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5.
KM 센서 측 연구소 직원들도 놀랐지만, 그보다 더 충격을 받은 것은 ARN 엔지니어들이었다. 그들을 늘 괴롭혀 왔던 성능 문제가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기존에 ARN 발목을 잡고 있던 문제 역시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마, 맙소사!”
사실 ARN이 상업적으로 부진했던 근본적이 이유가 성능 제약 때문이었다.
ARN 엔지니어들은 모두 모여서 그 답을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런데 결국에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 해답이 바로 지금 나온 것이었다.
최민혁은 경악한 김희수 연구소장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충분한 성능이죠?”
“아, 네? 네!”
그는 힐끗 이기수 부장과 최태훈 차장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최태훈 차장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일이 확인을 해봤다.
확실히 성능 레벨 자체가 달랐다.
“…이게 진짜 문제였군요.”
사실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는 성능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했다.
이것만으로 윗선에 보고할 수는 없었다.
검증이 필요했는데, 이걸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최태훈 차장을 비롯한 엔지니어들은 다들 최민혁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들은 뒤늦게야 이 문제를 내버려 뒀다가는 프로젝트가 완전히 산으로 갔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존 KM DVR 자체를 끝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실상 되지도 않을 일을 무식하게 밀어붙이려 한 것이었다.
[와, 이거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1년 정도는 삽질해야 했잖아!]
[1년이 뭐야? 적어도 2~3년은 족히 잡아먹었을 거야!]
겉으로 봐서는 쉽게 끝날 것 같았던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실상 알고 보니 프로젝트 결과가 실패로 끝날 확률이 아주 높았다.
엄밀히 말해서 이 기술은 ARN이라는 회사의 도약과 관련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기술이었다.
그러니 KM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ARN 엔지니어들 역시 최민혁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들은 뒤늦게야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안 것이었다.
최민혁은 씩 웃었다.
“그러면 제가 해줘야 할 일은 다 한 것 같습니다.”
“아, 저, 저기, 최 실장님…….”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는 KM 센서 측에서 하셔야 합니다. 제가 설마 여러분 입에 밥을 떠먹여줘야 합니까?”
“아, 아닙니다.”
그는 그들과 악수를 하고는 휑하니 작별을 고했다.
‘이제 남은 일은 우선 모건 스탠리 측과의 일을 정리하는 걸까? 고민스럽네.’
문제는 모건 스탠리의 태도 변화다.
이들은 에플 주가 흐름을 파악하자 슬쩍 리스크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획한 대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모건 스탠리 역시 끝까지 밀어붙여서 큰 손실을 보기를 원했는데,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으니. 다른 대안을 찾아야겠어.’
* * *
최민혁 실장은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난 후 모건 스탠리와 재무부 미팅 문제로 고민하다가 우선 조시 로버트 국무부 아태 부차관보 측에 연락했다.
그러면서 넌지시 미국 정부가 원하는 방향 쪽으로 손을 들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재무부 쪽에 적당히 제 입장을 말 좀 해주십시오.]
[당연히 도와드리겠습니다.]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는 재무부의 스티븐 키렌 차관보와 만나서 최민혁 실장의 제안에 대해서 넌지시 말해주었다.
최민혁 실장의 이런 의사 표시는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일단 미국 재무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이니까.
스티븐 키렌 차관보 역시 이를 윗선에 보고했고, 답을 들었다.
[우리는 결코 최민혁 실장님을 적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은 이미 우리 미국인인 것으로 압니다. 지금 재무부가 걱정하는 것은 미국 하원에서 이미 나온 미국 안보와 관련된 사안일 뿐입니다.]
말은 참 그럴듯한데, 결국엔 네가 가진 이권을 독점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대신에 최민혁 실장이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면 굳이 적대하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다.
두 가지를 담은 말이다.
한 가지는 최민혁 실장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다른 한 가지는 최민혁 실장을 견제하겠다는 뜻이었다.
