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40화 (540/1,021)

#540.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이 없습니다. 아, 그리고, 최명진 회장님이 직접 이번 일은 미안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여론이 너무 악화하여서 어쩔 수 없다고…….”

최문경 부회장은 어이가 없었지만 심각하게 고민했다.

“민혁이 놈은?”

권재홍 비서실장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최민혁 이야기만 들으면 최문경 부회장이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혹시 CT-2 사업을 최훈열 전무님에게 맡길 생각이었습니까?”

“권 실장, 자네 생각은 어때?”

“그건 무리지 않겠습니까. 의사 이야기로는…….”

“내 생각은 좀 달라. 훈열이는 민혁 그 녀석에 대한 원한이 사무칠 거야. 만약 그놈에게 칼자루를 쥐여준다면 최소한 민혁 그놈의 사지 하나는 날려 버리지 않겠어?”

“하, 하지만,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룹에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습니다.”

“알아. 그런데 말이야. 우리 아버지는 이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거야. 그런데 이제는 그 계획도 접어야 할 판국이야. 이것 참.”

최문경 부회장은 허탈해서 한동안 웃고 말았다. 설마 최민혁이 특별사면에 손을 쓸 줄은 몰랐다. 아니, 뒤늦게 자책했다.

‘아니, 그놈이 이 일을 알아챘다면 더 일찍 움직여야 했어. 내가 놈을 너무 쉽게 생각했어.’

사실 경영이나 기술은 최민혁이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법이나 이쪽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제대로 한 방 또 먹은 셈이다.

“…….”

권재홍 비서실장은 스스로 자책하는 최문경 부회장을 보면서 입을 쿡 다물고 말았다.

사실 최문경 부회장의 계획이 나쁘지는 않았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최훈열 전무에게 책임을 떠넘기면 되고, 잘되면 잘되는 대로 중간에 슬쩍 숟가락만 올리면 됐기 때문이다.

“…하면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차라리 지켜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차라리 그게 났겠어.”

최문경 부회장은 다른 대안이 없자 이런저런 다른 고민을 해봤다.

그런데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바로 김현우 수석 부장에 대한 것이다. 그를 통해서 잘만하면 오성 전자 쪽과는 손을 잡을 수도 있었다.

“…참, 일전에 말한 그 돼지가 무엇 때문에 날 만나자고 한 것인지 알아?”

“그게 MP3 관련 안건이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쯧, 그래도 이야기를 들어봤어야지.”

“죄송합니다.”

“한번 연락을 해봐.”

* * *

김현우 수석 부장은 갑자기 권재홍 비서실장의 연락을 받았지만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얼굴에 미소마저 가득 띤 채 최문경 부회장을 만났다.

“부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자네 아버님에게 소식은 제법 들었어. 지금은 오성 전자에 가 있다면서?”

김현우 수석 부장은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처음에는 아예 만나지 않으려다가 갑자기 연락해 온 것이 이상해서다.

다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저도 나이가 있어서 이제는 아버님과 거리 두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좋은 일이야.”

덕담은 잠깐. 어차피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미 KM 그룹을 떠나서 오성맨이 된 지 오래다.

최문경 부회장은 넌지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 때문에 날 만나자고 한 건가?”

“최민혁 실장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글쎄.”

“경영권 승계 때문에 두 사람이 대립하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성 전자로 이직한 제 귀에도 들어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아주 기분이 나빴다. 그는 자기 일을 저 돼지가 알고 있다는 것이 싫었다. 솔직히 자신이 당한 정보를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김현우 수석 부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태도가 바뀐 모습에도 그저 씩 웃었다.

“MP3 플레이어를 개발한 KM 전자의 노력을 무시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KM 전자의 행보는 선을 넘었습니다. 이 MP3 플레이어 시장 자체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MP3 플레이어 시장의 100%를 장악한 곳이 바로 KM 전자였다.

