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86화 (783/1,021)

#786.

이미 어느 정도 수익 규모도 정해진 일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제안은 그 이익 규모를 다 살필 수가 없었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채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결국 ARN 코어 성능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이야기인데, 앞으로 ARN 가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검토가 좀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가능하겠어?”

“내일까지 보고드리겠습니다.”

* * *

폴 고슬링은 사무실 한쪽에 동행한 케네스 최를 쳐다보았다.

케네스 최는 에플 인수합병 팀 일부를 이용해서 조사한 ARN과 관련된 브리핑부터 시작했다. ARN의 성장과 미래 가치에 대한 설명이었다.

[기본적으로 ARN 코어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전력 코어, 즉 모바일에 맞는 CPU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IP만을 팔아서 이익을 버는 방식입니다. 리스크도 크지 않습니다.]

저전력과 IP 형태 형식의 비즈니스는 다른 기업과는 차별화된 형태였다. 제조 기반 자체가 빠져 있어서 리스크도 적고 말이다.

다만 이 방식으로 제대로 수익을 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주도하는 사업이다. 과연 많은 전문가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흘러갈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하면 그 StrongARN 비즈니스와는 전혀 다른 전략이잖아?]

케네스 최 역시 순순히 수긍했다.

[네, 맞습니다. ARN 내부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진 상태입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IP에만 집착해왔습니다. 그러니 계속 헛돌기만 했습니다.]

ARN의 철학과는 다른 방향에 대해서는 선을 분명히 그어버렸다.

그래도 ARN은 지금까지 잘 굴러왔다.

[ARN 대주주 때문입니다. 대주주 중의 하나인 VLSI가 중간에 도움을 많이 줬습니다. 덕분에 파산할 수준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고성능 ARN을 DEC에 굳이 라이선스해 버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ARN은 애초에 조인트 벤처로 시작되었다. 그러니 대주주가 이들을 밀어주는 건 당연했다. 에플은 아예 뉴턴 사업부 하나를 밀어줬다.

뉴턴이 성공만 했다면 ARN은 제대로 떴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뉴턴이 실패하면서 에플은 휘청했다.

에플 주가가 1달러 이하로 맴돌았던 이유였다.

KM DVR는 어떻게 보면 ARN이 생존을 위한 수단 중의 하나였다.

KM DVR가 뜨면서 ARN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그 사업부를 인수한 것은 일종의 솔루션인가?]

[네, 맞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DEC도 상황이 벼랑 끝으로 몰리지 않았다면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정말 이상하군. 단순히 돈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은데…….]

[최근 확인한 바로는 11.3인치, 12.1인치 IPS-LCD 계약을 도와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케네스 최가 한 이야기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최민혁 실장은 DEC에게서 단순히 StrongARN 사업부를 인수한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LC 전자 측이 지금 진행하는 중형 LCD 신제품을 DEC과 연결해 준 것이었다.

LC 전자로서는 딱히 거절할 일은 아니었다.

소형 IPS LCD와는 달리 10인치대의 IPS LCD 개발은 순조로웠다. 이제는 시장에 판매를 해야 할 시점이었다.

이 제품은 10인치 노트북에 적용 가능한 제품이었다.

[LC 전자? 거기에 LC 전자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야?]

[IPS-LCD 신제품은 최민혁 실장이 보유한 LCD 특허가 적용된 제품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IPS-LCD와 TFT-LCD 사이엔 격차가 꽤 벌어졌다.

두 기술은 근본적으로 많은 차이가 존재했다.

결국 다시 이야기가 나온 것은 IPS-LCD 특허 기술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일본 히타치 공작소에서 빼돌린 특허 말이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그제야 IPS-LCD 특허를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가만, 설마 히타치 공작소에서 빼돌린 특허로 LC 전자를 밀어준 거야?]

케네스 최는 아주 잠깐 고민하나 싶었지만, 사실을 말해주었다.

[LC 전자만이 아닙니다. 오성 전자 측에서도 IPS-LCD 기술을 넘겼습니다. 심지어 IPS 기술과는 다른 LCD 특허는 KD LCD란 기술에 넘겨서 아예 새로운 계열사까지 만들었습니다.]

[…….]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그제야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기획안을 다시 들춰보았다. 당시 대충 넘겼던 그 기술이었다.

이렇게 나온 IPS LCD 특허 기술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왜 이제야 이 상황을 알게 된 것인지 금방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이 직접 LCD 특허를 이용한 것이 아니라 LC 전자와 오성 전자에 넘겨서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이용해서 DEC에게도 그만한 혜택을 줬다.

얼핏 봐서는 브로커 역할을 한 것 같지만, 최민혁 실장은 그 중간에서 특허료 수익을 짭짤하게 챙겼다. 이게 작은 것 같아도 KM 전자의 지난주까지 특허 수익이 무려 5억 달러를 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전혀 작은 이익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모래가 모여서 모래 산을 형성한 것이니까.

MP3 특허 로열티 수익이 이제 시작되었다면, IPS LCD 특허료는 3~4년 후에 KM 전자 수익성을 더욱 키울 것이다.

이게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케네스 최가 대표로 보고하고는 있지만 다른 팀원들 역시 다들 입을 딱 벌렸다. 사실 그들도 조사하고 나서야 알게 된 진실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보유한 기술 특허는 생각보다는 광범위했다.

그 특허 하나하나가 수백억, 아니, 수천억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하원에서 왜 최민혁 실장을 위험인물로 선정했는지 영문을 몰랐는데, 다 이유가 있었구나.’

[…….]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최민혁 실장이 얼마나 거대한 플랜을 세워서 일을 밀어붙이는지 깨달은 것이었다.

