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0.
"네, 최문경 부회장은 이런 일에는 정말 철저한 사람입니다. 제가 최문경부회장의 과거 이력을 조사해 봐서 압니다."
실제로 최민혁 실장이 이 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가 고작 이런 일로 최문경 부회장을 끌어내릴 수 있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일을 복잡하게 꾸미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는 케이블 TV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그 틈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장승일 실장은 한 가지를 더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회장님도 이 일이 공론화되기를 원치 않을 겁니다."
"…이대로 서광수 과장 일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대안이 어떨까요? 어차피 경영권 승계 문제가 본질이지 않습니까? 최문경 부회장을 언론을 이용해서 때리는 것보다는 최용욱 회장님에게 보고하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일 겁니다."
"그건……."
장승일 실장은 탄식했다.
"솔직히 제삼자인 저도 최문경 부회장이 한 짓에 대해서는 화가 납니다. 제가 이 정도니 최 실장님의 분노는 엄청날 겁니다. 하지만 이 일의 본질은 결국 경영권 승계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내부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잘 생각하셔야 할 점은 이번에 최문경 부회장이 최용욱 회장님이 잔정이 많은 점을 노렸다는 겁니다. 이번 서광수 과장 일은 아마 최용욱 회장님에게 큰 혼란을 줄 겁니다."
"그건……."
"네. 다만 이 서광수 과장 일을 이번 케이블 TV 사업에도 같이 엮을 수 있습니다. 일단 최문경 부회장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으니까요."
조성돈 팀장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시일을 다투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해 보았다.
최민혁 실장의 대답은 당연히 오케이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다만 일을 어설프게 처리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네."
장승일 실장은 이마를 잡았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벌인 일에 내심 황당하기만 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수가 없었다.
***
"……."
최용욱 회장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장승일 실장이 한 보고 내용을 살피면서 참담하기까지 했다.
위장 자살 쇼라니.
그리고 그 일을 최민혁 실장에게 누명으로 뒤집어씌울 계획까지 꾸렸다니.
녹취록을 비롯한 다양한 증거가 없었다면 도저히 믿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그도 이성을 차리자 한 가지 일 때문에 정신이 번쩍했다.
"자, 잠깐, 이거 검찰에 고소했어?!!"
장승일 실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은 것으로 압니다. 서광수 과장은 따로 안가에 있습니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이 서광수 과장을 쫓는 것 같습니다."
"끙."
"당분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서광수 과장에 대한 부분은 최민혁 실장님이 어느 정도 정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한숨을 일단 돌렸다. 하지만 그는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최문경 부회장에 대한 악명을 간간이 듣기는 했다. 다만 그 증거까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실상 그 자신이 확인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서광수 과장 일은 좀 달랐다.
지금 자신이 증거까지 확인한 사안이었다.
"…그놈이 직접 관련된 증거는 있어?"
"그건 없는 것 같습니다. 밑에서 주도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나옵니다. 아마 문제가 된다면 바로 꼬리 자르기에 들어갈 겁니다."
"밖으로 새어 나가면 회사 이미지 타격이 엄청나겠어."
"…네."
장승일 실장은 차마 '불매 운동'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특히 KM 그룹은 요즘 매출 증가와 더불어서 제2의 전성기를 기록하기는 했다.
다만 KM 그룹 사정이 꼭 좋은 것은 아니었다.
회사 매출이 비약적으로 늘면서 재계 순위도 한 걸음씩 올라갔다.
그런 모습을 다들 마냥 좋아하지는 않았다. 최민혁 실장과 직접적인 소통을 많이 하는 오성 그룹을 제외하고는 다들 KM 그룹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KM 그룹 매출이 늘기는 했지만 기존 거래 업체 매출이 줄어드는 곳도 있었다.
"최민혁 실장님 덕분에 KM 전자 매출을 제외하고도 회사 매출이 크게 늘었습니다. KM 산업의 매출 신장세는 눈부시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KM 산업의 매출도 매출이지만 최민혁 실장 계열사 쪽의 오더가 급증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더욱이 KM 센서는 KM 산업 쪽에 주문을 대폭 늘렸고 말이다.
"…이번 일이 그룹 매출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확실합니다. 매출 신장세가 너무 가파른 상황에서 일이 터진다면, 다른 대기업이 언론사를 최대한 동원해서 우리를 압박할 겁니다. 해외 매출은 몰라도 국내 매출 자체가 쪼그라들 겁니다."
"허, 이것 참."
최용욱 회장은 탄식하고 말았다. 그는 수십 년을 경영한 경영자답게 일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편으로 혀를 찼다.
"민혁이 그놈이 신중하게 이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면, 아찔하구나."
"네."
"……."
최용욱 회장은 다시 한동안 침묵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에 대한 동정심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남이 아닌가.
그 문제가 계속 그의 마음에 걸렸다.
그는 뒤늦게야 스스로 자책했다.
최훈열 전무 일만 해도 그랬다.
그 역시 어느 정도는 최훈열 전무의 불법 행위를 알았다.
다만 모른 척했을 뿐이다.
자신이 과거 그런 최훈열 전무에게 손자 최민혁 실장을 보낸 이유는 뭘까.
설마 최훈열 전무가 최민혁을 잘 돌봐줄 것으로 생각한 건가?
그는 고뇌에 가득한 표정을 일단 털어버렸다.
"그래서 민혁이 그 녀석이 원하는 것이 뭐라고 해?"
"이번 주말에 블룸버그 서울 지국이 개소됩니다. 그 행사에 줄을 좀 놔달라고 합니다. 필요하다면 재정경제원쪽 인사도 초청하고 말입니다."
