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권태성 실장의 눈빛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는 이 배터리를 어떻게 구했는지 묻지는 않았다. 일단 눈앞의 물건이 중요했다.
다만 그 역시 KMB-01의 경악스러운 사양을 보면서 입을 쿡 다물었다.
당장 머릿속에 한 가지를 떠올렸다.
“이 정도면 휴대전화기에도 지금 당장 적용할 수 있는 것 아냐?”
임권수 부장은 아직도 믿기 어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핸드폰 사업부 실무진과 검토를 마쳤습니다. 기존 배터리와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사용 시간이 압도적입니다. 소니 배터리 대비 동일 크기로 4배 이상의 효율을 보입니다.”
단순히 사용 시간만이 아니다. 배터리 에너지 밀도는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 말은 다른 배터리 업체는 논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같은 크기에 배터리 용량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소리다.
그런데 단순히 용량만 큰 것이 아니었다.
임권수 부장은 메드 드로닉 실무진을 만나서 확인한 몇 가지 사실을 보여주었다.
“메드 드로닉 코리아 쪽에서는 최민혁 실장을 대놓고 욕하지만, 제품 완성도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습니다. 이 배터리로 기존 배터리를 대체하면 기존에 있던 문제가 다 사라집니다.”
KMB-01의 완성도는 압도적이었다.
도대체 이런 물건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최민혁 실장이니 그럴 수 있다고 평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최민혁 실장이 설마 배터리 쪽에도 안목이 있을지 몰랐어.”
“단순히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저희 측의 배터리 실무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 최 실장이 외계인을 납치해다가 갈구어서 이런 결과를 냈다고라도 말해?”
임권수 부장은 놀랍게도 진심이었다.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됩니다. 최 실장이 이런 기술을 어떻게 고안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래 기술은 유령 기업일 뿐입니다!”
“그럴지도.”
침까지 튀겨가면서 최민혁 실장 이야기를 하는 임권수 부장의 태도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이에 권태성 실장은 배터리를 이리저리 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조성돈 팀장이 연락을 해왔다고?”
“네. 실무진 선에서 만나서 좀 더 긴밀한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고 합니다.”
“특허 수수료 때문이겠지?”
“네. 필요하다면 오성 전관 쪽에 라이센스를 허가해서 생산까지 할 용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믿어?”
“그걸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니나 베일런스 측에도 똑같은 제안을 했다는 점입니다.”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하늘이 무너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계속 반복되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미래 기술이 껴서 좀 다른 건가?’
“최 실장이 왜 미래 기술을 이용한 것인지는 알았나?”
“아뇨. 아무리 미래 기술을 조사해 봐도 연결 고리가 전혀 없습니다.”
“최 실장의 변덕이란 말이네. 하, 기가 차서. 가만, LC 화학이나 대운 전자 쪽은 조용해?”
“그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조성돈 팀장이 제시하는 금액 때문에 다들 망설이는 눈치입니다.”
“최 실장이 아니라 조성돈 팀장이 그런다고?”
“…아무래도 최민혁 실장이 이미 가이드라인을 잡은 것 같습니다.”
“하.”
권태성 실장은 결국 참다못해서 두통약을 먹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그가 지금 당장 고민하는 것은 이 차세대 배터리 문제만이 아니었다.
우성 건설 파산 이후에 심상치 않은 국내 경제 상황 때문이다.
잠깐은 나아진 것 같아도 그냥 무시하기 힘든 요소가 제법 있었다.
전략 기획실에서도 이 부분은 따로 긴밀하게 조사 중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있을 뿐이지,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많은 경영진은 지방 위기 상황이 너무 과장 되었다고 주장했다.
‘최 실장은 하필이면 이런 시기를 왜 노린 것일까?’
최민혁 실장은 마치 이런 점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결정을 강요하는 눈치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략 기획실 쪽의 실무진 중에 아는 사람은 없나? 그쪽을 통해 자세한 내막을 들은 것은 없어?”
