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83화 (780/1,021)

#783.

애초에 ARN은 저전력화에 선택과 집중을 했다. 고성능 칩 영역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생각했다. 에플의 뉴턴이 그 증거였다.

실제로 뉴턴 개념 자체는 획기적이었다. 다만 문제는 역시 칩 성능이었다. 작은 흑백 화면 역시 문제였다. 너무 시대를 앞서간 결과물로 결국 실패한 것이었다.

ARN의 조인트 벤처 회사는 에플 실패에 크게 좌절하고 말았다.

아콘, VLSI, 에플이 굳이 ARN 지분을 최민혁 실장에게 매각한 것은 절망과 더불어 마지막 희망이었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뭔가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나마 고성능의 경우에는 자본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고육지책으로 DEC에 ARN V4 라이센스를 넘긴 것에 불과했다.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ARN과 관련된 기술 흐름을 떠올렸다.

‘최고의 타이밍이었어.’

만약 MPEG-2에만 집착해서 재무부와 서둘러서 일을 밀어붙였다면,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다양한 전장 시나리오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앞서 ARN 엔지니어를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 DEC 측에서는 이미 개발이 끝났을 겁니다. DEC이 만든 고성능 ARN 칩 사업부를 인수할 생각입니다. 그 칩을 가지고 KM DVR에 적용하기 바랍니다.”

“네? 그 말을 개발을 다시 하란 말씀 같은데…….”

“꼭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어차피 ARN V4는 ARN7과 비슷하죠. MPEG-2 칩을 따로 만들어서 합치면 될 겁니다. 그건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아니,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차라리 KM DVR 칩의 완성도를 더 올리는 것이…….”

“그건 어려울 겁니다. 애초에 ARN7 용도가 모바일 용도 아니었습니까? KM DVR 쪽에는 맞지 않을 겁니다.”

이건 최민혁 자신도 간과한 결과물이었다.

그 자신이 공돌이가 아니어서 가지는 한계이기도 했다.

“…….”

갑작스러운 최민혁 실장의 방문에 머리를 굴렸던 마이클 쿠치 CTO는 크게 당황해서 입을 쿡 다물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이 한 제안이 내부적으로 문제가 된 근본적인 성능 제약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존 ARN7 방식을 아무리 사용해도 KM DVR 영역에는 많은 한계가 존재했다.

정확히는 상업적으로 무리였다.

다만 그로서는 최민혁 실장이 왜 갑자기 지금 와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DEC 칩 성능이 그렇게 좋다는 말인가?’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ARN 이사회가 제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제 제안을 수긍하겠죠. DEC의 고성능 ARN 인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지금은 DEC조차 자신이 만든 고성능 ARN 칩에 대해서 긴가민가할 겁니다. 그래서 적기죠. 지금이라면 고성능 ARN 사업부를 인수할 수 있습니다!”

“…네. 일단 내부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왕이면 ARN 이사회 통해서 바로 결과를 보고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 * *

최민혁 실장의 실리콘 밸리 ARN 연구소 방문과 제안은 누가 봐도 조금은 뜬금없었다.

경영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본인이 말하고서 정작 대놓고 관여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ARN 이사회는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최근 DVR 사태를 통해서 일어난 일을 잘 알았고, DVR 칩이 무시 못할 아이템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ARN 실무진을 직접 호출해서 최민혁 실장이 한 제안을 검토했다.

[최민혁 실장의 제안이 정말 의미가 있는 겁니까?]

저전력 CPU와 고성능 CPU 차이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ARN 내에서는 이미 이 두 가지 코어에 대한 비교 결과가 있었다.

[문제는 지금 반도체 공정의 한계 때문에 여러 가지 취약점이 생깁니다. 저희 ARN 코어 역시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성능 ARN은 다르다는 말입니까?]

[…네.]

실제로 두 가지를 비교한 성능 분석 결과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구가 진행 중이었다. 다만 반도체 기술의 한계 때문에 다양한 대안을 연구 중이었다.

반도체 설비 기술 확보에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ARN이 굳이 ARN 코어 라이선스를 DEC에 넘긴 이유였다.

[…하면 지금 최민혁 실장이 DEC의 고성능 ARN 사업부를 가져오자고 하는 것은 충분히 해 볼 만하다는 겁니까?]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DEC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고성능 ARN 사업부를 매각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상황이 다릅니다. DEC은 우리보다 상황이 더 어렵습니다.]

[…….]

ARN 이사회는 다들 모여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이 왜 자신들에게 지분 50%를 인수해 갔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타이밍만 보면서 사전에 ARN 지분을 확보한 건가?’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최민혁 실장이 DEC도 모르는 고성능 ARN의 가치에 대해서 어떻게 아느냐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다만 그들도 알 수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DEC이 고성능 ARN7 사업부를 인텔에 매각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군.’

하지만 그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간단했다. 대주주인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에 훼방을 놓을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 제안을 받는 것으로 합시다!]

* * *

최민혁은 내년에 DEC이 반도체 사업부를 인텔에 매각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굳이 인텔을 거쳐서 고성능 ARN 기술을 받아 올 이유는 없으니까.’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잘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차량 안에서 ARN과 DEC측을 만나서 협상한 보고서 내용을 보고하면서 입을 열었다.

“KM DVR에 사용된 ARN 칩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시는 겁니까?”

최민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DVR 경우는 네트워크용 ARN 경우와는 많이 다릅니다. 허접한 ARN7만으로 감당이 안 됩니다. 성능이 좀 더 올라가야 합니다.”