단순히 일 년, 이 년의 미래가 아니었다.

3년, 5년, 아니, 어쩌면 10년 이상의 미래를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본다면 ARN 미래는, 아니, 당장 에플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케네스 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마이크 라이언 이사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맞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특허 수익을 가장 기본으로 봅니다. 그 관점에서 ARN를 살펴야 합니다. ARN 코어 성능이 여전히 발목을 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DEC에서 개발한 이 'StrongARN'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기존의 문제를 모두 극복했습니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기가 막혔다.

[그걸 DEC은 왜 몰랐던 거야?]

[DEC이 지금 여유로운 상황이 아닙니다. StrongARN을 영업하기에는 내부적으로 이런저런 일이 많았습니다. 자칫하면 DEC 자체가 무너질 수가 있어서 인텔과도 만났습니다.]

DEC이 직접 StrongARN을 영업해서 결과를 얻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DEC과 관련된 업체 역시 ARN 코어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인텔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아직 시장도 확실치 않은 StrongARN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는 뉴턴의 실패도 크게 작용했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타이밍이 정말 환상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의미다.

딱 1년만 지나도 고성능 ARN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테니 말이다.

‘…어째 최민혁 실장이 좀 무리수를 둔 것 같더라 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구나.’

[하면 정말 최민혁 실장이 말한 대로 흘러갈 공산이 크다는 거야? 설마 지금 우리가 ARN 지분 10%를 인수해야 한다고? 그것도 4억 달러에? 최민혁 실장이 ARN 지분 50%를 인수하는데, 들어간 금액이 얼마인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최근 지분 10% 인수에 1억 달러가 들어갔으니, 차익만 무려 3억 달러였다. 지분을 인수해서 파는 것만으로 3억 달러 수익을 챙기는 것이다.

[…….]

케네스 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폴 고슬링 역시 입을 쿡 다물었다.

최민혁 실장의 과거 ARN 지분 인수는 첩보전 저리 가라 할 일이었다.

그는 차명 법인을 내세워서 야금야금 ARN 지분을 다 먹었다.

그것도 채 2,000만 달러가 안 되는 금액에 말이다.

그나마 최근 10% 지분 확보에 1억 달러를 쏟았으니.

이것도 ARN 대주주가 최민혁 실장 눈치를 봐서 겨우 협상이 진행된 일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정작 그 10% 지분을 자신에게 4억을 달러에 팔겠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점은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무시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정말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아야 하는 거야?”

“…….”

케네스 최는 침묵했고, 다른 이들 역시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ARN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역시 ARN DVR 업그레이드 버전에 대한 보고서였다.

단순히 ARN DVR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분야에서 사용될 수 있다.

그건 곧 이 ARN 칩 판매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 일의 배후에는 최민혁 실장이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불과 며칠 사이에 손을 쓴 덕분에 ARN 지분 10%의 가치가 달라진 것이었다.

폴 고슬링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좀 더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DEC도 그렇지만 LC 전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 * *

LC 전자와 DEC 사이의 IPS LCD 거래는 그 규모가 무려 3억 달러를 넘었다.

주 계약은 IPS-LCD였지만 TFT-LCD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LC 전자 내부에서도 이번 거래가 LCD 투자 부담을 더는 일이었다.

LC 전자 기획실 한병수 실장은 이번 일을 최민혁 실장만 보고 밀어붙였다.

그는 최민혁 실장에게 연락받자 다른 것에는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최민혁 실장을 통한 DEC의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음에도 말이다.

실상 최민혁 실장이 StrongARN 사업부를 인수 과정에서 상대측이 도움을 요청하기에 슬쩍 도와준 것뿐이다.

하지만 한병수 실장은 이번 일 때문에 LC 전자 상무인 아버지 한봉준의 소환을 받았다.

“고생했다.”

“아, 아닙니다.”

“아냐. 빠른 판단을 한 덕분에 이 일이 추진된 것이잖아. 내가 알아본 바로는 이 일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별로 없어.”

당연히 없을 수밖에.

최민혁 실장이 DEC과 거래하면서 갑자기 추진한 일이기 때문이다.

실상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잘 몰랐다면 그의 제안을 쉽게 수긍하기 힘들었다.

한봉준 상무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LC 전자 내에서도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대주주 역시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보수적인 면이 컸다.

그는 새로운 사업보다는 기존의 안정적인 수익 사업에만 집중했다.

따라서 한병수 실장의 능력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일로 평가 자체가 달라졌다.

DEC이란 회사가 글로벌 회사인 탓이다.

“이번 일은 할아버지가 관심을 두기 시작했어. 이 기회를 놓치지 마.”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봉준 상무는 한병수 실장의 성과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자신이 한 것처럼 위에 보고했으니까. 그는 LC 그룹 경영 승계 후보자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한병수 실장으로서는 욕이 나왔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도 알다시피 네 평가는 극과 극이다. 조직 내에서 다른 망나니 재벌 3세처럼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성과도 없어.”

좋게 말하면 무난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조직 장악력이 떨어진다.

이런 면은 다른 10대 재벌가하고는 차별화된 평가였다.

물론 성과가 있다면 이게 장점이 될 수가 있다.

“오성 그룹 안재운 황태자보다는 나은 점이 많지. 하지만 오너로서는 부족한 면이 많아. 차라리 경영 전문가를 불러들이는 것이 훨씬 나아.”

“…네.”

한병수 실장은 입술을 악물었다. 한봉준 상무의 충고는 아무리 봐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 눈치를 보기만 했다.

곧 있으면 한봉준 상무가 LC 전자 사장으로 승진한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람, 결국 일은 내가 다하고, 성과는 아버지가 다 먹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