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
전략 기획실 직원은 다들 최문경 부회장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물론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오늘 조간신문(?)이었다.
그나마 짬밥이 있는 구길모 차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최문경 부회장에게 다가갔다.
“부, 부회장님.”
최문경 부회장은 화내지 않았다.
“아, 됐어. 장 실장 자리에 있지?!”
구길모 차장은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최문경 부회장 눈치만 봤다.
“이, 있습니다.”
“비켜봐.”
“잠깐 사전에…….”
구길모 차장은 자신이 나서서 장승일 실장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구길모 차장을 밀어내고는 기획 조정 실장실 문을 열고 그냥 들어갔다.
[그래, 그 일은 그대로 진행해. 최영란 본부장이 이미 CCD 카메라에 대해서는 책임질 테니까. 그쪽 연구실에 직접 가서 확인도 해 봐. 우리가 내부 진행 상황은 다 알고 있어야…….]
다행히 장승일 실장은 별다른 일을 하고 있진 않았다. 그저 업무 전화 중이었다. 다만 전화 상대가 상대인 만큼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는 사이 최문경 부회장은 실장실 소파에 풀썩 앉았다. 장승일 실장이 통화하던 모바일 카메라 이야기를 듣고는 피식 웃었다.
“그 모바일 카메라, 진짜 진행하는 거였어?”
“아, 네.”
“문제가 많지 않아? 나도 일부 확인을 해봤는데, 그 기술이 모바일 쪽에 특화된 것은 아니잖아. CCD 센서 기술도 문제가 많은 걸로 아는데?”
실제로 CCD 센서 관련 기술 개발은 다른 대기업에서도 진행 중이었다.
오성 종합 기술원을 비롯한 대기업 연구소에서는 이를 차세대 먹거리로 본 것이었다.
하지만 CCD 센서 기술은 여러 가지 제약이 꽤 있었다.
오히려 CMOS 센서 기술에 더 집중하는 곳도 있었다.
대학 연구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국내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본 역시 이 CCD, CMOS 센서 기술에 막대한 자본을 퍼부었다.
“그게…….”
장승일 실장은 곤혹스러워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뒤늦게 이 기술의 제약을 알았다. 그런데 최영란 본부장을 의식해서 아직 제대로 이사회에 보고하지 않았다.
심지어 최용욱 회장에게도 말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장승일 실장을 조롱했다.
“그거, 숨긴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정 불편하면 내가 아버지에게 말해줄까?”
“괜찮습니다.”
“자신 있어?”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글쎄, 그런 것치고는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아.”
최문경 부회장은 계속 이죽거렸다.
“내 눈치 보지 말고 계속 통화해. 기다릴 테니까.”
뒤따라 들어온 권재홍 비서실장은 말없이 뒤에 조용히 섰다.
장승일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CCD 기술 관련 이야기를 최문경 부회장 앞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부회장님이 잠깐 와서 말이야. 내가 바로 연락할게.]
최문경 부회장은 장승일 실장 태도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1차적으로 확인한 바로는 CCD, CMOS 기술은 아직 상업화하기에는 무리였다.
지난 사장단 회의에서 겉으로 봐서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현실의 난관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장 실장 저놈이 들여다본다면,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어.’
그는 곧 심란한 생각을 털어버렸고, 한영 일보 일면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장 실장, 이거 봤어?”
장승일 기획 조정실 실장은 최문경 부회장 맞은 편에 앉으면서 그가 던진 한영 일보를 넘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네, 기사로 보고 알았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 보안 때문에 최 실장님이 저희 쪽에도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민혁이가 우리 장 실장을 깠네?”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 협상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서 비밀리에 진행된 것뿐입니다.”
“아, 그래도 장 실장에게 이야기는 해줘야 하는 것 아냐? 이번 에플 지분은 KM 전자 소유야. 알고 보면, 실소유주는 민혁이라고 해도 KM 전자는 최 회장님의 영향력을 벗어난 게 아니잖아.”
