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
“하면 이 기회를 이용해서 국세청에 제 사람을 깔라는 말입니까?”
“그래. 내가 듣기로 이동빈 자산과세 국장을 조사했다더구나. 차라리 그를 조사국장으로 승진시키는 것이 훨씬 나아. 그건 내가 알아서 손을 써볼 수가 있다.”
국세청 조사국장은 요직 중의 요직이다. 최용욱 회장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아직 국세청 내에 자기 측근이 없는 최민혁 처지에서 말이다.
물론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국세청 직원 전체가 너에게 반감을 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너의 영향력을 충분히 보여줬으니 지금은 아군 숫자를 키워가. 그다음에 다음 단계로 넘어갈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 중재는 내가 하마. 그렇게 더러운 일은 나 같은 늙은이가 하는 것이 맞아. 민혁아, 넌 네 일을 해라.”
“…알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씩 웃고 말았다. 그 역시 자신의 능력 한계를 잘 알았다. 괜히 긁어서 문제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주적은 국세청이 아니라 최문경 부회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이동빈 자산과세 국장을 일단 조사국장으로 승진시켜 주세요. 그걸 보고 나서 국세청 태도를 판단하겠습니다!”
“…알겠다.”
최용욱 회장은 이 일에도 절차가 필요해서 시간이 걸릴 거라고 변명하려다가 입을 쿡 다문 고집스러운 손자 최민혁의 얼굴을 보자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 * *
조사국장 자리를 둘러싼 국세청 내부 혼란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심해졌다. 잘 만하면 자기 파벌 사람을 넣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이 끼어들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임광준 국세청 차장은 최용욱 회장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는 제2의 강상혁 조사국장이 또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염려했다.
최민혁 실장에게 뜨거운 맛을 보고서야 상대가 누구란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결국 최민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안건을 국세청장을 통해서 보고했다.
약간의 불협화음은 있었다.
아니, 국세청장을 비롯한 국세청의 실세들은 길길이 날뛰었다.
위에도 보고해야 하는데, 그 문제도 간단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가진 패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강상혁 조사국장 구속에 따른 공석을 메꾼다는 명분으로 여러 명의 후보를 주먹구구식으로 후보 명단에 올렸다.
언론에도 다급하게 알려서 조사국장 임명에 있어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점을 피력했다.
그 후보 중에는 이동빈 자산과세 국장도 있었다.
그는 다른 후보에 비해서 경력, 평판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동빈 자산과세 국장이 뜬금없이 조사국장에 임명된 것이다.
이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이동빈 자산과세 국장 그 자신이었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진행된 조사국장 승차 소식을 전해 듣고는 영문을 몰랐다.
아침에 출근해서 회의 준비를 하는데, 갑작스럽게 이 소식을 들은 것이다.
“내가 국세청 조사국장이라고?”
윤종신 소비세 과장이 굳은 얼굴을 한 채 그에게 이번 승차에 대해서 말했다.
“축하합니다.”
“하,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어.”
임종건 감사관은 국세청 내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귓속말로 말했다.
“최민혁 실장이 국장님을 밀어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 진짜야?”
“이번 일을 조용히 덮고 가기 위해서 협상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최민혁 실장이 왜 국장님을 밀어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란 질문은 하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지금의 돌아가는 상황을 모른다면 바보다.
그는 수상쩍은 시선으로 이동빈 국장을 쳐다보았다.
임종건 감사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번 일로 국세청이 최민혁 실장에게 숙이고 들어간 같았기 때문이다. 이미 알음알음 이 정보가 알려진 것은 임광준 국세청 차장이 정보를 흘린 거라고 봐야 했다.
국세청 내의 임직원들에게 최민혁 실장과 반목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실상 정부 내에서도 정보 통신부를 중심으로 최민혁 실장에게 호감을 느낀 이들이 많았다. 정부가 최민혁 실장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러니 윗선의 높은 양반들도 몸을 사린 것이다.
윤종신 소비세 과장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저도 아는 지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동빈 자산과세 국장은 어이가 없었다. 그가 최민혁 실장과 손을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보답받을지는 몰랐다.
그는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달리는 말에 올라탄 격이다. 자신의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옷을 벗지 않을 거라면 계속 달려야 했다.
“두 사람이 앞으로 많이 도와줘.”
“…저희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두 사람은 스스로 말해놓고도 자존심이 상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방법이 없었다.
“그래.”
세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리에서 멈추는 순간에 오히려 국세청 내의 다른 세력에게 공격을 당할 테니 말이다.
이제는 최민혁 실장이란 황금 동아줄을 잡고, 앞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최민혁 실장은 무리한 요구를 할 사람은 아니니.’
* * *
최민혁은 자신의 제안에 따른 결과가 불과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실행된 것을 보고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조사국장 자리가 이렇게 쉬운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실상 이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정부 내에서는 이를 두고 복잡한 정치 역학 문제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이가 조사국장 자리를 둘러싸고 불법이 있었다고 언론에 제보했다.
그런데 언론에서도 이 안건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하고 말았다.
최민혁은 이 이야기를 한영 일보 최경진 편집장에게서 전화로 알았다. 그는 오히려 이런 소식을 듣고 나서 불쾌했다.
[뭘 하자는 겁니까?]
