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931화 (93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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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건…….”

“과거 전례로 보면 오성 전자를 더 믿을 수가 없어. 그들 역시 내부적으로 애니 솔루션을 연구하는 중일 거야.”

구길모 차장은 순순히 수긍했다. 오성 전자가 최민혁 실장을 벤치마킹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다만 최민혁 실장이 이런 사실을 모를까 하는 점이다.

“하긴 그렇게 보면 최민혁 실장님의 행보가 오히려 현명한 것 같습니다. 늘 보면, 보험 성격으로 대타를 준비하니까요.”

“그렇지. 요는 대응 방안이니까.”

그도 최민혁 실장 동선을 살피면서 그저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조금 전부터 회의실 안으로 들어와 있는 두 사람을 살폈다.

이미 사직한 임권수 팀장을 대리해서 입사한 김연석 팀장이나 손명수 차장 대신에 경력으로 입사한 조민호 차장은 두 사람의 대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지만 조민호 차장은 침묵한 김연석 팀장과는 달리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언급했다.

“지금 우리 KM 그룹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굳이 LC 전자나 HY 전자에 소극적인 필요가 있습니까?”

장승일 실장이 구길모 차장에게 눈총을 줬다. 구길모 차장은 그제야 피곤한 얼굴을 했다. 다만 그는 들고 있던 보고 문건 중에 몇 가지를 조민호 차장에게 내밀었다.

“이걸 한번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이게…….”

“제가 바로 자료를 드려야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깜빡했습니다.”

“…….”

조민호 차장은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가 받은 문건은 KM 산업과 대기업 계열사 중에 전자 회사와의 거래 내용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항목이 있다. 패키징 자체가 후공정 처리라서 LC 전자 쪽도 엮여 있는 쪽이 있었고, HY 전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정말 중요한 핵심 안건은 SBGA였다. 이는 플라스틱 형태로 열을 효과적으로 방출할 수 있는 신기술이다.

그런데 이 SBGA 개발과 관련해서 자금을 댄 업체가 있었다.

오성 전자, HY 전자, 그리고 LC 전자였다.

당연히 투자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계열사 제품 중에 당장 급하지 않은 아이템 자료를 넘겨 공동 연구 한 것이었다.

이는 반도체 패키징의 어려움 중의 하나인 입출력 신호를 고속으로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다.

이와 관련한 BGA 기술은 이미 다른 글로벌 반도체 회사에서 특허를 내놓았다.

그러므로 높은 특허료를 따로 지급하는 것이 원래 인지상정이었다.

과거였다면 기술 자립 목적으로 개발을 진행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한국 대기업과 손을 잡고 여러 가지 도움을 얻은 것이었다.

물론 주도권을 쥔 곳은 역시 KM 산업이다. 이 회사는 30년에 가까운 노하우를 집약해서 이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냈으니까.

조민호 차장도 보고서를 읽으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설마 세라믹 패키지와 전기 특성이 비슷하면서 오히려 가격은 10%에 불과한 이 기술이 다른 대기업과의 협력 결과 때문이란 말입니까?”

장승일 실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작년 말부터, 올 연초에 공동 협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건 놀랍군요.”

LC 전자에서 KM 산업으로 자리를 옮긴 조민호 차장은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원래는 KM 전자로 이직하고 싶었는데, 자리가 없었다.

결국 차선으로 선택한 곳이 다름 아닌 KM 산업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 같았다.

그는 김연석 팀장에게도 보고서를 넘겼다.

두 사람은 서로 보고서를 돌려 보면서 침묵했다.

구길모 차장은 굴러온 돌에 뒤통수 맞을 것을 염려해서 조심했다. 하지만 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자부심 때문이다.

KM 전자는 말할 것이 없지만, KM 산업의 입지 역시 무시하기 어려웠다.

다만 여전히 아쉬웠다.

김연석 팀장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부장으로 진급했을 테니 말이다.

장승일 실장은 최근 입사한 두 사람과 대립하는 구길모 차장을 모른 척했다.

그는 이보다 이번 일에 더 집중하기로 했다.

“최 회장님이 걱정하는 것은 우리 KM 산업이 지금까지 LC 전자와 HY 전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겁니다. 그 덕분에 KM 산업 주가는 더 뛰어올랐습니다.”

KM 산업 주가는 KM 전자 때문에 오르기는 했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대기업과의 거래가 늘어나면서 매출의 질 자체가 변했다.

꼭 어디 한 업체만을 상대한 것이 아니었다.

장승일 실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동기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한국 대기업 매출을 더 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일이 단순히 KM 산업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 역시 무시하기 어려웠다.

KM 그룹과 거래를 자주 할수록 최민혁 실장과도 거래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방식을 처음으로 쓴 기업이 오성 전자였다.

HY 전자와 LC 전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들 역시 오성 전자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 LC 전자의 한병수 실장이 무리수를 둘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도 KM 산업, 아니, KM 그룹이 인질이 되기 때문이다.

장승일 실장도 왜 굳이 LC 전자가 복잡한 방법을 일을 벌이는지 당시에 몰랐다.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안 것이다. 그는 설마 하면서도 이런 일이 생길지는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님에게 연락해서 당장 약속을 잡게.”

“…알겠습니다.”

구길모 차장 역시 내심 이 분위기를 파악하자 혀를 내둘렀다. LC 전자나 HY 전자가 굳이 KM 산업, 아니, KM 그룹에 저자세인 이유가 있었던 셈이니까.

‘설마 이런 일까지 예상한 것일까?’

* * *

KM 산업 역시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은 이 교훈을 SBGA 패키지 관련 기술에 적용했다.

이들은 필요하다면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오성 전자, LC 전자, HY 전자 쪽에도 업무 협조를 일일이 다 받았다.