실제로 KM 전자 지분을 넘긴 사람은 최용욱 회장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최용욱 회장 손자인 만큼 KM 전자가 KM 그룹 계열사인 것은 사실이다.
최민혁도 최문경 부회장을 압박하기 위해서 단호하게 KM 전자가 KM 그룹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가장 큰 증거는 역시 'KM'을 사명에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장승일 실장도 사람인 만큼 기분이 나빠야 한 일이지만 개의치 않았다.
“실장님이 그렇게 한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충신 났네, 충신 났어.”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왜? 내가 그러면 우리 장 실장 계속 칭찬해 줘야 하는 거야?”
“…….”
장승일 실장은 왜 최문경 부회장이 자기를 상대로 꼬장을 부리는지 잘 알았다. 2조 6천억이란 돈은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역시 다른 대기업에 있는 지인에게서 이것과 관련해서 전화를 받았다. ‘부럽다’, ‘죽인다’, ‘장 실장, 출세했네’, ‘장 실장은 인센티브로 한 10억 받는 거야?’란 소리가 무성했다.
사실 이들만이 아니라 기획 조정실 임직원 전부 다 큰 충격을 받았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문제가 된 것은 역시 블록딜 규모였다.
2조 6천억이라니.
저 자금이면 그냥 KM 그룹 자체를 두 배로 키울 수가 있었다.
지금 국내에 돌고 있는 지방 경제 위기 상황을 무시할 수도 있다.
더욱이 KM 그룹 역시 구조조정을 끝낸 후에 사내 유보금을 쌓아놓았다.
지금 KM 그룹 문제는 돈이 너무 넘쳐흐른다는 점이다.
고심하는 장승일 실장 얼굴을 보자 최문경 부회장은 피식 웃었다.
“우리 회장님은 뭐래?”
“차세대 사업 아이템에 대해서 검토하란 지시를 내렸습니다.”
“2조 6천 이야기는 없어?”
“잠깐 언급하기는 했지만 특별한 지시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의아했지만 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이 조카 최민혁을 끼고돈 것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니까.
그는 그래서 신기술 부분을 더 파고들었다.
“투자 수익은 그렇다고 하지. 근데 그 신기술 투자 금액이 일이백 규모는 아니겠지?”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미래 기술 인수 대금이 고작 100억 안팎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지분 10% 가치가 1,000억입니다. 그것도 지금은 이 자금으로 지분을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회장님은 이 부분은 모티브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미래 기술 지분을 챙긴 것은 역시 모토롤라와 오성 전자였다.
이들 기업은 미래 기술 가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지분을 챙긴 것이다.
그런데 다른 기업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굳이 미래 기술 지분을 넘길 이유가 없다.
이런 미래 기술의 상황이 바로 투자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점이다.
최문경 부회장 역시 미래 기술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상황을 따로 보고받았기에 혀를 찼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미래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최민혁 실장님처럼 괜찮은 중소기업이라도 인수하게?”
“…일단은 그 방향으로 검토 중입니다.”
“할 수 있겠어?”
장승일 기획 조정실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변수가 좀 생겼기 때문이다. 최민혁이야 그냥 최영란 본부장을 위해서 던진 기술일 뿐이다.
그런데 실무진의 입장은 달랐다. 이미 회장 보고까지 간 이상 결과를 내야 했다. 특히 최영란 본부장의 측근인 김희수 연구소장은 자신이 직접 뛰어다니면서 상황을 확인했다.
장승일 실장 역시 이런 내막을 알자 자신이 직접 움직여서 기술과 인재를 확인했다.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의 처지에서는 쓸데없는 기술이겠지만 장승일 실장 자신에게는 자신의 입지를 바꿀 만한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
최문경 부회장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도 기획 조정실에 비상이 걸렸다는 것을 안다. 다만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닌 듯한데, 그 역시 그 이상의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그런데 장승일 실장의 태도를 봐서는 분명 뭔가 결과가 있긴 하다는 거다.