최경진 편집장은 딱히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우리 한영 일보는 실장님과 계속 반목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번 정보는 우리 한영 일보의 호의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쪽에 호의를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것 아닙니까. 지난 일은 잊고 앞으로 잘 좀 지냈으면 합니다.]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내기 싫은 최경진 편집장은 딱 이걸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퍽이나, 네놈들이 잘도 그러겠다.’
최민혁은 한영 일보를 시작으로 다른 언론사에서도 줄줄이 연락이 오자 혀를 내둘렀다.
이 모든 일이 강상혁 조사국장을 퇴출시킨 후에 이동빈 자산과세 국장을 조사국장으로 임명시키고 나서 얻은 결과이니까.
이른바 권력이다.
김명준 과장은 오히려 피식 웃었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데요?”
“그거야 실장님이 국세청 조사국장을 날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지 않습니까. 이런 파격적인 행동을 한 적은 없으니까요.”
“제가 그랬나요?”
“네, 그리고 이 일은 최용욱 회장님 말처럼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국세청도 딱히 실장님을 구속하거나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압력을 줄 의도였을 겁니다. 이대로 계속 가면 원래 의도와는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
애초에 국세청이 이번 내사를 진행한 것은 단순한 찔러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최소한 이번 일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의 약점은 드러날 것이라 봤다.
그 정보가 중요했다.
그게 있어야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본격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까.
지금처럼 최민혁 실장과 끝장을 보자고 싸울 의도는 아니었다.
곰곰이 이 상황을 생각해 본 최민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 첫째 큰아버지 보복 때문에 한 일이군요. 가만, 그러면 우리 부회장님 동향은 어때요? 뭐라도 반응을 보이나요?”
“비서실을 총동원하는 것을 봐서는 아직 결심을 내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가요? 한 번 더 확인을 해보세요. 만약 그래도 변화가 없다면, 좀 더 자극을 줘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아, 이렇게 하죠.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한영 일보를 이용해서 우리 둘째 큰아버지 특별 사면 소식을 흘려보세요.”
“네?”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 봐서는 검찰이 항소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질질 끈 1심으로 끝낼 것 아닙니까. 딱 그 타이밍에 맞추어서 특별 사면 대상자에 올리겠다는 건데, 이게 말이 됩니까?!”
“…네.”
* * *
최문경 부회장은 CT-2 사업에 대해서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데 그 역시 지금까지 조카 최민혁에 당한 것을 잊지 않아서 이 사업을 신중하게 살폈다.
흥미로운 것은 최용욱 회장의 반응이다. 그는 CT-2 신사업에 대해서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그 역시 CT-2가 아쉽지만, 여전히 망설였다.
이미 CDMA 서비스에 대한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차에 CT-2까지 손을 댄다면 외부 이해집단이 반발할 것을 염려했다.
특히 이번 국세청과의 갈등 과정에서 적지 않은 적이 드러난 것이 문제다.
이제는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 때문에 CT-2 서비스에도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느낀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결국 최문경 부회장은 최용욱 회장이 침묵하자 CT-2를 둘러싼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다른 대안을 찾았다.
일테면 이 사업이 잘못되더라도 자신은 피해가 오지 말아야 했다.
‘KD LCD와는 또 다르니까.’
처음에는 DL 그룹을 염두에 뒀다가 곧 생각을 바꾸고 말았다.
CT-2가 만약 성공한다면 자신을 노리는 고양이 입에 생선을 들이미는 경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국 차선을 선택했다.
“훈열이는 어때?”
권재홍 비서실장이 크게 당황해서 최문경 부회장 눈치를 봤다.
“그게 좀…….”
최문경 부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문제가 생긴 건가?”
“…이게 문제입니다.”
그가 내놓은 것은 오늘자 한영 일보를 비롯한 언론사 신문이었다.
[특별사면은 재벌가 봐주기용 이벤트인가?]
기사는 주로 이번 특별사면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콕 집어서 지적한 인물은 다름 아닌 최훈열 전무였다.
이제 1심이 확정된 인물을 특별사면으로 빼주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이야기를 지면 반에 걸쳐서 다루었다.
[담당 검사가 1심으로 사건을 종결하고 끝내는 것은 흔치 않다. 이 말은 곧 담당 검사와 형량을 거래했다는 의미다.]
이런저런 다양한 분석 내용은 꽤 현실성이 높은 글이었다.
실제로 과거 그랬으니까.
다만 최훈열 전무 재판 경우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내년 특별사면이라면 이해가 될 일이지만 올해는 아니었던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분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이, 이게 도대체 뭐야? 아니, 어떤 새끼가 소금을 뿌린 거야?!!”
권재홍 비서실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한영 일보 측에 알아봤는데, 이미 다른 언론사에도 같은 시간에 제보가 들어가서 자신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최훈열 전무를 둘러싼 사면 이야기는 갑자기 나온 것이었다.
다만 한영 일보가 과연 출처를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뒤늦게야 이 일에 최민혁 실장이 관여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 일에 훼방을 놓을 사람은 최민혁 실장밖에 없었다.
그는 너무 큰 스트레스를 받아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
결국 권재홍 비서실장 도움을 받아서 소파에 앉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 상태는 어때?”
“…상황이 안 좋습니다.”
“정신병이 악화한 거야?”
“네, 갑자기 사면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고는 상태가 더 안 좋아졌습니다. 결국, 구치소에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담당 의사 이야기는 뭐래?”
“담당 의사 이야기로는 지금 당장은 충격을 받아서 상태가 악화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대답만 들었습니다.”오후 8:14 2021-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