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82화 (779/1,021)

#782.

최민혁은 그제야 지금의 DEC이 처해 있는 상황을 돌이켜봤다.

‘몇 년 전부터 이미 누적된 적자로 사업부를 계속 정리하고 있었구나.’

이건 좋은 시그널이었다.

미국 정부 처지에서 부실한 회사 청산은 꽤 중요한 일이었다.

최민혁은 잘만하면 KM DVR 문제를 해결하면서 미국 재무부에도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을 만한 솔루션을 차분하게 고민했다.

‘이거 좋은데?’

생각보다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사실 KM DVR로 이익을 보려면 시간이 제법 많이 필요했다.

그 이익도 크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ARN은 상황이 다르다. ARN 가치가 오르면 에플 주식 초대박과 같은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다만 이게 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미국 재무부가 태클 건 것도 미국 국익 때문인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최민혁 자신은 스스로 일을 계속 만들어서 더 부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일을 MPEG-2처럼 쉽게 포기할 일이 아니었다.

판이 너무 컸다.

‘그래, 이익이 너무 커서 토해 내는 한이 있어도 일단 먹고 보자!’

그리고 어쩌면 잘된 일이었다.

지금이 ARN은 덩치 자체가 크지 않았고, 더욱이 영국 회사였다.

그는 우선 조성돈 팀장에게 연락해서 실리콘 밸리에 있는 ARN 연구소와 약속을 잡았다.

조성돈 팀장은 당연히 최민혁이 시키는 일을 하기는 했다.

“갑자기 ARN 측은 왜 손을 대시려는 겁니까?”

“최영란 본부장에게 연락받지 않았어요? ARN 칩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일단 당사자를 만나야죠.”

“하지만 지금 미국 재무부 미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까?”

“미팅 일정을 미루세요. 어차피 그쪽도 좋아할 겁니다.”

“괜찮을까요?”

최민혁 실장이 피식 웃었다.

“미국 재무부는 절 압박할 핑계가 필요합니다. 그냥 한 번 만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시간은 자신들 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면 최 실장님이 빨리 만나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까요?”

“아니, 꼭 그렇지도 않아요. KM DVR처럼 휘두를 수 있는 칼자루가 많을수록 협상에선 더 이익입니다. 그리고 마침 괜찮은 아이템을 찾았고요.”

“…KM DVR이 아니라 다른 아이템 말씀입니까? 혹시 MPEG-2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ARN입니다. 이번에는 ARN 쪽을 한번 밀어볼 생각입니다.”

“아, ARN이라면.”

조성돈 팀장도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과거 ARN 지분 인수를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닌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일은 아직도 왜 최민혁 실장이 그렇게 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정작 최민혁은 ARN 지분을 킵핑한 후에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 * *

최민혁의 또 다른 미팅 일정 연기를 미국 재무부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최민혁 실장의 추론처럼 그들도 굳이 서둘러서 최민혁 실장을 만날 이유가 없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최민혁 실장이 지분을 인수한 회사 가치가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퀄컴 지분만 생각했는데, 전혀 그럴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인수한 다른 회사 가치 역시 다시 들여다보면서 논쟁의 소지가 생겼다.

스티븐 키렌 차관보는 다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뭘 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적인 예로 ARN의 경우에는 미래 가치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매출도 좋은 편이 아닙니다.”

서머스 부장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내 생각은 달라. 당장 MP3 특허의 경우를 들 수가 있잖아. 시즈벨을 비롯해서 MP3 특허를 가진 유럽 회사를 돌면서 끈질기게 매달려서 결국 지분을 인수했잖아. 당시 그 일은 별게 아니었지만, 올해만 벌써 5억 달러 이상의 특허료를 벌어들였어!”

MP3 관련 특허는 이 산업이 갑자기 팽창하면서 생긴 일시적인 일이었다.

내년도 올해같이 계속 그렇게 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다만 10년 장기를 내다보면 상황이 좀 다르다.

특허 연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미래 기술도 그랬다.

KM DVR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면 ARN 지분 가치도 미래 기술처럼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을까?”

“하면 그 부분은 따로 조사를…….”

“아니, 그러지 마. 안 그래도 선을 넘은 것 같으니까. 이번 일은 마이크 라이언 이사에게 맡기자고. 그쪽이라면 알아서 움직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재무부에 정보를 넘긴 후에 묵묵히 기다리기만 했다.

그런데 로비스트 제임스 워커가 갑자기 그를 찾아와서는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KM DVR이라…….”

당연히 그도 예측한 일이었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재무부 로비스트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다.

“공식적인 이야기는 아닌데, 최민혁 실장이 인수한 다른 회사 역시 미래 가치가 있다는 것 같아.”

“설마 지금 날 보고 그 일을 해달라는 거야?”

“그런 일을 재무부가 아무런 혐의 없이 움직일 수는 없잖아?”

“그러면 지금 한 일은 뭔데?”

“그거야 통신 산업 부분을 딱 정해놓고 한 거잖아.”

“하.”

마이크 라이언 이사 처지에서는 실로 황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는 로비스트 제임스 워커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그 정보는 바로 접할 수 있었다.

폴 고슬링이 마침 쉽게 정보를 얻어 온 것이다.

“최민혁 실장이 ARN사를 방문했다고? 아니, 이유가 뭔데?”

“그건 오늘 방문한 거라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한번 잘 알아봐. ARN 측에는 아는 지인도 제법 있잖아.”

“…네.”

폴 고슬링은 마이크 라이언 이사의 지시를 받고 나서는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에플 주식 매입이 쉽지 않은데, 여기에 ARN이라니. 설마 ARN도 에플처럼 미래 가치가 폭등한다는 말일까?’

