였으니.
‘…그때 에플 주식을 팔지 말아야 했나.’
* * *
최민혁은 원래 미국으로 가서 스티븐이 기조연설 마무리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혹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그건 세계 경영자 모임에서 이미 증명이 된 사실이었다.
그는 그저 이제까지 은둔 경영자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피부로 체감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 미국을 방문하기란 곤란했다.
당장 자신이 한 일 때문에 말이다.
실상 최민혁 실장이 에플 지분 1%를 블록딜로 매각한 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제 에플이 나래를 펴고 날아오르는데, 에플 지분을 팔았다는 게 문제였다.
당연히 이 일로 인해서 난리가 났다.
그 혼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그도 이 상황을 처음에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성돈의 생각은 좀 달랐다. 아니, 기획 팀 생각은 달랐다.
“이대로 그냥 두실 생각입니까?”
“홍보 팀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