그가 아무리 부회장이라도 이럴 때 장승일 실장을 타박할 수만은 없었다.
그 역시 머릿속을 가든 채운 감정을 일단 삼키기로 했다.
“그래.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확인하려는 게 아니야. 우리 잘난 조카의 투자 수익이니까. 내가 잘 이해를 못 해서 그런데, 이번 블록딜은 잔치라도 벌여야 할 일 아냐?”
“KM 전자는 그렇습니다만 KM 그룹에는 큰 영향을 안 미칩니다.”
“그런가?”
최문경 부회장도 피식 웃고 말았다. 이번 블록딜 거래는 확실히 KM 전자와 관련이 있다. 에플 지분을 소유한 곳이 KM 전자이니 말이다.
태반은 벨린 투자가 소유한다고 해도 KM 전자가 소유한 에플 지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가치가 무려 2조 6천억이니 말이다.
“그 똑똑한 장 실장이라면 KM 그룹 계열사를 통해서 에플 지분을 인수하지 그랬어? 민혁이도 완전히 반대만 하지 않았을 텐데…….”
장승일 실장도 솔직히 이 부분의 실책을 인정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에플 주가 가치는 많아 봐야 4달러 정도로 봤습니다.”
“오, 우리 장 실장이 자기 실책을 인정한 거야?”
“…네.”
장승일 실장은 내심 화가 났지만 역시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속으로 분노했지만 이런 장승일 실장의 태도에 김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몇 마디 더 하고 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장 실장, 빨리 가서 일해야지. 지금 회장님이 찾지 않아?”
“…감사합니다.”
장승일 실장은 꾸벅 최문경 부회장에게 인사한 후에 기획 조정실장을 도망치듯이 나가 버렸다.
최문경 부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장 실장이 지금 하는 일을 조사해 봐. 그 CCD인지, GGD인지 하는 거 말이야. 그리고 아버지에게 연락해. 지금 찾아뵙겠다고.”
“…알겠습니다.”
* * *
최용욱 회장 역시 오늘 조간신문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현금 2조 6천억은 무시할 금액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몰래 비자금으로 만들었다면 최민혁을 칭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동네방네 다 퍼뜨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 글로벌 스케일로 일을 벌인 건가.”
이 사건은 자신이 수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젠 정말 손자 최민혁 방파제가 되어 주기 힘들었다.
“대단한 녀석이야.”
찻잔을 가져온 채윤집 집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 실장님은 남다른 곳이 있었습니다.”
“채 집사도 그렇게 생각해?”
“회장님에게 KM 전자 지분을 거래할 때부터 확신했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라.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어.”
“그건 아마 마약 의혹 때문에 검찰에서 수사받고 난 다음일 겁니다.”
“아, 맞아. 그 사건 이후에 사람이 완전히 바뀐 것 같았어.”
“제 생각에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하긴 세상 쓴맛을 봤다면 그래야지. 가만, 그때 담당 검사가 누구라고 했어?”
“박두영 부장검사입니다.”
“아, 맞아. 박 부장검사지. 그 친구에게 신경 좀 써.”
“알겠습니다.”
“가만, 그러면 문경이 이놈이 그냥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최용욱 회장의 예측처럼 대화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사용인 한 사람이 서재에 나타났다.
“부회장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최문경 부회장이 굳이 자신을 찾을 이유는 너무 뻔해서다.
“그래. 뭐 할 말이 있겠지. 오라고 해.”
채윤집 집사 역시 쓰게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에플 투자 이익 때문일 것 같습니다.”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고 하잖아. 현금 2조 6천억이면 벌레가 꼬이게 마련이야.”
그래도 최용욱 회장은 이전처럼 심각하게 손자 최민혁을 걱정하지 않았다.
당장 국세청만 해도 최민혁을 사찰하려다가 걸려서 풍비박산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