임권수 부장은 당연히 전략 기획실에도 최근 드나들면서 실무진을 꽤 만났다.
그중에 한 사람이 김진석 이사의 측근인 이근익 수석 부장이었다.
“그쪽도 골치 아파서 모른 척하는 눈치입니다. 정부에서 지금 진행하는 금융 기관 통폐합 문제 때문에 선뜻 행동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OECD 가입에 앞서서 금융시장 개방 이야기는 계속 언론을 통해서 나왔다.
다만 롤 모델로 삼은 일본 금융기관이 거품 경제로 인해서 와르르 무너진 덕분에 말이 많았다.
은행 간 합병 문제가 나온 시점이다.
따라서 막대한 부채를 짊어진 한국 대기업은 눈치를 봐야 했다.
그건 오성 그룹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연쇄 도산, 금융권 개혁이 맞물려서 지금 국내 사정이 안 좋았다.
그런 시기에 미래 기술 문제가 터져 나왔으니.
권태성 실장도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무리수를 두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최민혁 실장을 만나서 협상하는 것 역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제 계속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단 최 실장에게 연락해 봐. 이제 더 기다릴 수는 없어. 어떤 형태로든지 방향을 정해야 해. 다만 그쪽에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
“…알겠습니다.”
* * *
최민혁 실장은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권태성 실장이 만나자고 한다는 연락을 받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계속 찔러보기만 하다가 오성 전자가 드디어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전이라면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생각을 좀 바꾸었다. 이제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더욱이 미국 측 반응이 예상한 것과는 좀 달랐다.
‘차라리 이 부분이 더 중요하지.’
애초에 오성 전자를 계속 괴롭힌 것은 최문경 부회장이 국내에서 다른 대기업을 이용해서 헛짓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실제로 계속 압박했기에 그나마 오성 전자가 조용한 것이었다.
만약 오성 전자에게 채운 개 목걸이가 없었다면 벌써 자신에게 미사일을 마구잡이로 쏘았을 테니까.
그런데 오성 전자는 아직도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더욱이 마침 라스베이거스 국제전자 쇼도 코앞이었다.
라스베이거스 전시회는 가전제품 전시회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에플 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이번 전시회를 최대한 이용할 눈치입니다.”
최민혁은 마침 딱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빼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참 도연이 공연은 이야기해 봤습니까?”
“네? 도연이 말입니까?”
“저런, 제가 그 부분은 제대로 말하지 않았군요.”
애초에 MP3 플레이어를 부각하기 위해서 킬러 뮤직 가수로 선택한 이가 바로 송도연이었다.
지금까지는 연습 때문에 내버려 뒀다.
하지만 이제는 움직여야 할 타이밍이었다.
다만 조성돈 팀장도 KMP-02A에 송도연의 노래를 집어넣는 것으로 생각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송도연이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미국 노래입니다. 국내 MP3에 넣어서는 큰 재미를 보기 힘들어요. 어디까지나 MP3 형태의 앨범으로 시도하는 것이니까요.”
“그건 에플 측과 이야기를 해봐야 합니다.”
“스티븐도 딱히 싫어하지는 않을 겁니다. 메이저 음반사와 협상에 성공했다고 해도 최신 노래를 바로 집어넣으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차라리 이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 도연이 상황은 어때요?”
“제가 지난주에 확인한 바로는 문제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좋네요. 일정을 한번 잡아보세요. 에플 쪽과도 다시 이야기를 해보시고요. 아, 스티븐 쪽은 제가 직접 한번 전화해 보죠.”
“…알겠습니다.”
* * *
스티븐은 이번 국제 전자 쇼에서 에플의 차세대 제품 발표회를 계획 중이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전화를 받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은 뜬금없었다.
[최 실장님이 전자 쪽에 전문가란 사실은 압니다. 그런데 음원 쪽은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최 실장님의 능력은 잘 알지만 이미 KMP-02B에 들어갈 노래는 음반사와 협상하고 있습니다.]