비록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도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막 시작한 산업이라서 독과점으로 몰기에는 무리가 있어. 이 문제를 이슈화시키면, 민혁이 그놈이 그걸 그냥 둘 리가 없어. 아마 한국 언론사를 다 동원해서 선동질하고도 남을 테니까.”

“하지만 벌써 MP3를 개발한 업체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업체는 특허 때문에 여기서 접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여기 있습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이 내놓은 것은 하나의 보고서였다. 뜻밖에도 오성 전자의 MP3가 아니었다.

“세한정보?”

세한그룹의 계열사 중의 하나인 세한정보시스템에서 MP3 플레이어를 개발했는데, KMP-01에 비해서는 다소 격이 떨어지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초소형인 것은 맞다. 비록 16MB라는 작은 메모리 용량 때문에 KMP-01과 경쟁해서 싸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 세한정보에서 개발한 MP맨에 대해서 말했다.

“지금도 전국 대리점에서 문의 전화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미국 업체에서도 수출 계약을 타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설마 KM 전자와 MP3 관련 특허권 협상이 되지 않은 건가?”

“네, 제가 파악한 바로는 무조건 기다려 달라고 답만 한다고 합니다. 이게 소위 말하면 특허를 이용해서 중소기업을 고사시키는 악랄한 행위 아닙니까.”

꼭 그렇지도 않았다.

최민혁 실장은 생각보다 아주 바쁘다. CDMA 서비스 사업에 손을 댄 이후에 CT-2 공작까지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민혁의 시선은 정확히 최문경 부회장에게 가 있었다.

그러니 세한정보의 MP3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녔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흥미로운 눈길로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보고서를 살피고 나서는 혀를 내둘렀다.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황은 잘 모르겠지만, KM 전자에서 실수한 것이 맞습니다.”

“그렇지?”

최문경 부회장 역시 무릎을 쳤다. 다만 김현우 수석 부장이 왜 이런 문건을 자신에게 가져와서 내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어. 이미 KM 전자를 떠난 자네가 왜 이런 일을 나에게 제안하는 건가?”

김현우 수석 부장의 눈빛이 그제야 달라졌다.

“우리 오성 전자 역시 MP3 플레이어를 개발 중입니다. 그런데 KM 전자 때문에 여러 가지 손해를 봐야 합니다. 따라서 밖에서는 우리가 공격하고, 안에서는 최문경 부회장님이 최민혁 실장을 압박한다면 서로 윈윈이 아니겠습니까?”

“윈윈이라…….”

최문경 부회장도 처음에는 이 제안이 솔깃했다. 계략에 능한 그는 김현우 수석 부장 배후에 권태성 기획실장이 있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아니지. 민혁 그놈이 부담스러울 테니까. 그래서 이 돼지를 앞세운 건가?’

“…알겠네. 이번 제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해서 자네에게 알려주지.”

“알겠습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자신이 한 제안에 대한 그 어떤 보상도 원하지 않은 채 바로 사무실을 떠났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 행동이 오히려 미심찍었다.

“저 돼지가 왜 저러는 것 같아?”

권재홍 비서실장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김현우 수석 부장이 오성 전자 내에서 아슬아슬하다고 합니다. 오성 전자를 상대로 소송까지 벌인 것에 비하면 잘 버티는 편이긴 한데, 이미 사내에서 악명이 자자합니다. 살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에 매달린 것 같습니다.”

“설마 이번 일을 이용해서 오성 전자 내에 영향력이라도 키우겠다는 건가?”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권태성 기획실장이라면 후일 보복의 소지가 많은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습니다. 만약 최민혁 실장이 열받으면, 오성 전자를 상대로 가장 먼저 행패를 부릴 겁니다. 하지만 김 수석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기고 잘라 버리면 됩니다.”

