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4.
“저희 쪽에서 검토한 결과로는 부정적입니다.”
ARN의 지금까지 실적을 토대로 판단한 결과였다.
특히 부정적인 결론에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에플의 뉴턴이었다.
뉴턴은 에플을 망가뜨린 가장 큰 요인이었다.
“하긴 뉴턴은 나도 하나 있어. 도대체 그런 물건을 왜 만들었는지 몰라.”
“그래도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처음 평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평가만 그렇잖아. 정말 쓸데가 없어. 애물단지였으니까.”
서머스 부장관은 책상 서랍을 뒤지더니 처박아놓은 뉴턴을 꺼냈다. 나름 미국 기업에 대한 애정 때문에 하나 구입했다.
그런데 이 비싼 기기를 사놓고선 몇 번 쓰지도 않았다.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신기한 눈으로 서머스 부장관을 쳐다보았다.
“…설마 구입하셨던 겁니까?”
“나 같은 사람이라도 나서서 물건을 구입해 줘야 에플이 잘나가지 않겠어?”
“아, 하긴 에플 상황도 그때는 최악이었으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만 해도 에플 주가는 1달러 밑으로 맴돌았다.
이 쓰레기 같은 뉴턴 때문에 말이다.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혀를 내둘렀다.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일은 정말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는 솔직히 IRS와 다른 정부 기관을 동원해서 DEC의 고성능 ARN 사업부를 샅샅이 살폈다. 도저히 1억 달러 가치로는 보기가 힘들었다.
“…최민혁 실장의 행보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렇겠지.”
그리고 그게 미국 재무부조차 최민혁 실장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였다.
미국 하원에서 최민혁 실장을 조사하지 않았다면 재무부도 굳이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최민혁 실장의 이번 일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가 없었다.
“…다만 DEC이 지금 당장 현금이 필요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DEC은 벌써 5년 전부터 적자 사업부를 다 팔아치웠습니다. 최민혁 실장의 이런 행보는 오히려 우리가 부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럴지도. 하지만 우리는 원칙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
“솔직히 최민혁 실장이 우리 재무부, 아니, 미국 정부를 의식해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일은 기존과는 다른 형태입니다. 사전 만남 전에 이미 조율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카드가 무엇인지까지는 알지를 못했다.
“음.”
서머스 부장관 역시 신음성을 터뜨렸다. 사실 최민혁 실장과의 만남은 어떻게 보면 요식적인 절차였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이니까.
최민혁 실장이 가진 퀄컴 지분을 매각하는 것이 그 한 방법이다.
그 전에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미국 정부의 고민거리 하나를 해결해 준다고 생각하면 딱히 나쁜 일도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특혜 의혹 때문일 것이다.
지금처럼 DEC의 사업부를 인수해서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다면 재무부 입장에서는 부담을 덜 일이다.
그는 그제야 모건 스탠리의 여우 마이크 라이언 이사가 왜 최민혁 실장 때문에 미국 정부를 이용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 이 친구는 만만치 않은 친구야. 진짜 쉽게 생각할 수가 없어.’
* * *
“DEC의 고성능 ARN 사업부 매각이라…….”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최민혁 관련 보고서를 살폈다.
만남을 계속 연기한 덕분에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다시 업데이트된 결과물이었다.
그야말로 SF 장편 소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황당한 내용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결과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고성능 ARN에 왜 관심을 가지는 거지?”
“ARN 역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심혈을 기울이던 ARN6가 뉴튼이 망하면서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 공을 들여서 만든 ARN7은 이제 막 소개 단계입니다.”
“성능이 아슬아슬하겠어.”
“네. ARN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하지만 DEC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그들이 ARN에게서 사들인 ARM V4 시장 상황에 대해서 영 확신하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인텔 측과 매각 협상을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DEC과 인텔의 비밀스러운 만남은 언론에도 나오지 않았다.
워낙에 미묘한 아이템이라서 주주들의 눈치를 본 것이었다.
