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9.
물론 방해꾼도 제법 있었다.
이지수 박사가 이끄는 그녀의 사단 말이다.
대부분 여성 비율이 높아서 남자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공돌이라고 해야 할까.
최민혁은 한껏 테니스로 땀을 뺀 후에 사용인에게 라켓을 넘겼다. 그는 시원한 냉수 한 잔을 즐기면서 테니스장 한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제이미 이사는 아직 도착 안 했습니까?”
조성돈 팀장은 마치 자신이 비서실장이라도 된 것처럼 전화로 확인했다.
“막 저택 정문 도착했다고 합니다. 15분 후면 이곳으로 올 예정입니다.”
“흠.”
조성돈 팀장의 말처럼 딱 15분이 지나자 정장을 입은 시즈벨의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마이클 리트를 비롯한 수행원 몇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시즈벨의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 모습은 과거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시즈벨 직원이 아니라 마치 KM 전자 임직원처럼 보였다.
태도가 단순히 KM 전자 파트너 직원이라기보다는 KM 전자 직원처럼 보였다.
마이클 리트를 비롯한 수행원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최민혁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에게 포도주를 권하면서 싱긋 웃었다.
“모토롤라 계약 건은 수고하셨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사용인이 슬쩍 따라주는 포도주를 음미했다. 그 역시 힐끗 실내 수영장을 즐기는 미녀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도 이지수 박사와 헬렌 비현실적인 몸매에 깜짝 놀랐다. 은밀한 파티였다. 최민혁이 이런 일을 즐기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로서는 두 사람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절세미녀를 보자 괜한 오해를 한 셈이다.
최민혁은 앞으로의 사업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도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오해를 풀어주었다.
“저기 지금 수영장에서 막 나오시는 분은 이지수 박사라고, KMBOOK 경영진입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정보를 제법 알았다. 때문에 요즘 최민혁 실장 주변에서 주목받는 이지수 박사를 모를 수가 없었다.
“아, 설마 저분이 이지수 박사입니까?”
“네. 다행히 이지수 박사에 대해서 아시니 굳이 더 긴말은 필요 없겠군요. 괜한 오해는 마시죠.”
“…알겠습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혀를 내둘렀다. 이지수 박사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저렇게 놀라운 미인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도 저택 저 멀리 보이는 캘리포니아 해안가 모습을 둘러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이 집은 으리으리한 저택인 것을 떠나서 위치가 정말 죽였다.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 땅값이 비싼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까.
실리콘 밸리와 불과 30분 남짓 떨어져 있는 이곳 부동산의 가격은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최민혁도 굳이 그런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320억에 사들였다고 하더군요. 아, 저 개인 돈이 아니라 벨린 투자에서 투자 목적으로 말입니다. 이 정도 저택이라면, 사내 복지로 괜찮은 건물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더 묻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이번에 사들인 저택이 한두 채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거야 투자 수익이 생겼는데,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윳돈으로 이런 대저택을 계속 사들였다는 말씀이군요?”
“캘리포니아 도심에 빌딩도 있고, 뉴욕을 비롯한 미국 주요 도시 건물도 예외는 아닙니다.”
“뭐, 부동산 투자가 나쁜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실장님이라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보다는 간단한 대안이 있지 않습니까?”
“주식 말인가요? 대주주인 입장에서 지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요. 혹시 이번 2조 6천억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건 타이밍이 운 좋게 맞은 경우입니다.”
“그렇습니까?”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굳이 최민혁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가 방금 한 질문은 그저 인사치레로 한 것이니까.
애초에 최민혁은 원래 미국에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중요한 일이 많이 생기자 예정과 달리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덕분에 이곳 미국에서 체류해야 했는데, 벨린 투자는 다행히 최민혁 실장의 지시대로 나오는 부동산 물건을 족족 매입했다.
이곳 초호화 저택 역시 그런 곳 중의 하나였다.
덕분에 최민혁 자신도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점을 느꼈다.
그러니 최민혁의 분위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모른다면 최민혁 실장의 변화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이에 대해 위화감을 느낀 것이었다.
‘유럽에서 만났을 때나 한국에 있을 때는 꽤 쫓기는 사람 같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최민혁의 모습은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그런 모습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지배자다운 모습이었다.
최민혁은 이번 미국에서 장기 체류 과정에서 여유를 얻었고, 덕분에 최문경 부회장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샐로먼 브러더스의 바지사장이 최문경 부회장이라고 봐야겠지?’
물론 최문경 부회장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주도권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차입금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샐로먼 브러더스는 몇 년 안에 몰락하니까.’
최민혁은 그 과정에서 최문경 부회장의 자산이 꽤 많이 날아갔다고 추정했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이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꼼꼼한 면을 배제하더라도 최문경 부회장이 왜 그렇게 느긋하게 행동했나를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이곳 미국에 체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이었다.
‘아직 안심한 타이밍은 아냐.’
최민혁은 자신이 방심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때문에 자신이 지금까지 진행하다가 멈춘 원천기술에 대한 검토와 새로운 특허에 대해서 다시 살폈다.
그 시작이 바로 최영란 본부장이 만들어준 새로운 아이템이었다.
‘MPEG4는 정확히는 몇 년에 확정되는 표준이니, 역시 MPEG-2라고 해야 할까.’
