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542화 (542/1,021)

#542.

아예 왕따를 당한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다시 주도권 일부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 정도 수모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최민혁 실장이 고맙기만 했다. 그의 악명 때문에 권태성 실장이 최민혁 실장에게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되었어.’

그는 이보다 주변을 계속 둘러보았다. 그중에 발견한 기업은 바로 세한정보시스템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MP3를 개발한 업체였다.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양구 수석 부장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오성 전자의 김현우 수석 부장이라고 합니다.”

이양구 수석 부장도 상대가 오성 전자 직원이라는 것을 알자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네? 아, 세한정보시스템의 이양구 수석 부장입니다.”

“세한이라면 남이 아닙니다.”

실제로 세한 그룹은 오성 그룹에서 분리된 그룹이다. 두 기업이 남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렇다고 사이가 좋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서로 소 닭 보듯이 하니까.

다만 이양구 수석 부장은 안 그래도 정보의 부재를 느끼고 있었기에 김현우 수석 부장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 그는 가벼운 인사와 더불어서 푸념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오성 전자 쪽에서도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을 봐서는 내부적으로 MP3 플레이어를 개발합니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MP3 플레이어 시장이 계속 커지는 중인데, 누가 모른 척하겠습니까.”

실제로 KMP-01은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소비자의 기호는 다양하다. 이 KMP-01를 무조건 좋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성비가 높은 제품을 원하는 소비자도 꽤 많았다.

이런 수요를 고려하면 MP3 플레이어 시장은 매년 커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국내가 아니라 국외 수요다.

따라서 MP3 시장은 해가 더해갈수록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업체들이 뒤늦게 너도 나도 MP3 시장에 끼어든 것이다.

“미국만 해도 냅스트의 인기 때문에 MP3에 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세한정보시스템도 그 정도는 알기에 무리해서 개발 일정을 당겼을 겁니다.”

“아니라고 말은 못 하겠네요.”

이양구 수석 부장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세한정보시스템 안문원 본부장의 압박 때문에 3개월 동안 미친 듯이 일한 기억을 새삼 떠올렸다.

그때는 주말에도 나와야 했다.

프로젝트 일정이 늘어지면, 갖은 욕설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겨우 결실을 맺고 나니, 전혀 엉뚱한 장벽이 놓여 있었다.

바로 MP3 관련 원천기술이었다.

세한정보시스템 기획실이 모두 힘을 합쳐보았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들 역시 MP3 특허를 쉽게 생각했다. 관행적으로 적당히 베낀 후에 소송으로 어떻게 끌면 쉽게 해결될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했다.

물론 실무진 선에서 강한 우려를 보냈지만, 윗선에서 아예 무시한 것이다.

덕분에 이양구 수석 부장은 이 부분 때문에 독박을 써야 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양구 수석 부장의 표정을 살폈는데, 몇 마디 대화를 섞으면서 상대의 분위기를 알았다. 그는 득의 어린 미소를 지었다. 잘만 하면 이양구 수석 부장이 이 MP3 플레이어 공동 전선 대상자로 나쁜 선택이 아닐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이대로 KM 전자의 독주에 당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힘을 합쳐서라도 우리 권리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됩니다!”

안다.

이양구 수석 부장 역시 MP3 특허 로열티 때문에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막상 만들어놓고 보니, 전부 KM 전자의 특허권을 침해했다. 도대체 특허료를 얼마나 내놓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영업 팀은 똥오줌을 못 가리고 난리다.

하루에 연락이 오는 바이어 숫자가 열 명이 넘는다고 침을 튀겨가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특허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KM 전자가 이 사실을 안다면, 특허료를 일방적으로 올릴 수 있다.

그런데 최악의 경우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

실상 KM 전자가 가진 MP3 특허는 그만큼 광범위하고, 질적으로 수준이 높았다. 실상 핵심 특허는 원래 대부분 독일이나 프랑스 기업 소유였으니.

‘도대체 언제 그 특허를 죄다 끌어모아서 사들인 것일까?’

이양구 수석 부장은 팀장 회의 때에 이 내막을 뒤늦게 안 안문원 본부장이 짓던 황당한 표정을 떠올리고는 쓰게 웃고 말았다.

그는 힐끗 불안한 얼굴로 다른 기업 참석자들을 살폈다. 그들 역시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태도는 달랐다. 최근 최민혁 실장이 국세청하고 대거리하면서 보여준 행보에 다들 질린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무리수를 뒀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양구 수석 부장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질문했다.

“…혹시 오성 전자에서는 다른 대안이라도 있는 겁니까?”

“저희라고 별수 있습니까. 하지만 세한정보에서 도와준다면 상황이 다릅니다. 법적으로 어렵다면 여론전을 펼치면 됩니다. KM 전자가 중소기업의 등골이 휠 정도로 피를 빠는 이미지가 돼버린다면 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겁니다!”

“글쎄요.”

생뚱맞은 소리에 이양구 수석 부장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중소기업 등골 브레이커라면, 가장 악명이 자자한 기업이 바로 눈앞의 오성 전자이니까 말이다.

그는 결국 김현우 수석 부장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기만 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으로서는 짜증스러웠다. 그가 아무리 떠들어도 이양구 수석 부장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 잠깐만요. 이번 일은 힘을 합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이양구 수석 부장은 집착남 김현우 수석 부장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미 세한정보에서 개발한 MP3 플레이어가 다른 회사 제품보다는 질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들었다. 때문에 그는 이양구 수석 부장에게 계속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양구 수석 부장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김현우 수석 부장과 거리를 뒀다. 덕분에 다른 기업도 수상쩍은 김현우 수석 부장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

김현우 수석 부장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이 정말 왕따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때마침 최민혁 실장이 KM 전자 직원들을 거느린 채 단상에 나타났다.

