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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세리던 이사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생각보다 최민혁 실장이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리에서 필요하다면 조엘 맥클레인에게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골드만 삭스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제안 말이다. 심지어 그에게 독자적인 투자 팀을 따로 만들어주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봐서는 그런 제안이 아예 먹힐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한번 질러 보았다.
“…어때?”
“아마 최민혁 실장님을 만나기 전이라면 진지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아니, 벨린 투자의 사내 복지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긍정적으로 대답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그가 또다시 슬쩍 내민 것은 초호화 펜트하우스 주변 경관과 가족사진이었다.
조엘 맥클레인 가족은 마치 천국에 있는 가족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특히 조엘 맥클레인의 부인이 짓고 있는 표정에서 비치는 행복감.
그건 말로 형언하기 힘든 것이었다.
조엘 맥클레인 수석 투자자가 굳이 이런 사소한 이야기를 한 것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서 사진으로 일단 선을 그은 것이었다.
‘최 실장이 자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리가 없지. 그분은 에플 지분조차 여윳돈으로 마련한 것이니까. 최민혁 실장님을 에플 지분을 팔아도 그만, 안 팔아도 상관이 없어.’
하지만 상대가 그런 점을 알 리가 없었다.
조엘 맥클레인은 때문에 느긋하게 에릭 세리던 이사를 상대했다.
에릭 세리던 이사는 어떻게 해서라도 에플 지분을 사들여야 할 처지였다.
거래는 일방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주당 120달러라니. 자네 미친 것 아냐? 작년 에플 주식 평균가는 1달러를 넘지 않았어!!!”
조엘 맥클레인은 벨린 투자의 현황을 이미 처음부터 살펴봤다. 그러니 그 내막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처음에 그 자료를 보고 나서 충격에 빠졌다.
투자의 정석.
최민혁 실장이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압니다. 제가 봐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에플의 가치는 이전의 가치와는 다릅니다. 그걸 마크 엔드리슨이 직접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가 슬쩍 내민 것은 다름 아닌 타임지였다.
표지에는 최민혁 실장과 마크 엔드리슨이 웃으면서 건물을 나오는 장면이었다.
그 주변은 더 놀라웠다.
두 사람을 따라붙는 이들이 백여 명을 넘겼던 것이었다.
그들이 최민혁 실장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실로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인터넷 군주, 최민혁 실장!]
표지의 글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니, 그 내용만이 아니라 풍자화 형태로 인터넷 군주 최민혁 실장이 인터넷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을 과감하게 그렸다.
에플 주가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블록딜 거래야. 자네도 늘 많이 해본 협상이잖아. 이렇게 일방적으로…….”
조엘 맥클레인은 쓰게 웃고 말았다.
“지난주와는 상황이 또 달라졌습니다. 마크 엔드리슨이 최민혁 실장님을 지원한다면 많은 것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
에릭 세리던 이사는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무겁기만 했다. 조엘 맥클레인이 뭘 말하는지 잘 아는 탓이다.
일단 1차 협상은 여기서 끝낼 수밖에 없었다.
‘골치 아파졌군.’
* * *
골드만 삭스의 상황이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회사 순이익이 좋지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골드만 삭스가 아니었다.
3년 전에는 무려 순이익이 33억 달러를 넘었다. 하지만 이 이익이 불과 한 해가 지나자 단숨에 7억 달러 밑으로 추락했다.
심지어 작년에는 고작 1억 달러에 불과했다.
경영난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골드만 삭스는 결국 상장을 통해서 경영난을 벗어나자는 계획까지 만들었다.
바로 주식 공개.
골드만 삭스가 상장만 한다면 주가 상승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골드만 삭스 주가 총액도 늘어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일도 실패했다.
주식 공개 자체가 무산되어 버린 것이었다.
“호, 뜻밖이네요.”
조엘 맥클레인 수석 투자자에게 연락을 받은 최민혁 실장도 골드만 삭스의 경영 성적표와 전생 기억을 교차 검증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조성돈 팀장 역시 벨린 투자의 우영민 부장에게 받은 보고서를 토대로 말했다.
“조엘 맥클레인 수석 투자자 이야기로는 골드만 삭스가 굳이 외부 일에 소극적인 이유라고 합니다. 물론 바트화 계획과 같은 리스크가 큰일에 집착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돈이 필요한 골드만 삭스.
그들은 도박이라도 해야 했다.
때문에 그들에게 바트화 투자 계획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최민혁 실장조차 IMF 이전에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 혀를 내둘렀다.
‘설마 이런 일이 있었어? 이런 정보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그래요? 그건 정말 흥미롭네요.”
최민혁 실장은 조엘 맥클레인 수석 투자자가 정리한 보고서를 살피면서 에릭 세리던 이사에 대한 것도 확인했다.
그는 미국에 있을 때 모건 스탠리만 죽어라 때렸다.
“아쉽네요. 차라리 골드만 삭스를 상대로 몽둥이를 휘두를 것을 그랬어요.”
“네?”
“모건 스탠리의 마이크 라이언 이사 말입니다. 기름 장어 같아서 질색이었죠.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운도 따랐어요. 그쪽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면 손실이 클 수도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모건 스탠리는 다양한 분야에 투자한다. 최민혁 실장은 그 많은 사업 중에 한 경쟁자일 뿐이다. 만약 그들이 최민혁 실장만을 공격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죠.”
솔직히 그도 지금이라면 모건 스탠리를 대놓고 밟아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최민혁 실장 자신도, 마이크 라이언도 상대를 아주 잘 아니까.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태도에서 최악의 경우 큰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자 가슴이 덜컥했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저, 절대 안 됩니다!”