최민혁은 내심 욕설이 절로 나왔다.
‘개새끼들.’
이제야 미국 정부의 뜻을 알았다.
아니, 정확히는 몇몇 이해 관계자들의 의도를 안 셈이다.
그런데 이들을 배척할 수만은 없었다.
만약 이런 불만이 계속 쌓여 간다면 정말 암살을 당할 수도 있었다.
최민혁은 굳이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한국 정부와 싸우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결코 자존심 문제로 밀어붙일 일은 아니었다.
최민혁 자신의 주적은 최문경 부회장과 샐로먼 브러더스였으니까.
최민혁은 결국 다시 원점에서 이 일을 검토했다. 뭐, 쉬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바로 모건 스탠리의 마이크 라이언 이사였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서 폴 고슬링을 선택했다.
최민혁은 모건 스탠리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저택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대지 면적만 무려 3,000평이 넘는 운치가 있는 저택에 폴 고슬링을 초대한 것이다.
“여기 좋지 않습니까?”
“아, 네.”
폴 고슬링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자신을 초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실상 최민혁 실장도 그를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은 경호원을 거느린 채 폴 고슬링과 산책을 나섰다.
저기 멀리 뉴욕 마천루가 훤히 보였다.
뉴욕에서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 저택 값도 상상을 초월한다.
최민혁은 그런 점이 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이 저택 가격이 무려 1억 달러가 넘습니다. 이번 에플 주가 폭등 때문에 난 이익 일부분으로 지난주에 사들인 건물입니다. 아직 소유권도 넘어오지 않았죠.”
“…그, 그렇습니까?”
폴 고슬링은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에플 주가 폭등 배후에는 다른 세력도 아닌 모건 스탠리 자신들이 있었다.
에플 대주주를 쫓아다니면서 열심히 에플 주식을 매입했다.
결과는 목표치 달성에 실패했지만 말이다.
결국 시장에서 직접 에플 주식을 사들였는데, 그게 에플 주가를 계속 끌어올렸다.
다행이라면 50달러 통과 이후에 단기 차익 매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60달러 벽을 뚫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요즘 다우지수의 폭등도 한몫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오직 ‘경제’만 우겼고, 다우지수 주가는 천장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주지 않았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니야.’
에플 공매도 사전 정지 작업으로 한 일 때문에 손실을 메꾸려고 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득을 많이 봤다.
특히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8% 지분 중에 일부를 자신들이 먹었으니까.
최민혁은 씁쓸한 표정을 한 폴 고슬링에게 넌지시 말했다.
“바트화 말입니다. 그거, 제가 포기하겠습니다.”
“…네.”
폴 고슬링은 자신에게 정신질환 병원에서 치료까지 받게 만든 바트화 문제 이야기를 듣자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그놈의 바트화. 이제는 아주 지긋지긋했다.
최민혁은 마치 자신이 양보라도 하는 것처럼 넌지시 말했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보상으로 정보 하나만 까죠. 애니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죠?”
“…자세한 것까지는 모릅니다.”
“아마 에플 투자로 손해는 보지 않을 겁니다.”
“…네.”
폴 고슬링은 겉으로는 자신이 당황한 것을 노출하려고 하지 않았다.
인공지능 애니는 꽤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최민혁이 굳이 이 애니 인공지능을 말한 이유가 있었다.
‘이 정도면 에플 주식으로 장난치지는 않겠지? 샐로먼 브러더스 측과는 어떻게 관계 설정을 할 지 모르겠지만, 굳이 그 내막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거고.’
“대신 부탁이라고 한다면 샐로먼 브러더스 측에는 정보를 흘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뭐, 제가 우리 첫째 큰아버지와 경영권 분쟁 중이고, 샐로먼 브러더스가 우리 부회장님을 밀어줘서 그렇습니다. 아, 대신이라고 해야 할지, 중공에서 진행하는 KD 통신 쪽은 미국 정부를 통해서 샐로먼 브러더스를 좀 더 밀어줘도 됩니다.”
