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9.
이런 상황에서 AC9701은 전혀 예상치 못한 아이템이었다.
'잘나가도 문제가 되는구나.'
그는 새삼 KM 전자 일을 너무 소홀히 했다고 생각했다.
"조 팀장님, 하면 지금 사내 분위기가 좋지는 않겠군요."
조성돈 팀장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우리 KM 전자 때문만이 아닙니다. 요즘 지역 경제 전체가 심상치 않습니다."
"주가는 그래도 좋지 않아요? 미국증시 덕분에 한국 증시도 나쁘지 않잖아요."
"언론도 사실 그렇게 몰아갑니다. 오히려 그래서 숨겨진 부실을 덮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보는 아닙니다. 특히 건설 경기가 문제입니다. 미분양이 지방을 중심으로 급격히 늘어나는 중입니다."
최민혁도 아차 싶었다.
"설마 우리 KM 건설도 영향을 받은 겁니까?"
"다행히 구조조정을 진행한 덕분에 건설 경기 불황에서 벗어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은 분위기는 아닙니다. 그 여파가 우리와 같은 중 견 기업에 악영향을 미치는 중입니다. 우리 역시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른 그룹에 비해서는 그렇게 큰 이슈가 아닙니다."
"……."
최민혁은 혀를 차고 말았다. 겉으로 보이는 경제 현실은 실제와는 차이가 있었다. 언론사가 무리수를 둬서 그게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렇다면 AC9701 사업도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이 사업에 대해 오해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가만, 기획 팀에서는 이와 관련해서 별다른 보고가 없었잖아?'
"기획 팀을 한번 보고 싶네요."
"…알겠습니다."
***
KM 전자 기획 팀의 분위기는 회사 전체 분위기와는 좀 달랐다.
소위 말하면 잔치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병연 소장이 AC9701 칩을 검토하면서 도움을 청한 곳이 기획 팀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기획 팀을 방문해서 본 건 그들이 AC9701 덕분에 환호성을 내지르는 광경이었다.
바로 배종대 과장이 그 주인공이었다.
"씨발, 인센티브가 도대체 얼마야?!"
정확한 액수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돈에 크게 관심이 없는 정성근 대리마저 환호했다.
임웅 대리 역시 통장에 찍힌 인센티브를 보면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박광민 사원은 새로 입사한 신입 네 명이 50%의 인센티브만 받은 것에 대해 격려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 이제 막 회사에 입사했는데, 인센티브를 다 받으려고 하는 것이 욕심이야!"
다만 이런 이들도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기획실에 나타나자 부동자세를 취했다.
최민혁은 마치 사단장을 대하는 듯한 기획 팀의 태도에 혀를 찼다.
최민혁은 군기가 꽉 잡힌 기획실 직원들의 모습에 혀를 차고 말았다.
"다들 편하게 있어요."
"아, 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심지어 정성근 대리 역시 이전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과 거리를 뒀다.
최민혁 실장은 이런 분위기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내에 사기가 생겨서 나쁘지는 않다고 해도 말이다.
그는 새삼 자신이 최용욱 회장의 핏줄이라는 것을 느꼈다.
"AC9701 칩 프로젝트 아이디어를낸 사람이 정성근 대리입니까?"
정성근 대리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박상기 차장 눈치를 봤다.
"그, 그게, 티, 팀이 다 힘을 합쳐서 한 일입니다."
"내가 들은 이야기는 좀 달라요. 최병연 소장이 직접 기획 팀을 찾아와서 도움을 청한 것으로 아니까. 특허 팀과 협업을 중간에 중재해 준 것도 정성근 대리인 것으로 아는데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AC9701 프로젝트는 최병연 소장이 최민혁 실장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해서 독단적으로 한 일은 아니었다.
그가 이 일을 주도했지만, 시작은 정성근 대리에서부터였다.
정성근 대리 역시 KM 전자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때문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이었다.
'하, 이게 이렇게 흘러갔구나.'
최민혁 실장은 굳이 자세한 내막을 듣지 않아도 정성근 대리의 얼굴을 보자 대충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는 정성근 대리를 힐끗 쳐다본 후 기획 팀까지 한 번 쭉 둘러보았다.
"혹시 이번 일에 대해서 실망한 분있습니까?"
"네?"
다들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 제 말은 KM 그룹 쪽에 AC9701생산을 넘긴 일을 말하는 겁니다. AC9701 파생 상품도 결국 KM 그룹 쪽에서 진행할 겁니다."
"아."
그들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모두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확실히 초기에 아이디어를 냈을 때는 다들 좀 걱정하기는 했다.
KM 전자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외주를 줄까 말이다.
하지만 박상기 차장이 슬쩍 나섰다.
"어차피 최민혁 실장님이 이제까지하는 사업 방식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단순한 설계, 생산은 외주를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핵심만 우리가 알아서 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보다는 특허료에 더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KM 그룹도 예외가 아니다?"
"네. 비록 5% 남짓 되는 수익이어서 규모 자체는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꾸준하게 들어오는 수익입니다. 거기에 관련 제품은 모두 특허료를 내야 합니다. 시장 규모가 커지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기획 팀의 반응이었다. 그들 역시 박상기 차장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AC9701로 얻는 이익을 이미 계산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으로서는 딱 자신이 원한 결과였다.
"정말 괜찮아요? AC9701 사업부를 만들어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뇨. 저희 생각은 다릅니다. 콜린스사업부 매각도 그런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 최고입니다."
박상기 차장도 그렇지만 기획 팀의 분위기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다들 돈, 돈, 돈 하는 것이 보기 좋지는 않지만 말이다.
"…좋네요."