“하면 사전에 KM 센서 측에 조언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만약 고성능 ARN을 채용했다고 가정할 경우에 제대로 된 성능이 나온다면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당장 DEC이 ARN 사업부 매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한다고 해도 고성능 ARN 사업부 매각 대금을 왕창 끌어올릴 겁니다.”

실제로 DEC은 요즘 고민이 많았다.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DEC이 기록한 흑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미니 컴퓨터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공격적인 도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시도는 호환성 문제 때문에 상업적으로 크게 실패했다.

DEC이 굳이 ARN V4를 라이선스한 이유는 새로운 시도와도 관련이 있었다.

문제는 지속되는 적자 때문에 DEC 내부에서는 늘 내부적인 갈등으로 혼란했다.

DEC은 어떻게 해서라도 적자를 메꿀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최민혁은 내년에 이 DEC 반도체 사업부가 인텔에 7억 달러에 매각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물론 반도체 사업부 자체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고성능 ARN CPU 라이센스와 생산 설비만 있으면 되니까.’

“…….”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한동안 상황을 이해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이는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러면 더 이상합니다. KM 센서는 애초에 모바일 센서 쪽을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KM DVR과는 상황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맞다.

그가 처음에는 굳이 KM 센서나 KM DVR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유였다. 물론 DVR 플랜 이후에 계획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 안에 또 함정이 있는지는 몰랐다.

‘그거야 엔지니어가 알아서 할 문제이니까.’

자신이 굳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최영란 본부장도 성과를 너무 쉽게 먹는 것 같으니, 이번 기회를 통해서 좀 구르면 더 좋고 말이다.

그런 내심을 말할 수는 없었다.

“…….”

최민혁도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KM DVR 사업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도 ARN 성능에 대해서는 너무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굳이 그런 자신의 실수를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니, KM DVR 관련 사태가 너무 커졌는데, ‘아, 실수!’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괜한 변명을 하기 싫어서 슬쩍 조성돈 팀장의 의혹에 가득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 눈치를 보다가 결국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여전히 인내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늘 기승전 최민혁 용비어천가였기 때문이다.

최민혁도 한마디 해줬다.

“문제는 타이밍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존재해서 그 틈을 잘 파고들어야 해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KM DVR 사업을 그냥 접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설마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아, 네.”

조성돈 팀장은 찜찜했지만 최민혁의 말에 더 토를 달 수는 없었다.

최민혁 말이 맞았다.

상황이 어찌되었든 KM DVR 사업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런데 뒤늦게 발견된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찾아야 했고 말이다.

그게 ARN 성능을 끌어올려서 될 거라면 그렇게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 못한다면 최민혁 실장의 대안이 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DEC 측을 잘 구슬려 보세요. 그쪽은 지금 상황이 안 좋아서 지금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닐 겁니다. 고성능 ARN에 집착하기에는 기업 상황이 너무 안 좋죠.”

“…네.”

“이번 일은 재무부, 아니, 미국 정부의 경제 활성화 정책과도 관련이 있어요. 이건 클린턴 대통령 재선하고도 연동됩니다. 그러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최대한 자세히 확인해 보겠습니다.”

* * *

최민혁의 DEC 평가는 사실이었다. 몇 년 전부터 DEC의 재무 건전성과 수익성이 나빠지면서 적자 사업은 정리를 해야 했다.

그나마 믿는 것이 DEC의 고성능 ARN 사업이었다.

그런데 이게 잘될지는 누구도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DEC에게 정말 안 좋은 사실이 ARN이 고성능 ARN 시장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단 점이다.

검증이 되지 않은 DEC의 고성능 ARN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었다.

사실 이런 부분은 미국 정부에서도 고민을 하는 일 중에 하나다.

DEC 파산은 미국 정부도 무시하기 힘든 일이었다.

때문에 미국 정부 입장에서도 DEC 사업부 매각을 어떤 형태로든지 도왔다.

평소라면 미국 재무부도 이런 일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전과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스티븐 키렌 차관보가 최민혁 실장 동선을 조사하면 ARN의 행보를 찾았다.

“이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서머스 부장관 역시 곤혹스러웠다. 그도 최민혁 실장을 조사하기 전이라면 그냥 넘겼을 일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프로필을 알고 나서는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 하나 하나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ARN은 당연히 빼놓기 어렵다.

최민혁 실장이 찍은 다른 아이템과는 달리 아직 제대로 씨앗이 발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ARN을 파보니, 고개를 갸웃뚱할 수밖에 없다.

“ARN이 정말 DEC 반도체 사업부를 1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했습니까?”

“네. 그 자금은 최민혁 실장이 대기로 했습니다. 대신 ARN 지분을 더 늘리기로 했습니다.”

이번 거래로 최민혁 실장 ARN 지분은 무려 60%까지 늘어났다.

ARN 지분 10%에 1억 달러면 그렇게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많이 쳐준 거래 대금이었다.

“ARN의 미래 가치를 다시 평가해 봤고, 외부 용역을 맡겨봤지만 다들 고개를 갸웃할 뿐입니다.”

“ARN이라…….”

서머스 부장관은 ARN과 관련된 기업 연혁을 살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흥미로운 점은 아직 ARN 실적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당장 미래 IT 시장에 큰 영향을 줄 정도의 회사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이 ARN 대주주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에플의 CEO 스티븐이란 점이다.

이것을 봐서는 ARN 미래 가치는 결코 가볍게 볼 수준은 아니었다.

서머스 부장관을 지금 당장은 이게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ARN도 에플처럼 되는 걸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