“네?”
폴 고슬링은 조금 뜬금없는 최민혁 실장 제안에 고개를 갸웃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자세한 것까지 말하기는 그렇습니다. 다만 그 정도 일은 할 수 있지요?”
KD 통신 관련 부분에 대한 중공 협조는 이미 진행되는 일이었다. 굳이 그 일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최민혁 실장이 그 점을 걸고넘어지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뭐,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은 왜…….”
최민혁은 모건 스탠리를 애초에 믿지 않았다.
“설마 저랑 협상하기 싫은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도 굳이 채찍만 휘두를 생각이 없었다.
“대신에 보상이라면 ARN 지분 10%를 그쪽에 넘기겠습니다.”
“ARN 지분이라면…….”
폴 고슬링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ARN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이 회사가 얼마나 잘나갈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 모건 스탠리는 ARN이 적용된 KM DVR 가치에 대해서 검토 중입니다. 문제가 많은 것으로…….”
“그 문제는 이미 해결했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폴 고슬링은 화들짝 놀랐다. KM DVR 성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정말 운 좋게 알았다. 지역 경찰까지 뒤지는 와중에 KM DVR 문제를 파악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모건 스탠리가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왜 DEC에게서 다시 고성능 ARN 사업부를 인수했다고 생각합니까? 아, 그 정도는 아시죠. 맞습니다. 그게 답이었습니다.”
그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았다. 고성능 ARN가 관련된 보고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
폴 고슬링은 보고서를 한참 동안 읽으면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최민혁은 씩 웃었다.
“사실 그걸 이용해서 모건 스탠리 뒤통수를 칠까 고민도 했지만 관두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주변에 적을 너무 많이 만드는 것 같아서 말이죠. 제가 샐로먼 브러더스와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은 잘 알 테니, 자세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사이에 껴서 모건 스탠리가 분탕질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네.”
최민혁은 패닉에 빠져 있는 폴 고슬링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네, 그 정보를 전해주려고 했습니다. 저흰 정말 모건 스탠리와 잘 지내고 싶습니다. 바트화 문제는 제가 양보하죠.”
“…….”
폴 고슬링은 차마 웃고 있는 최민혁 실장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ARN과 관련된 정보를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 * *
최민혁 실장과 모건 스탠리의 갈등은 최민혁 실장이 잽을 날리면서 시작한 일이었다.
그 잽이 바로 바트화 문제였다.
그가 이 일을 접는다면 굳이 모건 스탠리가 최민혁 실장과 대립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어지간한 기업이라면 모건 스탠리가 보복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경우는 좀 달랐다.
더욱이 모건 스탠리는 덩치가 큰 투자 회사다.
바쁜 일이 많았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의 경우에는 모건 스탠리와 딘 워터 증권 회사 합병에 대한 일로 정신이 없었다.
투자 은행인 모건 스탠리와 개인 투자자인 딘 워터 사이의 합병은 월가에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모건 스탠리는 95억 달러, 딘 워터는 무려 130억 달러를 출자하여 만든 회사이니까.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이 새로운 증권 회사 설립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솔직히 이런 일과 비교하면 최민혁 실장 관련 일은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이 일에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폴 고슬링이 가져온 자료를 수십 차례나 보면서 혀를 찼다.
“…돌겠네.”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알아, 내가 언제 이 일이 사소하다고 했어?!”
폴 고슬링은 칭얼거리는 마이크 라이언 이사의 말을 삭 무시했다.
“어차피 두 회사 합병은 이미 관계 당국에서 다 허가가 난 일입니다. 대주주 중에 크게 반대하는 세력도 없습니다. 차라리 최민혁 실장 일이 더 중요합니다.”
폴 고슬링의 말은 두 회사의 합병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