“하긴 그놈이라면 그보다 더한 짓을 할 테니. 그래, 뭐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언론사 쪽을 만나서 한번 이야기를 해봐. 아니, 이 건은 세한정보만 해당되는 게 아닐 거야. 다른 업체도 있을 테니, 그쪽하고 이야기를 해봐. 그들 처지에서 KM 전자는 최악의 상대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KM 전자를 초갑질 기업으로 몰아가. 중소기업 등골을 빠는 기업으로 말이야!”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지시를 받고도 씁쓸한 얼굴을 감추고 말았다. KM 그룹이 과거에 했던 일이 이런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 * *

권재홍 비서실장은 김현우 수석 부장의 ‘독과점 논쟁’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다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국세청이 최민혁 실장의 스트레이트 한 방에 녹아웃이 된 후에 언론사도 몸을 사렸다.

특히 한영 일보의 최경진 편집장은 이 정보를 듣기가 무섭게 범용구 기자, 최광수 기자를 데리고 최민혁 실장을 직접 찾아갔다.

물론 인터뷰라는 명분이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말입니다.”

“쓸데없는 가식은 집어치우시죠.”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까지 당신네 언론사가 한 일이 있는데, 제가 당신들을 믿을 거로 생각합니까?”

“이걸 보고 말씀하시죠.”

최민혁은 최경진 편집장이 얻은 ‘독과점 논쟁’ 이슈와 관련된 보고서를 읽었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최경진 편집장은 그런 최민혁의 얼굴을 보면서 계속 눈치를 봤다.

최민혁이 과연 이 일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오히려 웃기만 했다.

“우리 KM 전자를 독과점으로 몰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이건 기사와 관련해서 단순히 정보를 취합한 것입니다. 다른 언론사에서도 이 정보를 얻은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기사를 쓰기 전에 귀띔을 한 것이다?”

“아니, 실장님이 기사를 내지 말라면, 우리 언론사는 입을 다물겠습니다.”

“한영 일보치고는 반응이 이상하군요.”

하지만 최경진 편집장은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봤다. 그는 최민혁이 최근 국세청을 상대로 벌인 활극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제2의 언론사 강상혁 조사국장이 될 후보자는 자신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우리 한영 일보는 결코 최민혁 실장님과 척을 질 생각이 없습니다.”

“흠.”

최민혁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한껏 허리를 숙인 한영 일보 편집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결국 조성돈 팀장을 불렀다.

뒤늦게야 호출받아서 온 조성돈 팀장은 독과점 관련 보고서를 보고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독과점 문제에 대한 대비책은 이미 준비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다만 굳이 먼저 그 일을 처리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슈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했다.

시기만을 노리고 있었다.

다만 최민혁도 MP3 플레이어 개발 기업 목차를 확인하면서 혀를 찼다.

‘설마 세한정보가 MP3 MP맨을 벌써 개발했다니.’

그가 아는 인생 1회 차에 비해서 무려 3년이나 앞당겨진 일이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HY 전자가 디코드 칩을 개발했다니.’

이 사건 역시 3년 후에 일어날 일이다. 그리고 HY 그룹이 이상할 정도로 KM 전자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도 드러난 셈이다.

한국 기업 정서라면 KMP-01을 베낀 MP3 플레이어를 개발해서 그대로 판매를 시작했을 것이다.

특허를 베끼는 일은 적당히 소송을 이용해서 질질 끌면 되니까.

문제는 그 대상이 악명이 자자한 KM 전자란 점이다.

하지만 워낙에 베끼는 일이 일상이 된 한국 기업이라서 일단 저지르고 보려고 했다.

그런 차에 터진 사건이 바로 강상혁 조사국장이 수갑을 찬 채 끌려나온 일이었다.

다들 쉬쉬하는데, 어지간한 찌라시만 봐도 이 일의 배후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결국 업체는 MP3 플레이어를 개발해 놓고도 최민혁 실장이 무서워서 전전긍긍했다. 그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미국 수출에 제동이 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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