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
이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아도 최민혁 실장이라면 가능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심지어 그 대상 중에는 오성 전자마저 있었다.
범용구 기자는 최민혁의 눈치를 본다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따라온 일행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이 무서워서 최경진 편집장만 쳐다보았다.
최경진 편집장은 자신을 압박하는 자사 기자들을 보면서 화를 내기는커녕 한숨을 내쉬었다.
“최 실장님, 이번 일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이미 다른 언론사에도 이 정보가 흘러가서 곧 기사화가 될 겁니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최 편집장님이 그쪽 언론사 쪽에 연락할 수 있습니까?”
“…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이 일은 그냥 덮기에는 문제가 됩니다.”
“아뇨, 전 이 사건을 덮는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만?”
최경진 편집장은 의아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 실장이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이 독과점 문제는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물론 MP3 플레이어가 시장에 나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이걸로 압박을 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라면 무리수다.
그런데 여론을 이용해서 마녀 사냥을 하려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한국 언론사들이 힘을 합쳐서 KM 전자를 공략할 수도 있었다.
그는 최민혁이 최악의 경우 걷잡을 수 없이 커질지도 모르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생각인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네? 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만약 이 기사가 이대로 나가면 KM 전자에 큰 타격이 될지 모릅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그렇겠죠.”
“네? 하면…….”
“MP3 관련 특허풀을 따로 판매할 계획은 내부적으로 이미 검토를 거쳤습니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각 업체에 특허풀 형태로 해서 MP3 관련 특허를 판매할 생각입니다.”
특허풀(Patent Pool)은 공동 이익을 목적으로 결성하는 단체의 성격을 지닌다. 이해가 서로 겹치는 특허를 가진 회사가 모여서 상호 공유 하는 것이다.
그런데 MP3 관련 특허는 최민혁 실장이 다 보유하고 있었다.
결국 자기가 가진 MP3 특허를 가지고 하나의 풀로 처리하겠다는 의미다.
최경진 편집장이 돌아가는 상황을 금방 알아챘다.
“…KM 전자가 가진 MP3 특허를 한 패키지로 묶어서 팔 생각인 겁니까?”
“그렇죠. 지금 염두에 둔 가격은 30달러 기준인데, 각 업체에 따라서 계약 조건이 달라질 겁니다.”
30달러라니.
원화 700원 기준으로 보면, 21,000원이다.
보통 제조업체 마진이 대당 4% 정도가 기준이며, MP3를 한 대를 25만 원에 판다고 가정하면, 대략 10,000원이 이익이다.
그 이익 대비 무려 2.5배다.
그렇게 되면 업체가 죽어라고 물건 하나를 만들어서 팔 때, 자신이 얻은 이익 대비 2.5배 금액을 KM 전자에게 고스란히 상납해야 한다.
최민혁도 막상 계산을 열심히 해보고서야 이대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흠흠, 당장 돈이 없는 중소기업을 상대로 현금으로 내놓으라고 하는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겁니다. 이 경우는 30만 대 이후에 나온 순이익 중에 일부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최민혁이 내놓은 MP3 특허풀 계약 조건은 조건에 따라서 수백 가지가 넘었다. 런닝 로열티 방식도 있었는데, 그건 업체 사정에 따라서 달랐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처리해서 강압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심지어 적자인 기업은 MP3 특허료를 아예 받지 않았다. 이 경우는 기업 상황이 흑자로 돌아선 이후로 따로 정산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그 특허료 세분화 항목이 너무 많아서 무려 500페이지를 넘었다.
최경진 편집장도 자구 하나하나를 확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지독하구나. 사전에 독과점 문제를 다 대비하고 있었어.’
정확히는 라이센싱 비용 지급과 관련해서 이미 사전 정지 작업을 다 해둔 셈이다.
특허풀 항목 조건을 잘 보면, 당장은 특허료가 0원인 항목도 절대로 공짜는 아니었다.
이 요건 하위 항에 여러 가지 조건이 더덕더덕 붙어 있어서 결국에는 특허료를 어떤 형태로든지 지불해야 했다.