최민혁은 내심 안도했다. 기획 팀 내부에서 불화가 있었다면 그건 좀 곤란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획 팀원 중에 그런 내색을 한 이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이 안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이제는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빠르게 진행을 해야 할까. 타이밍이 아슬아슬하구나. 케이블 TV 쪽을 서둘러 정리해야겠어.'
***
최민혁은 일단 KM 전자의 내부 사정을 살피면서 한 편으로 걱정하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긍하고 말았다.
사내에 군기가 들어서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지시에 따라서 KM 전자가 한 몸이 되어서 움직이니 말이다.
사내 분위기를 완화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문형섭 부사장이 승진하고 나면, 그 일을 잘 처리할 것이라 봤다.
그는 안도한 후에 이전에 계획한 블룸버그 TV를 서둘러서 살폈다.
'아마 재정경제원 문제도 있어서 국내 방송은 쉽지 않을 거야.'
재정경제원 전체가 최민혁 자신을 견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환채 차관이 하는 행동을 봐서는 윗선도 자신에게 부정적이었다.
외환 문제 때문에 잠깐 자신을 모른 척하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지금 방송국에 투자할 여건은 되지 않았다.
아니, 투자는 할 수 있어도 관리는 좀 달랐다.
자신이 굳이 나설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KM 그룹 계열사 내에 남아 있는 케이블 TV사업부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 일이 결코 CES 전시회와 무관하지는 않았다.
물론 미국 판매 예상 실적을 감안하면, 국내 수요는 그렇게 크지 않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자신의 영향력 확대.
최용욱 회장이 그 모습을 본다면, 최문경 부회장이나 최민수에게 가진 인간적인 감정을 떨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일을 풀어가기가 쉬워.'
다행히 마이클 블룸버그 측에서 긍정적인 의사를 보내왔다.
조성돈 팀장은 꽤 안도했다.
기획 팀 박상기 차장의 태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한 가지 점을 우려했다. 최근 재정경제원의 행동이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재정경제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최근 환율 급등락 때문에 저희 쪽에 대한 압력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조성돈 팀장도 굳은 얼굴이었다.
"…윗선의 지시가 있었습니까?"
박상기 차장은 계속 기획 팀을 컨트롤하면서 국내 사정을 살폈다. 그는 때문에 조성돈 팀장보다 내막을 더 잘 알았다.
"미국 재무부 일이 동기가 되었지만, 우리 회사에 대해서는 계속 부정적인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국세청 일이 가장 큽니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어서 덮어두기는 했지만, 그때 앙금은 여전히 남았습니다."
특히 국세청 이동빈 조사국장을 승차시킨 일은 여전히 말이 많았다.
국세청장이 내색하지 않았을 뿐, 이동빈 조사국장을 배척하는 행태였다.
당시에는 여론 때문에 쉬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조용해지자 재정경제원 이환채 차관이 이 틈을 노린 것이었다.
물론 이환채 차관이 정치 욕망이 크기는 했지만, 굳이 총대를 멘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다.
최민혁은 혀를 찼다. 그는 결코 한국정치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도울 생각도 없었다. IMF 역시 일어나야 할 사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재정경제원의 이환채 차관의 역량을 봐서는 IMF가 정해진 운명 같아.'
그런데 재정경제원 압박이 줄어든 것은 한국 외환 시장이 그만큼 불안정해서 생긴 일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KD 통신의 최용욱 회장 지분을 매각하도록 종용한 덕분에 일어난 일이었다.
즉 재정경제원이 바빠지면, 최민혁실장을 건드리지 못한다.
거기에 상황을 확인해야 하는 일도 있고 말이다.
설마 최민혁 실장이 외환 시장을 흔들어서 자신들을 공격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재정경제원이 최악의 상황으로 걱정하는 일이 이것이었다.
그들이 최민혁 실장에게 유독 신중한 이유였다.
'다르게 보면,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날 압박할 생각이겠지.'
그는 고민했다. 문득 블룸버그의 능력을 떠올렸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무시할 수 없는 회사였다.
'차라리 데릭 모건 이사에게 고마워 해야 하나.'
"이렇게 하죠. 블룸버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그 점을 이용하죠. 블룸버그 측에 연락해서 지국 설립을 좀 더 크게 하라고 하세요. 돈이 부족한 회사는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우리 쪽에서 자금을 지원한다고 하세요. 그리고 이왕이면 그 지국 설립과 관련해서 행사도 요청하고요. 명단은 제가 만들어 드리죠. 장승일 실장에게 연락해서 케이블 TV 관련한 조직을 따로 만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아,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장 실장에게도 자세하게 설명을 하세요. 우리가 뭘 하는지 말입니다. 알아서 잘 처신할 겁니다."
"…네."
박상기 차장은 최민혁 실장이 국내 인맥을 늘리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힘이면 정부를 압박할 수도 있었다.
그는 힐끗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꽤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문제는 직접 챙기지 않았는데…….'
***
장승일 실장은 조성돈 팀장이 와서 한 이야기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 중에는 서광수 과장 일도 있었는데,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 역시 구조조정 후에 안 좋은 결말을 맞은 몇몇 이들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가 그들의 삶까지 챙겨 줄수는 없어서 무시했을 뿐이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이 이 일을 이용해서 수작을 꾸민 것에는 혀를 내둘렀다.
"…서광수 과장 건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건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다. 원칙적으로 검찰에 고소해야 할 일입니다."
그는 잠깐 고민했다. 최민혁 실장이 이렇게 사람을 보낸 적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푸념이 통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이 일을 덮어두라는 말씀입니까?"
장승일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최문경 부회장 쪽이 시끄럽다고 느꼈는데, 이 일 때문이었나 보군요. 하지만 이 일을 설사 밖으로 드러낸다고 해도 최문경 부회장에게는 별 영향을 안 줄 겁니다."
"꼬리 자르기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