* * *

최민혁은 따가운 주변 시선을 느꼈지만, 그 중에는 미국 재무부도 있다고 생각해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당당한 자세로 ARN 측을 방문했다.

그곳에는 이미 최민혁 실장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ARN CTO 마이클 쿠치였다.

“최민혁 실장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전형적인 미남 백인으로 성격이 꽤 좋은 마이클 쿠치 CTO는 최민혁 실장에게 꽤 호의적이었다.

마이클 쿠치는 물론 최민혁 실장이 ARN 지분 인수를 어떻게 했는지 최근에야 파악했다. 그는 첩보전을 방불케 했던 이야기를 듣고 난 후라서 더 최민혁 실장 눈치를 봤다.

최민혁은 마이클 쿠치의 안내를 받아 ARN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ARN7을 책임진 조 레니 수석 부장 역시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두 사람은 최민혁 실장이 굳이 자신을 찾은 이유가 KM DVR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자존심이 강해서 투자자라고 해서 신같이 대우하지는 않았다. KM DVR 사태 전이라면 더 그랬을 것이다.

특이한 일이라면 최민혁 실장이 ARN 지분 40%를 인수하고도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당시 지분을 판 이들조차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들도 뒤늦게 ARN 지분이 최민혁 실장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알고는 책임자를 문책하기는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ARN이 에플처럼 뭔가 큰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그런 상대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직까지는 ARN이 그렇게 잘나가는 것은 아닐 테니까.’

* * *

[개인용 컴퓨터 가격이 많이 내렸다고 해도 여전히 비쌉니다. 따라서 네트워크 컴퓨터와 같이 특화된 시장에 적용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일종의 네트워크 컴퓨터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오라클이 ARN 제안을 받아들여서 만든 이 네트워크 컴퓨터는 고작 가격이 50만 원 선에 불과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얼마든지 네트워크 장비 쪽에서 사용할 수가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네트워크 컴퓨터를 개발한 업체가 오라클이라는 점이다.

이 컴퓨터는 소프트웨어를 바꿀 필요도 없고, 유지 보수를 따로 할 필요가 없다는 강점이 있다.

오라클은 아예 네트워크 생태계를 바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이 네트워크 컴퓨터에 사용된 칩이 ARN7 220MHz를 적용했습니다.]

ARN6 실패 이후에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한 성과물이 바로 ARN7이었다.

최민혁은 ARN 측의 최근 현황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별것 없구나.’

그는 뒤늦게야 ARN 지분 인수 타이밍이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기엔 정말 ARN 지분 인수가 어렵지 않았다.

ARN 지분 오너가 굳이 최민혁 실장에게 지분을 넘긴 것도 그런 타이밍과 관련이 있다.

최민혁 처지에서는 뒤늦게야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일까? 실력일까?’

내심 피식 웃고 말았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자신은 이미 ARN 지분 40%를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은 ARN의 가치를 끌어올려야 할 사람이었다.

꼰대 기질이 좀 보이는 마이클 쿠치 CTO조차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최민혁은 슬쩍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KM DVR 이야기는 들어보셨죠?”

“…아,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는 마이클 쿠치 CTO가 당황하자 힐끗 옆에서 머리를 굴리는 조 레니 수석 부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벤 골드 차장 팀을 파견해서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그 최선이 뭐죠?”

“네?”

“제가 알기로 이번 KM DVR에 사용된 칩은 MPEG-2, MP3 코덱을 ARN7과 원칩으로 결합한 것으로 압니다.”

“그게 단가를 줄이는 방법이라서…….”

“제 말은 성능이 제대로 나오냐는 겁니다. 320 사이즈 동영상은 그럭저럭 쓸 만해도 640부터는 만만치 않을 텐데요?”

실제로 그랬다.

샌프란시스코 지역 경찰이 사용한 것은 640 화질이었다.

넓이도 넓어서 윌슨 부부 행적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는 했다.

그런데 문제는 느려도 너무 느렸다.

사실 이건 버그 이전의 성능 문제였다.

지역 경찰도 그런 문제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KM 센스 측 엔지니어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도 단순히 ARN7의 한계라고 착각했지만, 상황이 그렇지가 않았다.

“…….”

마이클 쿠치 CTO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성능 관련 보고를 받기는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씹은 것은 본인이었다.

성능 리포터를 작성한 헨리 노리스 부장은 입만 뻐끔거렸다.

그로서는 당장 나서서 억울한 자기 일을 하소연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 레니 수석 부장의 차가운 시선에 투덜거릴 뿐이다.

ARN 내부 일을 대주주인 최민혁 실장이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혀를 찼다. 하지만 그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제가 알기로 ARN7 시리즈 중에 성능이 괜찮은 게 있는 것으로 압니다.”

“네? 그게 좀…….”

성능 이야기에 마이클 쿠치 CTO는 머뭇거렸다. ARN의 근본적인 문제였다. 아니, 정확히는 저전력에 특화된 ARN7의 한계였다.

최민혁은 그 ARN7 기능 중에 저전력과 관련된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모바일 ARN와 고성능 ARN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라고 봐야지. 그걸 아직 이해하지 못한 눈치 같아. 하긴 지금의 ARN이라면 어쩔 수 없지.’

“제가 알기로 ARN V4 라이선스를 준 업체 중에 DEC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 DEC에서 ARN V4 성능을 최대한 끌어올려서 만든 제품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DEC이라면…….”

마이클 쿠치 CTO가 힐긋 다른 실무진을 한 사람씩 쳐다보았다.

DEC은 ARN V4를 라이선스해 간 업체 중의 하나라는 것을 뒤늦게야 떠올렸다.

다만 DEC이 지금 만든 신제품이 뭔지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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