“아, 뭘 그렇게 놀라세요? 농담입니다.”
“…네.”
조성돈 팀장은 놀라 버린 가슴 한구석을 누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최민혁 실장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서 더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실무진에게 다 떠넘긴 것도 일이 잘못되면 변명할 명분의 하나니까.
“어떻게 하고 말고가 없죠. 어차피 각 책임자에게 맡겼잖아요. 그들에게 결정권까지 넘기죠. 솔직히 에플 주식을 100달러에 팔아도 괜찮으니까.”
실제로 블록딜 거래는 수십 명의 브로커를 통해서 진행 중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설마 타임지에 최민혁 실장님 기사가 실릴 줄은 몰랐습니다. 여파가 생각보다 큽니다.”
타임지가 내보낸 기사는 타임지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국의 대형 언론 역시 뒤이어 여러 가지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 중에는 최민혁 실장을 옹호하는 얘기도 있었지만, 오히려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만만치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에플 주가 폭등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마크 엔드리슨을 만나서 딴 수작을 부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이건 곧 시티븐의 기조연설과 차기 제품에 대한 간접 광고로 이어졌다.
최민혁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 역시 가끔 나와 있는 자극적이고 미묘한 기사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제가 음모론의 최종 보스가 되다니. 그건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아서 일단 미국행 항공기 예약 편은 다 취소했습니다.”
그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또 있었다.
그는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최용욱 회장이었다.
[네? 골프요? 뭐, 알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툴툴거렸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 관리를 적당히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작업은 전부 다 끝내 놓았다.
간혹 기름만 치면 된다. 지금처럼 말이다.
‘골프라? 흐음, 오랜만인가? 그래도 약간 연습은 해야겠어.’
* * *
에플 지분 1%의 블록딜 거래는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거래 당사자는 다름 아닌 골드만 삭스였다.
주당 거래 가격은 무려 110달러였다.
단순 계산으로 모두 1조 1천억 짜리 거래였다.
잡다한 비용을 고려하면 실제 금액은 더 줄어줄 수밖에 없다.
실로 이해하기 힘든 거래였다.
하지만 이 거래가 가능한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에플 주식은 시장에서 생각처럼 많이 유통되지 않았다.
무려 1% 지분을 시장에서 사들이게 되면 에플 주가가 140달러를 단숨에 뚫어 버린다.
골드만 삭스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마크 엔드리슨’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프리미엄이 컸다.
특히 인터넷 상거래와 관련된 사업이 본격화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건 곧 에플 주식 가치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 실장의 명성을 올릴 수 있는 일.
하지만 최민혁은 때문에 경기도 외곽의 골프장에 와서도 자신이 지금 진행하는 일을 아예 내세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은 입장이 좀 다른 것 같았다.
그는 대문짝만 하게 나온 블록딜 거래 기사를 최민혁에게 보여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거냐? 에플 1% 지분을 넘기다니?”
“아, 그거요. 별일 아닙니다. 그냥 주식을 판 것에 불과합니다.”
“1% 지분 매각이 그냥 판 거라고? 그것도 골드만 삭스에게 말이야?”
“골드만 삭스도 과거의 그 골드만 삭스가 아닙니다. 휘청휘청하나 보더군요. 그래서 제가 한번 밀어주기로 했습니다.”
“…진심이야?”
“당연히 농담이죠.”
“…….”
최용욱 회장은 손자 최민혁을 잠깐 째려봤다. 최민혁은 물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의 시선을 피하려고 가장 이상적인 포즈로 스윙한 후에 공이 나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늘 높이 치솟은 골프공은 자신이 원한 위치에 정확하게 놓였다.
오가는 이들 중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다들 손뼉을 쳤다.
그들 대다수는 최민혁 실장을 발견한 후에 따라붙은 이들이었다.
[와, 완전 프로잖아!]
[이거 너무한 것 아냐? 최민혁 실장이 골프를 저렇게 잘 쳤어?]
[사거리가 270은 넘는 것 같은데, 저럴 수가 있는 건가?]
[최민혁 실장 나이를 감안하면 골프를 중학생 때부터 배운 거야?]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다만 최민혁 실장은 전생에서 여자를 후리기 위해서 온갖 기교를 배웠다. 그중에는 골프도 있고 말이다. 놀라운 것은 최민혁 실장이 골프가 마음에 들어서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골프 프로 자격증까지 받았다는 거다.
‘이게 되네?’
이제까지 꾸준하게 관리한 몸.
힘은 다소 부족해도 프로 골퍼의 자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
최용욱 회장은 혀를 내두른 채 멍하니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는 허탈한 어조로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골프는 언제 배운 거냐?”
“틈틈이 연습했습니다.”
“혼자서 했다고?”
“아뇨. 프로 골퍼에게 따로 교습을 받았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이 일을 잘 아는 경호원 김명준 과장은 헛기침이 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니,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 옆에 늘 있었지만 최민혁 실장이 골프를 배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최용욱 회장이 김명준 과장의 표정을 살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민혁이 네 녀석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것 같구나. 솔직히 좀 놀랐다.”
최민혁 실장은 골프채를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툴툴거렸다.
“사업 말입니까? 골프 말입니까??”
“둘 다다.”
물론 이는 최용욱 회장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최용욱 회장에게 연락을 받아서 이 자리에 같이 나온 최영란 본부장 역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도 최용욱 회장의 전화를 받고 이 자리에 오기는 했지만, 최민혁 실장이 같이 초대받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최민혁 실장의 프로 골퍼 못지않은 골프 스윙에 크게 놀란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할아버지, 뭐라고 하셨죠? 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