최민혁 실장은 마치 이 기회를 노린 사람처럼 특허료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아, 그리고 각 업체에 따로 연락을 취해서 미팅할 겁니다. MP3 특허료 협상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입니다. 기자들도 그 자리에 부를 테니, 와서 오해가 없도록 해주세요. 괜히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가만히 안 둘 겁니다.”
“…네.”
“진심입니다. 뭐 한영 일보가 알아서 잘하겠다고 했으니, 한번 두고 보죠. 이번 독과점 기사를 허위로 내보내는 언론사는 철저하게 밟아버릴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최경진 편집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는 한영 일보 내에서 일하다가 검찰에 구속되는 꼴은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
‘젠장맞을.’
* * *
최경진 편집장은 최민혁을 만난 후에 한선 일보를 비롯한 대형 언론사에 우선 전화를 걸어서 최민혁의 의사를 밝혔다.
처음에는 그들도 잘 믿지 않았다. 최민혁이 꼼수를 부렸다고 생각했다.
[최 편집장, 요즘 마약 해? 아무리 최민혁 실장이 가볍게 볼 인물이 아니라고 해도 너무하잖아. 기자 근성은 어디에 내팽개친 거야?!]
[그게 어떻게 돌아가느냐 하면…….]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쉽게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행히 인내를 가지고 설명한 덕분에 어느 정도 상대를 설득시킬 수는 있었다.
최경진 편집장은 이에 MP3 특허풀 라이센스 항목 보고서를 각 언론사에 택배로 보냈다.
“…….”
이 물건을 받은 이들은 다들 침묵했다. 그들은 마치 법전처럼 철저하게 되어 있는 MP3 특허풀 라이센스에 혀를 내둘렀다.
얼마나 교묘한지 도저히 특허권 독점으로 비난하기 어려웠다.
KM 전자 역시 MP3 관련 특허를 만들기 위해서 그만큼 시간과 자금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MP3 산업을 고려한다면 최민혁의 제안은 가장 합리적이었다.
이들 메이저 언론사는 결국 부랴부랴 자신이 아는 지인에게 이 사실을 돌렸다.
이제 막 최민혁 실장의 독과점 뉴스를 작성하던 언론사는 다들 관련 기사를 보류했다. 사실 KM 전자에 사실 확인은 해야 하는데, 굳이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MP3 특허풀 보고서에 아주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잘 나와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들도 최민혁 실장의 행위를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특허료 받아먹는 것을 욕할 수는 없어. 하지만 무슨 인간이 이렇게 지독하냐? 설마 이런 식으로 업체 등골을 빼먹으려고 하다니.’
* * *
세한그룹은 오성그룹에서 분리되어서 구오성합섬을 주력으로 운영됐는데, 그룹 매출은 1조 7천억 정도 된다.
재계 순위로만 보면 국내 40위에 오른 기업이다.
이 그룹 사업은 주로 정보, 전략 소재, 생활 서비스가 주였다.
계열사 중의 하나인 세한정보 시스템은 바로 이런 그룹 경영 방침에 따라서 MP3 개발에 착수해서 성공한 셈이다.
KM 전자에 이은 두 번째 개발 성공 사례다.
하지만 MP3 개발에 착수한 기업은 생각보다는 많았다.
특히 MP3가 가지는 강점 때문에 중소기업들도 이 사업에 많이 뛰어들었다.
문제가 있다면 역시 MP3 특허권을 독점한 KM 전자의 태도다.
이전까지만 해도 KM 전자는 이 특허권에 대해서 명확하게 의견을 피력한 적이 없었다.
특허료에 관한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 아이템 개발에 착수한 중소기업은 몸을 떨어야 했다.
언론이 굳이 김현우 수석 부장이 내세운 KM 전자의 시장 독점설에 우려를 표하려던 이유다.
세한정보 시스템의 이양구 수석 부장은 때문에 KM 전자의 연락을 받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에 오기는 했다.
