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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샐로먼 이사 역시 안색을 굳히고 말았다. 그는 역시 ‘최민혁 실장’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하긴 이제까지 일이 계획대로 풀린 적이 없었지.’
“이번 일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소한 모바일 애니에 대한 윤곽이라도 잡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겉으로야 잘 대답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민혁이 이 새끼가 또 무슨 꿍꿍이를 부리는 것일까? 설마 내가 LC 전자나 HY 전자를 부추길 것을 예상이라도 한 걸까? 에이, 말이 안 되잖아.’
다만 그는 스스로 부정하면서도 뒤늦게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자신이 하려는 일을 최민혁 실장이 사전에 다 알고 있는 듯한 느낌 말이다.
‘가만, 혹시 내부 정보가 샌 것이 아닐까?’
그는 결국 권재홍 비서실장을 호출해서 이번 사태에 인원을 더 추가했다.
[다른 것을 떠나서 민혁 그놈이 사전에 대응책을 준비한 것인지 꼭 확인해 봐. 특히 장 실장 쪽이라면 틈이 보일 수 있으니, 그쪽에 더 집중해. 어쩌면 우리 쪽에서 정보가 샐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 * *
장승일 실장은 실상 요즘 최문경 부회장에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한국 경제가 변화하는 부분에 더 집중했다.
경제 개방.
이런 이벤트는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과연 한국 기업이 세계적 기업과 싸워서 잘 이길 수 있느냐는 문제 말이다.
이 부분은 KM 그룹 역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한국 경제가 큰 변혁의 시대에 진입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이걸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통해서 직접 체감했다.
그는 때문에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보면서 우리 한국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과 경쟁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KM 그룹의 노력만으로는 힘들었다.
최민혁 실장 같은 돌연변이가 아니라면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오성 전자와 같은 대기업과 손을 잡는 것이 좋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최민혁 실장이 이미 사전 준비를 다 놓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확인할 때마다 최민혁 실장님의 능력에 소름이 돋아.’
그 시작의 목적으로 선택한 협업 중의 하나가 애니 아파트였다.
LC 전자와는 다른 측면에서 협조했고 말이다.
그는 최민혁 실장 도움을 얻어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것처럼 최대한 이 기회를 이용했다.
KM 산업 매출은 작년 대비 계속 상승세를 거듭했다.
이달까지 지난 실적 대비 다시 200% 이상의 신장세를 기록했다.
다른 대기업과의 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였다.
그는 때문에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고민했다.
그가 아는 오성 전자나 LC 전자 같은 대기업은 늘 뒤통수를 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님은 마치 그런 일에 대해 보험이라도 들어두듯 여러 가지 장치를 해놓았어.’
그런데 LC 전자가 설마 이빨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물론 미수다.
결과가 좋지 않아서 일이 흐지부지되었다. 만약 성과가 좋았다면 KM 전자를 상대로 제대로 뒤통수를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문제는 LC 전자에게 보복할 경우다.
이 일이 진행되면, LC 전자와의 거래를 통해서 얻는 이익을 포기해야 했다.
심지어 미래 수익도 말이다.
장승일 실장은 때문에 KM 전자의 본사에 들어서자마자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다만 그도 번쩍번쩍 빛나는 초고층 빌딩 1층 라운지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구길모 차장은 다소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KM 전자가 본사를 옮겼습니다.”
“어? 그래? 아, 맞아. 그랬지.”
테헤란 밸리 한쪽을 차지한 높이 30층의 거대한 빌딩.
그 일부가 KM 전자의 신사옥이었다.
장승일 실장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뒤늦게야 현실을 깨달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민혁 실장이 몇몇 수행원과 같이 1층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여긴 너무 답답하니 밖으로 나가죠.”
“아, 네.”
장승일 실장은 힐끗 건물을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KM 전자가,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은 모르지 않았다.
‘당장 80달러를 돌파한 에플 주가가 대박이니까. 지금 봐서는 100달러도 곧 넘어설 것 같아. 비록 2조 6천억을 벌기는 했지만 정말 아쉬울 것 같아.’
* * *
최민혁 실장은 의외로 멀리 가지 않았다. 그가 간 곳은 뜻밖에도 선릉 공원이었다. 불과 사무실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자꾸 본사 사옥을 살피던데, 그거 임대받아서 들어간 겁니다.”
“네? 아니 왜…….”
장승일 실장은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이 미국에 갈 때마다 하는 일이 초호화 펜트하우스를 사들이는 거다.
에플 주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랠리가 진행되면서 매입하는 건물 숫자는 더 늘어났다.
그런데 국내 건물은 사들이지 않다니.
최민혁 실장은 조언도 해주었다.
“지금 당장은 부동산에 신경 쓰지 마세요. 차라리 있던 건물을 다 매각하는 게 좋죠.”
“…자세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제가 이미 언론 나가서 다 설명했죠?”
“…국가 부도설 말입니까? 하지만 그 일은 최 실장님이 추상적으로…….”
“추상적이라고 누가 그래요? 난 분명히 국가가 부도난다고 명시했습니다.”
“…네.”
최민혁 실장은 장승일 실장의 안색을 살피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결정은 장 실장님이 하는 겁니다. 다만 책임 역시 장 실장님이 지는 겁니다. 참고로 투자에 관해서만큼은 이제까지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투자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저입니다.”
다소 건방지면서도 오만한 태도였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실장이 자만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굳은 안색을 한 채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최민혁은 그런 장승일 실장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손짓으로 선릉 공원 주변을 가리켰다.
“여기 좋죠?”
“…그러네요.”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실장이 던진 화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최민혁 실장이 내민 캔 커피를 홀짝이면서 힐끗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봤다. 너무 쫀쫀한 것 같았다.