[설마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말입니까?]
스티븐은 움찔 몸을 떨었다. 사실 진행이 석연치 않았다.
메인 협상이 끝났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다시 의견 차이가 있었다.
스티븐은 에플에게 있어 최대한 이익이 되는 쪽으로 하려 했고, 메이저 음반사는 자기 이익을 최대한 챙기려고 했다.
두 이익 단체의 의견이 같을 리가 없었다.
메이저 음반사는 주도권 때문에 신곡 탑재를 망설이는 중이었다.
게다가 메이저 음반사와 협상했다고 해도 최신곡이 바로 탑재되는 것은 아니었다.
음원 수익과 관련해서 복잡한 계약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존 음반사는 새로운 미디어인 MP3 플레이어 대해서 비관적이었다.
그들은 자칫 자신들의 이권을 빼앗길 것을 염려했다.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스티븐과 협상에 임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뒀다.
최민혁은 굳이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아도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그가 아는 바로 인생 1회 차에서도 협상이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당한 선에서 우리도 어느 정도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이저 음반사 측과 협상이 자칫 일그러질 수도 있습니다.]
[전 최 실장님 제안에 부정적입니다. 아무리 최 실장님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면 한번 음원을 들어보세요.]
스티븐도 부정적이었지만 최민혁 실장이 보낸 이메일에 포함된 ‘I'll be missing you’를 듣고는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도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이 너무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지만, 곧 이런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노래가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물론 그도 이 노래가 성공할 것이라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최 실장님, 도대체 이 노래를 어떻게 구한 겁니까?]
최민혁은 굳이 진실을 숨기지 않았다.
[제가 직접 작곡했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그럼요. 이미 몇 달 전부터 가수를 섭외해서 계속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작사, 작곡, 편곡한 노래입니다. 그러니 다른 저작권 문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에플 측에서 이를 어떻게 연출할지만 고민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걸 절 보고 믿으란 말입니까?]
[스티븐이 제 말을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음원도 있고, 가수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걸 잘 연출만 하면 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스티븐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다시 이메일을 열어서 음원을 확인했다. 아무리 들어도 노래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음원에 대한 전문적인 평가는 필요했다.
[…확인한 후에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가능하면 빨리 답변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스티븐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충격에 빠졌다가 실무진을 곧 호출했다. 자신이 이제까지 한 노력이 허탈하기만 했던 것이다.
‘설마 최 실장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 편집까지 다 하다니.’
* * *
1,800개 전자 업체가 참가하고, 몰려드는 기자들의 숫자만 무려 9만에 달하는 CES 전시회는 전자 업계라면 무시하기 힘든 행사였다.
스티븐은 바로 전시회에서 기조연설을 맡기로 했다. 그의 복귀와 CES 이해관계가 잘 맞물려서 결정이 난 일이었다.
원래는 블룸버그 회장이 기조연설의 주인공이었는데, 그가 고사하며 스티븐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스티븐은 이 기조연설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는 KMP-02B와 아이컴을 이용해서 변화된 세상을 연출할 계획이었다.
물론 발매는 전시회가 끝나고 이 주 후로 잡았다.
이미 KMP-02와 아이컴의 양산 준비는 끝이 난 상황이었다.
초도 물량은 무려 KMP-02가 5백만 대, 아이컴이 2백만 대였다.
스티븐은 이번 CES 전시회에 승부수를 던진 셈이었다.
다만 그 역시 메이저 음반사와 협상을 하면서 짜증스러웠다.
계약 자체는 이미 끝이 났지만, 음원 종류 가지고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특히 최신곡은 의도적으로 제약을 걸었다.
그렇게 된다면 스티븐 자신이 원한 계획대로 되지 않을 터였다.
이 부분은 계속 문제가 되어서 최민혁 실장에게 도움을 청할까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최민혁은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음원을 준비한 것이었다.
‘I'll be missing you’은 그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