"…응? 그게 가능해? 아, 설마 KM 블룸버그 설립을 도와달라는 이야기야?"
"네. 최 실장님이 국내 인맥은 좀 약하지 않습니까."
사실 최민혁 실장은 너무 유니크해서 국내 재벌이나 정치 쪽과는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장승일 실장은 그런 점을 떠올리면서 다시 말을 계속했다.
"…우리 쪽의 도움을 얻어 가능한 한 빨리 진행했으면 한다고 합니다."
"대신에 문경이 그놈을 절대로 이 일에 끼게 하지 말고?"
"네, 당분간 진행하는 KM 전자 비즈니스에 최문경 부회장은 물러나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이번 일이 일방적으로 자신이 도와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경영권 승계 구도에 직접 끼어드는 일이었다.
보통 때라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 그리고 문경이 그놈 쪽에도 알려."
"……알겠습니다."
***
최문경 부회장은 당연히 KM 블룸버그 법인 설립 소식을 들었다. 더욱이 이 회사에 대한 자신의 참여 지분 자체가 없었다.
지분 태반은 벨린 투자와 블룸버그측이 가지는 것으로 결론을 내버렸다.
"아버지!!!"
당연히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말없이 서광수과장 관련 보고서를 내밀었다.
"……!!"
최용욱 회장은 서광수 과장 관련된 자료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최용욱 회장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거실 창을 통해서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그만큼 고뇌가 심했다는 뜻이다.
위장 자살은 실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민혁이 녀석이 이번 일을 덮는 조건으로 블룸버그 TV에는 끼지 말라고 했다. 지분은 벨린 투자와 블룸버그측에서 가질 거다."
"그건……."
"나도 알아봤다. 블룸버그는 한국 지국을 이용해서 인터넷 방송까지 시도 할 거다. 허가와 관련된 일은 내가 도와주기로 했다."
"아버지!"
"닥쳐!!"
"네가 정말 사람이냐? 어떻게 위장자살 쇼를 벌여서 그걸로 조카 뒤통수를 치려고 해? 그게 네가 말하는 경영이냐?!"
"……."
격분한 최용욱 회장의 목소리는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거실을 나간지 오래였다. 그는 눈치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한 것이었다.
"그래도 서광수 가족은 건드리지 않았더구나. 짐승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 일은 확인해 봐야 하지만 저는 모르는 일입……."
최용욱 회장은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를 던졌다.
빠르게 허공을 날아간 재떨이는 최문경 부회장 이마를 정확하게 맞혔다.
빡 소리가 나면서 최문경 부회장은 뒤로 벌렁 나뒹굴고 말았다.
사용인이 경악해서 부랴부랴 최문경 부회장에게 달려들었다.
충격에 반쯤 넋이 나간 최문경 부회장은 고통 때문에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그제야 거실로 들어왔다가 이 광경을 봤다.
경호원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은 최용욱 회장 눈치를 보느라 선뜻 나서지 못했다.
최용욱 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 부축에 가까스로 일어난 최문경 부회장을 보고 소리 질렀다.
"서광수 과장 일에 손을 떼, 만약 서광수 과장 가족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너에게는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거다!!"
최문경 부회장은 시퍼렇게 날이 선 최용욱 회장을 보자 결국 거실을 나서고 말았다.
최용욱 회장은 소파에 풀썩 앉고 말았다. 그는 도저히 이 상황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최민혁 그녀석이 일을 이렇게 만들었나 의심도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 자신이 가진 가족애.
그런 모습은 자신의 가족 사이에서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가…….'
마음 고통은 심했지만, 다행히 오래 가지는 않았다.
적어도 KM 그룹이 잘나간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의 염원인 반도체 사업에도 손을 댈 수 있게 됐다.
최용욱 회장은 골치 아픈 가족 문제를 마음 한구석에 집어넣어 버렸다.
'일단 민혁이 그 녀석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밖에 없겠어.'
***
이환채 재정경제원 차관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갑자기 외환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환율이 폭락과 폭등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일은 꽤 이례적이었다.
한국 내에서 달러가 들어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달러가 한 번에 들어왔다고 해서 환율이 요동치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그도 부랴부랴 조사한 끝에야 환율흐름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받았다.
보고대로라면 일시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과연 이 일이 우연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KD 통신 지분 매각과 관련해서 들어온 달러였기 때문이다.
'설마 최민혁 실장이 보복 차원에서 이 일을 진행한 걸까?'
그는 고개를 내젓고 말이다. 아무리 최민혁 실장이라도 아직 KM 그룹 주인은 아니었다. 더욱이 최용욱 회장이 멋대로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다행이라면 재정경제원 내에서는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이환채 차관은 정신을 차리자 다시 최민혁 실장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초대장이 날아온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KM 그룹 기획 조정실이었다.
'이제 정신을 좀 차렸나?'
이환채 차관은 초청장을 보낸 주인이 최민혁 실장이거나 아니면 최민혁 실장의 요청을 받은 최용욱 회장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쪽에서 먼저 고개를 숙인다면 굳이 최민혁 실장을 압박할 생각이 없었다.
'얼마 정도면 좋을까?'
이환채 차관은 히죽 웃었다. 그가 당장 떠올린 자금은 2조 6천억에 해당하는 자금과 15억 달러에 해당하는 AR N 지분이었다. 둘이 합쳐서 대략 4조가 넘는 천문학적인 자금이다. 그것도 주식이 아니라 현금 뭉치로 말이다.
'0.1%만 챙겨도…….'
물론 혼자 다 먹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배후가 된 이들에게도 나눠줘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환채 차관은 곧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KM 그룹을 조사한 결과 그들이 새로운 합작 회사를 설립할 예정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