덕분에 주변을 얼쩡거리던 기자들도 우르르 단상 앞으로 몰려갔다.

이양구 수석 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KM 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하시죠?”

“…알겠습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시작부터 자신이 의도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웠다. 기자들 분위기도 자신의 예측과는 달랐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단단히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자신이 의도한 바대로 제대로 된 기사를 내보낼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굳이 이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절대로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불행히도 김현우 수석 부장에 대한 주변 시선은 그의 기대치와는 많이 달랐다.

그 자신은 KM 전자 임직원이 아니라 오성 전자 직원이라는 사실을 가볍게 생각한 대가였다.

* * *

김현우 수석 부장의 기대와는 달리 최민혁 실장은 단상 위에 오르기가 무섭게 강당에 모인 기업 임직원을 대상으로 강짜를 부리거나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신 이 자리에 모인 기자들을 상대로 협박을 시작했다.

[오늘 미팅은 MP3 플레이어 시장 발전을 위해 마련한 건전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되지도 않는 가짜 뉴스를 남발해서 분탕질을 일삼는 언론사가 있다면, 그에 대해선 제가 갖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

막 손을 들어서 최민혁 실장에게 질문하려던 기자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조 단위 재산을 가진 최민혁 실장이 국세청을 상대로 보여준 보복은 강렬했다.

최민혁의 보복이 꼭 언론사를 상대로 한다고 해서 그 정도가 약해질 것 같진 않았다.

당장 300-400억이란 돈을 로펌에 퍼부어서 법적인 공방을 벌여가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언론사 숨통은 막아버릴 테니까.

실로 황당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최민혁 실장의 소문을 놓고 본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국세청을 상대로 한 보복을 진짜 행동으로 옮긴 최민혁 실장을 천문학적인 돈을 가진 미친놈이라 봤다.

물론 최민혁 실장이 언론의 자유마저 침해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한영 일보를 비롯한 몇몇 요주의 언론사 기자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된통 당한 경험이 있는 범용구 기자의 안색은 검게 변해버렸다.

[공익을 위한 목적의 기사라면 환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가짜 뉴스로 우리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것까지 그대로 둘 생각은 없습니다!]

최민혁 실장의 경고는 제대로 먹혔다.

말이 아니라 이미 행동으로 보여줬으니까.

어수선해진 대강당에는 그저 침묵만이 감돌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만족한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제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안 좋은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입니다. 언론사에서도 계속 문의를 하는데, 그 질문에 일일이 따로 대답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그 의문을 일시에 풀기 위함입니다.]

그나마 최민혁 실장과 꽤 오래 알고 지낸 범용구 기자가 슬쩍 질문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도와주었다.

[실장님, 하면 이 자리는 MP3 플레이어 독점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자리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범용구 기자의 태도에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이곳에 모인 이들을 고려해서 참았다.

그가 그러다가 본 것은 다름 아닌 김현우 수석 부장이었다.

그는 슬쩍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있다가 그만 최민혁 실장과 시선을 부딪치고 만 것이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마치 경기 들린 환자처럼 앞사람 뒤에 몸을 숨겼다.

그는 김현우 수석 부장에게 분노보다는 오히려 감탄하고 말았다.

‘흠, 왜 이런 자리에 나온 것일까. 가만, 이번 일도 저 인간 짓일까? 그럴 수도 있어. 진짜 집요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와서 딱히 김현우 수석 부장을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MP3 독점 문제, 아니, 특허료 문제는 어느 정도 손을 쓰긴 해야 했다. 그동안 실상 타이밍만 계속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늦은 감이 있지. 스티븐이 이미 KMP-02B 개발을 본격화했으니.’

KMP-02B는 에플에서 진행하고 있는 KMP-02의 수정된 모델이다.

기존 모델이 KMP-02A였고, 에플에서 변경한 모델이 바로 KMP-02B다.

최민혁도 대략적인 보고만 들었을 뿐인지 아직 실물은 보지 못했다. 디자인적으로 변화가 있다고는 하는데, 큰 차이는 없다고 들었다.

‘소프트웨어가 특히 많이 변경되었다고 하니까.’

스티븐이 손을 대면서 기존의 KMP-02에서 소프트웨어 부분에 큰 변화가 있었다. 원래는 세세한 부분에서 자잘한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스티븐이 부족한 부분을 다 메꾸었다.

그건 최민혁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경우엔 기존 모델이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티븐은 KMP-02A를 토대로 해서 기존 모델 내부를 대대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굳이 MP3 플레이어 전용인 제품만 필요한가란 의문이 생겨왔다.

그러다 보니 개략적인 보고서에 다음 차기작 모델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단순한 의문이었다.

아직 CDMA 상업화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민혁은 자신이 건드린 CDMA 상업화 때문에 이 사업이 자신이 아는 인생 1회 차와는 달리 빠르게 진행된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로서는 이제는 기술 가속화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MP3 플레이어 시장을 계획보다 좀 더 빨리 키울 필요가 존재했다.

‘지금은 MP3 시장을 좀 더 빨리 키워야 해. 그래야 CDMA와 속도를 맞출 수 있으니까.’

최민혁은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구상을 끝내자 목소리를 높였다.

[한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납니다. 저 역시 이런 시장 독점을 옹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제껏 개발한 기술을 무상으로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타협안을 내놓을 생각입니다.]

최민혁 실장이 단상 옆으로 물러나자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MP3 특허풀과 관련된 특허료 산정에 대한 보고서다.

구체적인 액수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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