최민혁은 커피를 홀짝이면서 벤치 한쪽에 쭉 늘어선 KM 기획실 직원과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인물인데, 익숙한 이가 하나 있었다.
‘가만, 어디서 봤지?’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저 두 분은 처음인 것 같은데요?”
“아, 사직한 임권수 팀장하고 손명수 차장 대리로 들어왔습니다.”
김연석 팀장하고 조민호 차장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서 자기 소개를 했다.
뭐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일에 전문성이 있다는 자기 PR이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묘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익숙한 한 사람의 정체를 결국 기억해 냈다.
‘설마 김연석 팀장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그가 김연석 팀장을 아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최문경 부회장의 외가 친척 중에는 세 손가락에 꼽히는 유능한 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이 우연히 이 자리에 참석할 리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작정하고 자기 사람을 장승일 실장 밑에 박아넣은 것이다.
장승일 실장은 그런 내막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최민혁 실장은 내심 집요한 최문경 부회장의 행동에 감탄하고 말았다.
‘진짜 포기를 몰라. 그런 열정으로 사업했다면 초대박을 쳤을 텐데 말이야. 하긴, 장 실장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니까.’
원래라면 IMF를 거치면서 KM 그룹은 공중 분해 되게 된다.
김연석 팀장이 나서는 것은 바로 이 시기다.
KM 그룹이 파산 절차에 들어갈 때 합류하는 인물이 바로 김연석 팀장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을 대리한 것이다.
김연석 팀장은 평범한 직장인 흉내를 내면서 은행과 최문경 부회장 사이에 중간 고리 역할을 한다. 덤으로 채권 은행과의 중재도 하고 말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원래 미국으로 도피해 있었던 시점이었다.
김연석 팀장은 자신이 미국에서 배운 인수 합병 수법을 이용해서 부도가 난 KM 그룹에서 최대한 이권을 챙겼다.
불법도 동원해서 말이다.
그 자금 태반이 공적 자금이었다.
결국 KM 그룹을 살리기 위해서 들어간 자금을 착복한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무려 20년이 지난 후라는 것이다.
김연석 팀장은 또한 채권 은행과 손을 잡고 최민혁 실장이 그나마 받은 유산을 다 빼돌린다. 채권 은행을 이용해서 최민혁의 자산을 다 압류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뀐 시점에서는 역할이 달라진 셈이다.
장승일 실장 바로 옆에 침투했으니 말이다.
최민혁 실장은 원래 장승일 실장이 하려던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할 수가 없었다. LC 전자를 협박해서 이권을 뜯어내는 일 말이다. 이 정보가 LC 전자에 넘어가서 좋을 것이 없었다.
‘LC 전자 역시 바보가 아니니, 사전 정보를 안다면 또 수작을 부리겠지.’
그는 김연석 팀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아, 장 실장님, 우리 둘만 좀 이야기합시다.”
“네?”
최민혁 실장은 뻔뻔한 얼굴을 한 채 실무진을 아예 무시했다.
“다른 분은 산책 좀 갔다 오세요. 여기 선릉 공원을 둘러보면 될 겁니다.”
“네?”
김연석 팀장을 동행한 이들은 크게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성돈 팀장 역시 비슷했다. 그도 과거였다면 기분이 나빴을 테지만 최민혁 실장에게 많이 당해본 터라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성격을 잘 아는 터라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에게 눈총도 줬고 말이다.
“…….”
장승일 실장은 영문을 몰라서 멍하니 그들 뒷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최민혁 실장은 휘파람까지 불면서 장승일 실장과 같이 선릉 공원 밖으로 나갔다.
* * *
“우리 부회장님이 집요한 것은 아시죠?”
“아? 네, 넵.”
장승일 실장은 갑작스러운 최민혁 실장의 행동에 크게 당황했다.
최민혁 실장은 물론 이를 장승일 실장에게까지는 숨기지 않았다.
“LC 전자와 HY 전자의 행보 때문에 문의하러 절 찾은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우리 부회장님이 참 집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곤란합니다.”
“네?”
최민혁 실장은 선릉 옆 입구에 있는 벤치에서 일어나서 오히려 선릉 공원 밖으로 나섰다.
장승일 실장은 화급히 최민혁 실장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해보세요. 경력 사원으로 들어온 것은 좋은데, 시기가 너무 묘하잖아요.”
“하, 하지만 이번 경력 사원 채용은 인사 팀에서 특별히…….”
“그 인사 팀 말인데요. 과연 최문경 부회장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물론 인사 팀도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를 보기는 합니다. 하지만 과거와는 많이 다릅니다. 최 실장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민혁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선릉 역에 근처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생수를 꺼내서 꿀꺽 마신 후에 입을 열었다.
“일반 평직원이라면 그렇죠. 하지만 외가 쪽은 좀 다를 겁니다. 그쪽은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이 신이나 마찬가지죠.”
“…저, 정말입니까?”
“왜, 성이 ‘김’ 씨라서 그런가요? 외가 쪽이면 ‘김’ 씨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으음.”
장승일 실장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바로 전략기획실에 전화를 걸어서 ‘김연석 팀장’의 프로필을 다시 확인해 봤다.
이번에는 좀 더 면밀한 조사를 한 덕분에 금방 진실을 찾아냈다.
“하.”
장승일 실장도 이번만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바보가 아닌 터라 최근 KM 그룹의 입사에 일일이 다 개입해서 확인했다.
그는 혹시라도 문제가 될 만한 이가 보이면, 최용욱 회장에게 직보해서 깔끔하게 정리해 버렸다.
설마 요즘처럼 신규 입사가 뜸한 시점에 김연석 팀장 같은 인물을 전략 기획실에 들여보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최민혁 실장은 이번에는 굳은 얼굴을 한 채 경고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