바로 KM 전자의 대강당이다.
‘기분이 안 좋네.’
솔직히 그룹 본사도 아니고, 자신과 무관한 다른 기업이 자신들보고 일방적으로 오라 가라 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강당 안은 이미 MP3 관련 기업 임직원들로 가득했다. 수행원까지 모두 온 덕분에 시장 바닥처럼 시끌시끌하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안 오면 불이익을 감수하라고 한 것일까요?]
[특허료 협상 때문이잖아.]
[설마 일방적으로 특허료를 내놓으라고 할까요?]
[그럴 수도 있지.]
이번 모임에 참석한 임직원들의 표정이 다들 불안으로 가득했다.
최민혁 실장의 악명이 워낙에 자자해서 다들 불안했다.
그들도 이제까지는 카더라 소식을 통해서 들었지만, 국세청 이야기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런데 정말 최민혁 실장이 국세청을 상대로 협박한 것일까요?]
[국세청이 최민혁 실장을 내사한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하잖아. 그러니 최민혁 실장이 그걸 빌미로 국세청을 엿 먹인 거지. 검찰 수사관 50명이 국세청을 뒤집는 장면이 얼마나 황당하던지.]
[하,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어지간한 기업은 국세청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두려워했다.
그런 국세청에 타격을 입힌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러니 최민혁 실장의 초청장을 감히 무시할 배짱을 가진 기업은 흔치 않았다.
아니, 심지어 초청장을 받지 않은 기업도 이 자리에 꽤 나와 있었다.
한 기업당 대략 5~6명 정도가 왔다.
이양구 수석 부장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자 처음과는 달리 몸을 사렸다.
물론 이들 중에는 기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인터뷰하기 바빴다.
MP3 시장 독점에 대한 기업 당사자의 의견을 청취한 것이다.
기자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계속 질문했다.
“한영 일보의 최광수 기자라고 합니다. 혹시 어디서 오신 분인지 알 수가 없을까요?”
이양구 수석 부장은 다른 이들처럼 KM 전자가 두려워서 제대로 의견을 피력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아, 자꾸 이러신다. 어차피 MP3 플레이어 독점 문제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주셔야 우리가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양구 수석 부장 옆에 동행한 강민철 차장이 냉랭하게 말했다.
“거, 할 말이 없다고 하는데, 왜 자꾸 집요하게 이러시는 겁니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됐습니다!!”
두 사람은 기자들과 쉽게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자리에 온 것이 마냥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실상 불안하다는 것이 정확했다.
두 사람의 일방적인 철벽 방어에 최광수 기자는 입맛을 다셨다.
그는 보수적인 엔지니어가 최민혁 실장의 초청장을 받고 이 자리에 나타난 것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최민혁 실장이 이를 의도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자리가 만들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뭐, 자신들 역시 마찬가지다.
최민혁 실장의 노골적인 압박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다.
범용구 기자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최광수 기자의 인터뷰를 막았다.
이미 MP3 관련 특허풀 보고서를 살펴봤기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끔은 최민혁 실장이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저도 공감입니다.”
최광수 기자는 최민혁 실장이 만든 특허풀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검토했다. 그리고 기가 막혀서 한 동안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사태도 최민혁 실장이 사전에 예측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아니, 그래야 말이 됩니다. 어느 정도 MP3 개발 업체가 나와야 특허료 흥정을 시작할 수 있으니까. 시기만 기다린 거죠.”
범용구 기자는 이 모임에 참석한 이들을 둘러보면서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최 실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니까.”
두 사람의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아, 마이크 시험 중입니다. 오늘 초청받고 방문하신 분은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곧 MP3 플레이어와 관련된 발표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이 자리는 더욱 어수선해졌다. 불안감을 느낀 업체는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서 서로 모이기 시작했다.
* * *
김현우 수석 부장은 오성 전자를 대표해서 이 자리에 참석했다. 정확히는 그 혼자만 참석한 것이 아니라 다른 팀과 같이 갔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김현우 수석 부장과는 따로 놀고 있었다.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