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28화 (628/1,021)

#628.

최민혁은 여전히 냉정했다.

[얼핏 봐서는 손해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성 전자가 지분을 인수했으니, 다른 경쟁업체들 역시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할 테니까. 결국 지분 가치는 더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장님은 오히려 그로 말미암은 이익을 잘 고려해야 할 겁니다.]

무작정 지분을 너무 많이 넘겨도 좋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배종구 사장은 골치가 아팠다. 지금의 상황은 결코 그가 원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모바일 통신 시장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게 그저 단순한 시장 예측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그저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셈이다.

최민혁 실장이 남긴 지분 20%가 작다고 생각했는데, 결코 아니었다.

[…최 실장님은 왜 저에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겁니까?]

[…이전 거래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차원의 거래였을 뿐입니다. 뭐,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전생의 인연 때문이 아닐까요? 전생에서 절 구해주셨을 수도 있으니까.]

[……?]

배종구 사장은 황당해서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오히려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이 오히려 편했다. 특별한 관계가 없다는 점 말이다.

그는 덕분에 최민혁 실장에 대한 선입견을 다 떨쳐냈다.

* * *

최민혁은 굳이 배종구 사장에 대해서 더 손을 써 줄 생각은 없었다. 이미 미래 기술 지분 20%를 남겨준 것만으로도 할 바를 다했다고 봤다.

더욱이 그가 배종구 사장의 지분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권리는 없다.

다만 꼭 이 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권 실장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니까.’

그리고 이 일이 선행되어야 다른 이익 단체도 발 빠르게 움직인다.

그 이후에는 협상하기에도 좋고 말이다.

굳이 자기 지분을 가지고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었다.

다만 권태성 기획실장의 행보를 보면서 차세대 배터리 가치를 다시 생각했다.

더욱이 기획 팀에서 올린 차세대 배터리의 미래 가치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오성 그룹이나 LC 그룹이 나에게 수작을 부리기는 힘들어. 하지만 HY 그룹이나 대운 그룹은 이야기가 좀 다르잖아.’

이들은 KM 전자와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그러니 다른 방법으로 수작을 부려올 수 있었다.

거기에 일본 업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최악의 경우에 한국 정부를 이용해서 압력을 넣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심각한 곳은 역시 미국 정부다. 미국 정부는 차세대 배터리를 선점하기 위해서 국가적으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대상이 바로 베일런스, 벨코어사였다.

그런데 자신이 선수를 친 덕분에 그동안 미국 정부가 그린 큰 그림이 박살이 났다.

이게 썩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는 더욱이 미국 정부가 헤지 펀드를 내세워서 하려는 일이 일본 정부 사냥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굳이 내가 미국 정부에 일본보다 더 찍힐 필요는 없잖아. 차라리 이번 기회에 한 번쯤은 점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혼자 알아서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소통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괜히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아니, 최민혁 자신이 가진 에플, ARN 지분을 생각하면 마냥 무시할 부분도 아니었다.

이 지분의 가치가 커져갈수록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달라질 테니까.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이 아는 미국 지인 한 사람을 떠올렸다.

‘SEC 부국장 조시 로버트라면 대화 상대로 괜찮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락을 해보았다.

그런데 반응이 바로 나왔다.

[오, 최민혁 실장님이군요. 미국에서도 최 실장님의 소식 잘 듣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제가 미국에도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지 몰랐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이쪽저쪽에서 최 실장님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최민혁은 그의 예상 범위를 벗어난 상대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미국 다른 부처를 말하는 겁니까?]

[네. 이번에는 차세대 배터리 이슈를 터뜨렸더군요. 미국 내에 출시된 특허를 확인해 봤는데, 꽤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차세대 배터리에 대한 미국 정부의 관심은 절대 가볍지가 않습니다.]

[그렇군요.]

[차세대 배터리 원천기술을 개발하던 벨코어사에 미국 정부가 막대한 자본을 퍼부었는데, 당장 그 프로젝트가 다 엎어졌습니다.]

[설마 그 일을 제 탓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이번 일로 최 실장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설마 제가 미국 정부의 블랙리스트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최민혁 실장님을 가장 먼저 알아본 저를 미국 국무부 아태 차관보로 임명한 것만 봐도 최민혁 실장님을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쳐다본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렇습니까.]

최민혁은 크게 당황했다. 자신 때문에 조시 로버트가 국무부 아태 차관보로 자리를 옮겼다는 것은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저로서는 최 실장님 덕을 톡톡히 본 셈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서 최민혁 실장님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걸 염려하시기 바랍니다.]

최민혁은 곰곰이 고민했다. 이미 권태성 실장이 미래 기술 지분을 노렸다. 일본 업체라고 해서 조용히 있을 리가 없다. 어쩌면 벌써 한국 정부에 손을 썼을 수도 있다.

지금 같은 상황에 벌레가 끼도록 가만히 놔둘 이유는 없었다.

‘아니,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이번 기회를 이용할 수도 있어. 그렇다면 차라리 미끼를 던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전 차세대 배터리를 혼자 다 먹을 생각이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미국 쪽에도 지분을 일부 넘길 생각입니다. 정확히는 미국 기업이겠지만.]

[호, 그게 정말입니까?]

[어차피 미래 기술만으로 단기간에 배터리 공급 자체를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걸 혼자 다 할 수는 없어요.]

정확히는 IMF를 염두에 둔 결정이다. 차세대 배터리에 미국 정부 지분을 끌어들인다면 달러를 끌어오기에도 한결 수월하다.

특히 IMF 시에 한국 정부의 협박에 대한 보험으로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조시 로버트는 최민혁 실장의 저자세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바로는 최민혁 실장이 굳이 저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영문을 모르겠군.’