“그런데 굳이 인텔이 확실하지 않은 사업에 무리수를 둘 필요가 없었나 보군.”
“보수적인 판단을 내렸을 겁니다. 판매 결과를 보고 나서 결정할 생각이니, 적어도 2~3년은 협상이 길어질 겁니다. 인텔의 기존 사업과는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최민혁 실장이 그 틈을 파고들었고?”
“네. 하지만 그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최민혁 실장의 손해가 클 겁니다. 그래도 매각 협상만 성사되면 DEC의 숨통이 트일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미국 정부도…….”
“…굳이 특혜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DEC 경영에 간섭할 이유가 없겠어.”
“네.”
그도 혀를 찼다. 최민혁 실장의 이번 행보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재무부, 아니, 미국 정부 눈치를 보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하면 최민혁 실장이 왜 이런 일을 벌인다고 생각하는 거야? 설마 이 보고서대로 우리 재무부 눈치를 봐서 이렇게 한다고 봐?”
“…네.”
정확히는 클린턴 행정부가 늘 입만 열면 말하는 그놈의 ‘경제’와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이제 올해 말이면 미국 재선이니, 아예 최민혁 실장도 그 점을 노렸고 말이다.
솔직히 지금은 최민혁 실장을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로버트 루빈 장관은 평소 얼음 같은 냉혈한인 서머스 부장관의 표정에 금이 간 것을 보고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보기에는 최민혁 실장이 이런 손해를 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더욱이 이전까지는 그 회사 지분 자체를 인수했잖아. 굳이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나? 정말 우리 재무부 때문인가?’
“가만, 그래서 자네 생각은 어때? 이번 일은 그냥 두고 보자는 거야?”
“필요하다면 미팅 일정을 무리하게 당기지 말고, 더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분위기를 봐서는 최민혁 실장이 몇 가지 선물을 더 줄 수도 있으니까요.”
“하면 퀄컴 지분은 그냥 넘어갈 생각인가?”
서머스 부장관은 잠깐 고민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최민혁 실장이 넌지시 한 제안은 국익에 큰 도움이 된다.
이런 것을 보고 무리수를 둘 일은 아니었다.
“저야 대통령님이 지시하면 따라야죠. 하지만 굳이 클린턴 대통령도 재선을 신경 쓰는 와중에 문제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선 후로 미루자?”
“그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다른 쪽에서 말이 나오지 않을까? 당장 모건 스탠리의 마이크 라이언 이사가 재무부를 들쑤시고 다닐 거야. 그 친구는 무시할 수 있어도 모건 스탠리 이사회는 이야기가 달라.”
“그것 역시 우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최민혁 실장이라면 모건 스탠리와 갈등하기보다는 차라리 소통으로 협상할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이것 역시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보고 내린 서머스 부장관의 결론이었다.
그가 최민혁 실장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배척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그런 서머스 부장관의 태도 변화에 혀를 내둘렀다. 서머스 부장관이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흠, 그러지. 일단 이번 건은 관련 부서에 연락해서 잘 처리하도록 힘을 밀어줘.”
“…알겠습니다.”
* * *
미국 재무부는 힘이 있는 조직이다. 특히 로버트 루빈 장관은 미국 클린턴 행정부 내에서도 경제 분야에는 꽤 강력한 영향을 발휘한다.
그가 지시를 한 이상 그 일이 진행되지 않을 리가 없다.
더욱이 특혜 의혹이 나오지 않은 DEC 관련 일은 말이다.
DEC 역시 갑작스러운 ARN의 요청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심 인텔에 반도체 사업부를 다 넘기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았다.
인텔이 어떻게 해서라도 헐값에 인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ARN와 DEC 사이의 고성능 ARN 관련 거래는 전광석화처럼 진행되었다.
최민혁은 물론 생각보다 빠른 인수 과정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사업부 인수 관련 거래 도장에 잉크가 마르기 전에 우선 고성능 ARN 관련 샘플 칩부터 찾았다. 다행히 이미 개발은 끝나 있는 상황이었다.