최민혁 자신이야 미래를 알기에 MPEG4, MPEG-2라는 용어를 혼재해서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틀린 표현이다.
지금 당장은 MPEG-2가 정확한 표현이었다.
MPEG-2에 객체 인코딩과 같은 다양한 개념이 추가되면서 MPEG-4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번민을 그가 이전에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MP3가 쉽게 얻을 수 있는 목표여서 얼렁뚱땅 넘어간 것뿐이다.
하지만 최민혁 자신은 전혀 이 MPEG-2 특허를 무시하지 않았다.
당장 위성 특허를 고안할 때 비디오 특허 10가지를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최민혁은 물론 이 특허를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매각하지는 않았다. 핵심적인 원천기술을 다 빼고 넘긴 셈이었다.
‘MPEG-2를 시작하는 기반 원천기술로 나쁘지 않다고 봤지만…….’
당시는 여러 가지 여건이 부족해서 딱 거기서 멈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좀 달랐다.
CMOS 센서 기술이 나온 마당이니 말이다.
“좀 걸으면서 이야기하시죠.”
* * *
최민혁은 대저택 안에 나 있는 소로를 따라서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가 비록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호출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줄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 만난과는 사뭇 다르게 새색시 같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수행원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과거 유럽에서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당당한 모습을 보인 마이클 리트는 이제 아예 최민혁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의 뒤를 따른 수행원들 역시 다들 바짝 긴장했다.
‘확실히 다르네. 설마 2조 6천억 때문에 그래? 아니면 내 자산 때문일까?’
뭐 둘 다일 것이다.
그는 묵묵히 자기 입만 쳐다보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제이미 이사님이 오늘따라 조용하시군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그제야 어깨를 으쓱했다.
“최민혁 실장님의 용건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뭐 일단 모토롤라 계약 건에 대해서 다시 감사 인사부터 드리죠.”
“하하하, 다 돈 받고 하는 일이니,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만만한 대답.
하지만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대응이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차세대로 배터리 계약건.
특히 모토롤라와의 협상을 이끌어낸 이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였다. 그는 배터리 특허료 명분으로 모토롤라 측을 압박했다.
처음에는 미래 기술과 최민혁을 얕잡아보던 모토롤라도 중간에 시즈벨이 끼어 있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역시 중간 대리인으로 시즈벨이 나설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알고 보니 KM 전자 특허료를 관리하는 대리인이 바로 시즈벨이었다.
시즈벨은 덕분에 이번 계약에 끼어서 이익을 꽤 봤지만, 그보다는 영향력을 넓혔다는 점에 더 큰 의의를 두었다.
이번 계약은 단순히 모토롤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핸드폰 업체를 비롯한 글로벌 핸드폰 업체들 역시 이번 일에 있어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일본 업체는 필요하다면 여러 가지 압박까지 하려고 했다. 그들은 도저히 최민혁 실장이 원하는 대로 끌려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미래 기술의 하청 업체가 오성 전자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그들은 오성 전자가 왜 미래 기술의 하청 노릇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성 전자 측에서 OEM식으로 양산해 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서로 윈윈의 거래였을 뿐입니다.”
“오성 전자가 미래 기술의 하청을 받아서 배터리 양산하는 것이 그들이 원해서 했던 거라는 말씀입니까?”
“그게 그렇게 이상합니까?”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는 아는 한국 대기업은 절대로 그런 일을 용인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그 대상이 오성 그룹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면, 손을 잡게 마련입니다. 오성 전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거야 최 실장님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하하하, 설마 오성 그룹이 절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딱히 이 부분도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그랬다면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한번 확인은 해봐야겠어. 오성 전자라면 창피해서라도 그렇게 할 수가 없을 테니 말이야.’
다만 그도 오늘 최민혁 시장의 호출이 차세대 배터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이 배터리 계약은 결국 시즈벨이 다시 떠안았는데, 아직은 여전히 밀당이 진행 중이었다.
최민혁은 딱히 시즈벨이 주도하는 차세대 배터리 로열티 관련 계약을 건드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일본 핸드폰 업체를 건드릴 생각이었다.
“이번 차세대 배터리 계약 관련한 업체 중에는 미쓰비시도 포함되는 것으로 보고받았습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이번 차세대 배터리 계약 실무에는 관심이 없다고 알았으니까.
“미쓰비시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핸드폰 사업에 관한 관심은 다른 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미쓰비시의 경우에 핸드폰 사업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릴 계획이었다. 이들 역시 핸드폰 사업자의 폭발적인 성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향후 5년이라는 장기적인 플랜에 따라서 핸드폰 연구, 양산을 위해서 막대한 투자를 진행할 계획이었다.
KMB-01 차세대 배터리는 그런 연장선 중에 하나였다.
황당한 것은 그들이 이 정보를 알았을 때는 최민혁 실장이 이미 게임을 끝낸 다음이었다.
“하긴 걔들도 지금 일본 경제 상황에서는 새로운 사업에 대한 탐욕을 떨치기는 어렵겠죠.”
일본 정부의 금융 긴축 정책과 총량 규제를 시작으로 일본 신용 경색이 시작되었다. 소위 말하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다양한 경기 부양책이 나오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결국 일본 대기업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쓰비시 역시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이 공장 자동화,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등과 같은 영역에서 세계 최고라고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