하지만 국무부에서 막 업무를 시작하는 입장에서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차세대 배터리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니까.

[…하긴 MP3 플레이어 시장을 보면 최민혁 실장님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지신 것 같더군요.]

[그러면 말하기 편하겠군요.]

[물론입니다. 아, 물론 그 대가에 대해서는 저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전 최민혁 실장님이 대화가 되는 분이라서 참 편합니다.]

[좋네요. 그러면 언제 한번 한국에 오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필요하다면 베일런스나 벨코어사 쪽하고 같이 말이죠.]

[초청이라면 거절하기 힘들겠군요. 제가 한번 내부적으로 따로 이야기를 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생각보다 우려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늦지 않게 연락했다고 생각했다.

손 놓고 있었더라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쌓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시 로버트 아태 차관보라면 중간에 중재를 잘해줄 것이다.

최민혁 실장은 굳이 미국 정부와 대립각을 세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조성돈 팀장을 호출해서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면 이미 미국 정부가 최민혁 실장님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렇겠죠. 에플 지분도 이제는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볼 겁니다.”

“하면 지금 오성 전자의 행보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지켜보죠. 어차피 선택은 미래 기술이 하는 것이니까. 곧 반응을 보일 겁니다. 앞으로 협상이 더 중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새삼 최민혁 실장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그는 설마 미국 정부에까지 손을 쓸 줄은 몰랐다.

* * *

미래 기술의 5% 지분 매각은 전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이미 최민혁 실장과 엮여 있는 일을 할 때 기회를 놓치면 정말 재미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오성 전자 법무 팀과 심지어 오성 그룹 쪽의 인맥까지 동원해서 단숨에 이 거래를 밀어붙였다.

얼마나 빨리 진행되었는지, 언론에서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권태성 기획실장은 잽싸게 언론의 입에도 재갈을 물려서 이 거래를 크게 키우지 않았다. 겨우 기사 한 귀퉁이에 조그마하게 나오게 한 것이었다.

[오성 전자가 미래 기술 지분 5%를 인수하다!]

주당 인수 가격도 나오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도 없었다.

오성 그룹이 얼마나 다른 대기업에 비해서 얼마나 영향력이 큰지 잘 보여주는 결과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빠른 움직임을 보여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임권수 부장은 미래 기술 지분 5% 인수를 끝내고도 여전히 굳어 있는 권태성 실장의 얼굴을 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다른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임 부장은 이미 진행하는 일까지 다 잊은 것 같아.”

그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서, 설마 곧바로 KM 전자의 콜린스 사업부까지 인수하려는 겁니까?”

“…….”

권태성 기획실장은 굳은 얼굴을 한 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임권수 부장만이 아니라 미래 기술 지분 5% 인수 이후에 회의에 참석한 다른 기획 팀장들 역시 긴장했다. 그들도 이런 이야기를 듣기만 했지 그게 지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태성 기획실장도 솔직히 이런 말을 해야 할까 몇 번을 망설였다. 하지만 자기 밥그릇이 달린 이야기니 해줄 필요가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우리 회사가 만약 콜린스 사업부를 품에 안는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져. 당장 해외 영업망을 통해서 TV 사업부 매출을 몇 배나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얼핏 생각하면, 오성 그룹 차원에서 보수적인 결정을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반대였다.

오성 그룹은 놀랍게도 이 혼란 국내 사정을 이용해 콜린스 사업부 인수를 적극 고민 중이었다.

더욱이 이 결정은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콜린스 사업부 자체가 수출 지향형이기 때문이다.

콜린스 사업부 인수는 결국 국내 내수 경기와는 무관할 수 있다는 거다.

“…최 실장이 과연 그 제안을 받을까요?”

권태성 실장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전략 기획실에서 파악한 바로는 사실이라고 결론이 났어. 최민혁 실장은 주로 모바일 쪽에 집중하려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IP 시티폰은 이미 매각했지 않습니까?”

그는 피식 웃었다. 최민혁이 IP 시티폰 사업에서 손을 떼도록 한 세력 중에는 오성 전자 역시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직접적인 방법을 쓰지는 않았다. 유령 모바일 회사를 이용하면 겉으로야 표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CDMA가 남았어.”

“퀄컴 말씀이군요.”

“그래.”

권태성 기획실장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이 문제 때문에 전략 기획실 쪽과 긴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심지어 협조도 해주었다.

그런데 CDMA와 최민혁 실장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최민혁 실장이 가지고 있는 퀄컴 지분 때문이었다.

황당한 것은 형식적으로 이 지분은 현재 벨린 투자가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차라리 KM 전자가 퀄컴 지분을 인수했다면 손이라도 쓸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헛짓하지 않았다면 최민혁도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미 다 지난 일이지.’

“…….”

임권수 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배터리 사업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최민혁 실장이 콜린스 사업부를 매각한다면 이후 대안이 차세대 배터리가 될 수도 있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질질 끈 것도 이런 타이밍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가 공략 대상을 바꾼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최민혁 실장은 부담스러우니, 미래 기술의 배종구 사장이 가진 지분을 노린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보기 좋게 그 전략이 통했다.

다만 최민혁 실장의 지분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아무래도 최 실장이 가진 미래 기술 지분은 팔지 않겠지?”

“아마 그러지 않을까요? 이쪽저쪽에 자꾸 정보를 흘리는 것을 봐서는 경쟁을 부추길 생각 같습니다.”

“하.”

그는 골치가 아팠다. 확실히 최민혁 실장이 가진 미래 기술 지분의 확보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진짜 시제품이 나오기는 한 거야?”

임권수 부장은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가방에서 물건을 꺼냈다.

바로 KMB-01 시제품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