양산 전 단계에서 사업이 멈춰 있었던 것이다.
‘이거 진짜 재수네.’
DEC도 진짜 고민을 많이 했다. 계열사 적자는 누적이 되는 상황에서 고성능 ARN를 밀어붙일 상황이 아니었다.
최민혁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ARN의 도약 신호탄이 된 것이 바로 이 고성능 ARN이었다.
이 고성능 ARN은 다양한 분야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ARN 코어 역시 고성능 ARN을 토대로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고 말이다.
실제로 최민혁 실장의 전생에서는 고성능 ARN 기술이 적용된 차기 ARN 코어가 꽤 큰 성공을 거두니까.
‘StrongARN이라고 해야지.’
기존 ARN7과 StrongARN는 타깃 자체가 전혀 달랐다.
전자가 휴대용 기기에 적합했다면, 후자는 고성능 모바일 소자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특히 StrongARN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면서 ARN의 성장을 부추겼다.
이 기반 기술 덕분에 ARN7도 재설계가 되어서 ARN7TDMI가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마트폰 기술에 사용된 ARN 코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라면 스마트폰 프로젝트 자체가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차기 ARN 코어라면 상황이 달랐다.
그렇게 본다면 스마트폰 개발 자체는 너무 시대를 앞서간 셈이다.
‘자칫하면 뉴턴 꼴 날 뻔했어.’
최민혁은 내심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ARN7TDMI 이후에 ARN 가치가 수직으로 치솟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전생 1회 차 때의 흐름을 아는 까닭이다.
스마트폰의 미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미래는 정확히는 10년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 시점은 반도체 기술을 비롯해서 필요한 모든 기술이 이미 어느 정도 성숙된 이후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었다.
당장 ARN 코어 성능은 스마트폰에 적합하지 않았다.
최민혁은 자신의 실책을 하나씩 돌아보면서 머리를 굴렸다. 그는 자신이 에플 주가 폭등 이후에 자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굳이 여기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계획한 플랜 자체는 제대로 된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 잘되는 놈은 뭘 해도 잘된다고 하더니, 이거 정말 초대박이다!’
최민혁은 그 바쁜 와중에도 DEC의 고성능 ARN 공장을 직접 방문해서 관련 자료와 샘플을 들고는 다시 한국의 KM 센서 연구소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이미 조 레니 수석부장과 헨리 노리스 부장까지 와 있었다.
그들은 ARN 엔지니어 군기를 잡은 채 최민혁 실장 연락만 기다렸다.
“이걸 한번 사용해 보세요.”
“이게 그 StrongARN입니까?”
“네. ARN V4 아키텍처를 사용한 방식이라서 익숙할 겁니다.”
실제로 테스트 보드는 이미 이 칩을 사용해서 만들어져 있었다.
KM DVR 팀이 뒤늦게 연락을 받고 나서 부랴부랴 작업한 결과였다.
StrongARM만 간단히 올리면 동작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OS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이미 DEC에서 작업을 해놓았다. 드라이버 단까지 친절하게 만들어져 있는 셈이다.
포팅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는 발생했다.
하지만 기존에 버그라고 생각했던 문제들은 역시 대부분 나타나지 않았다.
SrongARN 자체가 이미 2년에 걸쳐서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MPEG-2 코덱은 KM DVR 개발 과정에서 어느 정도 버그가 잡혀 있었고 말이다.
결과는 생각보다 놀라웠다.
무려 640 디지털 화질이 아주 깔끔하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동영상 영상 문제없이 잘 동작했다.
설사 문제가 있어도 당장 그 부분만을 수정하는 것은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동영상이 이상적으로 재생된다는 것이었다. 그거도 PC가 아니라 전용 보드에서 동영상이 완벽하게 플레이된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어떤 기술로도 구현할 수 없는 놀라운 성과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