사실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이 아니었다면 말도 안 되는 협상이었다.

오성 전자가 뭐가 아쉬워서 KM 산업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LC 전자 역시 굳이 손해를 봐가면서까지 KM 산업을 고려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HY 전자는 KM 산업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의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은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최소한 한 번 고민이라도 해보니까.

다만 KM 산업 역시 제자리에 안주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전기적인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이들 대기업의 도움을 얻었다.

기준이 되는 파워 3W, 1GHz 주파수 대역을 극복한 것이 그 결과였다.

최민혁 실장은 물론 이런 SBGA 기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다만 그는 장승일 실장이 갑자기 찾아오겠다는 연락을 받자 그 내막을 듣고 나서는 뒤늦게 이 기술을 살펴보았다.

‘…이것 역시 전생과는 다르구나.’

원래는 KM 산업이 독자적으로 진행하는 일이었다.

다른 대기업과 협력으로 진행하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투자를 받아서 같이 진행하면 이미 영업을 사전에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KM 산업 입장에서는 무조건 이익일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은 지금 일어난 일이 시기적으로 비슷할지 몰라도 기술 기준 자체는 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심 감탄했다. 자신이 뿌린 나비 효과의 여파가 이런 SBGA 기술에도 적용될 줄은 몰랐다.

‘한편으로 참 대단해. 내가 아니라 KM 산업에 손을 대다니.’

거기에 최문경 부회장의 수작 역시 빠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당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를 이용한다라…….’

역시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때문에 장승일 실장이 찾아올 때까지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조성돈 팀장은 이미 장승일 실장과 연락해서 방문 사유를 파악했고, 추가 조사를 진행했다.

“이 문제는 단순하게 일어난 현상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지난 한국 경제의 30년 양적 팽창에 이은 고도 기술에 관한 연구 때문입니다.”

최민혁 실장은 늘 진지한 조성돈 팀장 말에 피식 웃었다.

“고부가가치 기술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과거와는 달리 지금 우리 한국 경제 상황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국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보호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KM 전자 기획실에서 정리한 보고서 내용은 꽤 흥미로운 것이었다.

물론 그 동기 태반은 최민혁 실장이 자신이 만든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흐름 자체는 전혀 근거 없이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다.

LC 전자나 HY 전자의 무리한 행보 역시 이 흐름을 따랐다.

그렇다면 무조건 상대방을 비난만 할 일은 아니었다.

아, 물론 그냥 넘어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행동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니까.

‘안 그래도 LC 전자에게 뜯어먹을 것이 좀 있지. 이걸 이용한다면, 재미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특히 시기적으로 볼 때 지금이 아니면 얻기 힘든 게 있었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이 마치 어둠 속의 히든 보스 같은 표정을 짓자 탄식하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뭔가 또 거대한 음모를 꾸민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는 굳이 자신이 지적하지도 않아도 이렇게 나온 훌륭한 보고서에 만족했다.

“우리 기획 팀도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것 같네요.”

조성돈 팀장은 고개를 숙였다.

“최 실장님이 미국 재무부에 압박을 받은 것도 어떻게 보면 신보호주의에 따른 극단적인 결과로 봐야 합니다. 이는 기획 팀에서 사전에 대비하지 않은 책임이 큽니다.”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사전에 알았다면 리스크를 대비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대응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성돈 팀장은 여전히 원칙만 고수했다.

“이제 한국은 멀지 않은 시기에 쌀, 자동차, 가전제품을 모두 개방해야 합니다. 이런 시기를 사전에 대비해서 계획을 세워야 했습니다.”

최민혁은 오늘따라 감성이 풍부해진 조성돈 팀장을 째려봤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잘 보면, 다 개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현실에서 적용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었다.

“괜한 일에 정력 소모 말고, 장승일 실장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이나 해보세요. 이왕이면 기획 팀이 모여서 다시 이야기해도 좋고요.”

“…일겠습니다.”

최민혁은 씩 웃었다.

“물론 데니스 샐로먼이 배후라는 것이 중요하기는 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 대기업의 압력은 반드시 생길 일이었어요. 오성이나 LC 전자와는 달리 다른 대기업은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 * *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LC 전자, HY 전자를 자극하는 방법을 쓴 이후에 최문경 부회장에게서 연락을 기다렸다.

아니, 그도 초조해서 최문경 부회장에게 먼저 연락해서 만났다.

최문경 부회장은 역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일단 원한 대로 일이 풀리기는 했는데, 상황이 좀 다릅니다.”

“정확히 어떤 면에서요?”

“LC 전자 쪽에서는 이미 KM 전자 기술을 따로 벤치마킹한 것 같습니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을 분해해서 따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도 깜짝 놀랐다.

“LC 전자가 말입니까?”

최문경 부회장 역시 상황을 파악한 후에 꽤 놀란 얼굴이었다.

“저도 좀 놀랐습니다. 다만 성과가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인공지능을 베낀 것은 좋았는데, 성능이 제대로 안 나왔습니다.”

“그럴 겁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알아봤는데, 연구용으로는 만들 수 있어요. 하지만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것은 좀 다르다고 합니다.”

최문경 부회장 역시 알고 싶은 내용이었다.

“혹시 그 대안이 뭔지 알 수 없습니까?”

“모릅니다.”

“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굳이 최문경 부회장에게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기술로는 무리수가 많이 따른다고 합니다. 설사 지능이 높은 인공지능이 나온다고 해도 현실에서 적용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아니, 그러면 애니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조언해 준 이의 의견을 받아들이면, 시스템적으로 뭔가 손을 봤을 거라고 합니다. 그게 뭔지는 그들도 모릅니다.”

“하.”

최문경 부회장은 예상 밖의 전개에 크게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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