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
그가 놀란 것은 강상혁 조사국장이 해외 쪽으로 빼돌린 돈의 출처에 관한 정보 때문이다. 특히 미국 내에 있는 자산에 대한 것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게 공개되면 아무리 법원이라도 국세청을 끼고돌기 어려워진다.
설사 정치권이라도 마찬가지다.
설령 판사를 매수한다고 해도 강상혁 조사국장이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증거가 너무 명확하고, 구체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수 중앙지검장도 이번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잠깐 더 고민하기는 했다. 물론 고민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법원에서 구속영장을 직접 받아낼 테니, 자네는 가서 움직일 준비를 해. 최민혁 실장 제안대로 일단 최대한 인력을 모아서 한 번에 몰아쳐. 그렇지 않으면 국세청에서 반격해 올 테니까. 괜히 제삼자가 끼어들 여지를 주면 문제가 복잡해질 거야. 그때는 나도 어떻게 할 대안이 없어.”
“…알겠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가볍게 묵례를 한 후에 중앙지검장실을 나섰다. 하지만 그는 나가기 직전 힐끗, 조정수 중앙지검장의 표정이 평온한 것을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최민혁 실장을 단단히 신뢰하는 것 같구나.’
* * *
강상혁 조사국장은 조세 회피처, 역외 계좌를 이용한 탈세를 비롯하여 불법 대부업자, 연예인 탈세 적발까지 광범위한 실적을 남긴 인물이다.
서울 국세청, 중부 국세청 주요 과장을 두루 거쳤고, 전형적인 외유내강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국세청 안팎에서도 호평이 쏟아지는 인물이다.
특히 역외 탈세에 대한 전문가로, 국세청 내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다만 안 좋은 이야기도 있다. 특히 대기업과 유착되었다는 것과 관련해서 말이다.
게다가 그 역시 최명진 회장과 제법 잘 아는 사이였다.
이번 최민혁 실장 내사는 사실 이미 국세청 내에서 꾸준하게 준비해 오던 일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최명진 회장이 부탁하니 마지못한 척 일을 진행한 거다.
즉, 애초에 이 일은 최명진 회장 때문에 진행한 것 아니었다.
처음부터 최민혁 실장을 작정하고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일은 한 번으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의 자산 형성 과정에서 불법적인 항목을 찾아내면, 그것을 발판 삼아서 본격적으로 공략을 할 셈이었다.
그럼 결국 그 과정에서 최민혁 실장은 많은 돈을 토해 내야 할 것이다.
이들이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번 일을 이용해서 눈엣가시 같은 이동빈 국장을 쳐낼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이 국장이 최민혁 실장 내사를 종결했다고?”
최종철 조사기획과 과장은 강상혁 조사국장의 눈치를 봤다. 로봇처럼 감정이 없어서 얼마나 성격이 섬뜩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네, 최민혁 실장의 검토 자료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자 이제까지 한 내사 자료를 모두 다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로서는 황당한 대답이다.
“…정말인가?”
“최민혁 실장 관련 조사 과정에서 불법적인 안건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향후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판단해서 자료를 다 삭제했습니다.”
결국 최종철 조사기획과 과장도 이번 일로 이동빈 국장을 깰 수가 없었다. 물론 잔소리는 좀 했지만 말이다. 딱 거기서 끝냈다.
다만 신기한 것은 이동빈 국장의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강상형 조사국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최근에 만난 이동빈 국장은 그때까지도 내막을 잘 모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 역시 이동빈 국장에게 강요할 수는 없었다. 이번 내사에는 자신도 간접적으로 엮여 있기 때문이었다.
최민혁 실장 내사는 원칙적으로는 불법이지만 여러 가지 제보를 받았기에 합법으로 볼 수도 있다.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경우다.
최근 국세청에서 한 조사는 그런 측면에서 진행된 일이다.
문제는 예상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에서 그 어떤 불법 행위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최악의 경우가 된 것이다.
이 일을 지시한 국세청 윗선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봤다. 만약 이 일이 잘못되면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구속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강상혁 조사국장은 애매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만, 그러면 최민혁 실장이 정말 이제까지 단 한 번의 불법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말이잖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최종철 과장은 요약된 보고서를 힐끗 살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KM 그룹 대주주인 최두진 사장과 지분을 거래한 부분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최두진 사장과 만나서 이야기를 해봤는데, 최두진 사장 본인은 정당한 거래였다고 합니다.”
“…설마 최두진 사장이 최민혁 실장에게 겁을 집어먹은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다시 사들인 KM 전자 지분 때문에 초대박을 쳤고, 이번에 에플 지분으로 다시 추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최민혁 실장에게 호감을 느낀 눈치였습니다.”
“…아니, 얼마나 벌었기에 과거 일까지 다 덮어버린 거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부 조사 결과로는 수천억은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하.”
강상혁 조사국장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황만 보면 분명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1,500원에 넘긴 주식이 무려 40만 원을 돌파했으니 말이다.
그 주식으로 다시 에플에 투자해서 대박을 터뜨렸다는 소리였다.
결국 본인이 정당한 거래였다고 하니 그걸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최민혁 실장의 과거 재산 형성 과정을 보면 대부분이 다 그런 경우라는 것이다.
아닌 경우가 몇몇 있기는 하지만, 그 부분도 철저하게 손을 써놔서 문제 삼기는 어려웠다. 결국 그걸로 꼬투리 삼을 수는 없었다.
대표적인 이가 바로 DL 전자 김용만 전무의 장남 김기범이었다. 그는 자신이 투자한 돈으로 초대박을 터뜨린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데 이 경우도 문제 삼기에는 곤란했다. 계약대로 했기 때문이었다.
강상혁 조사국장은 이런 일이 처음이기에 크게 당황했다.
그런데 최종철이 갑자기 울린 핸드폰을 받더니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 그게 정말이야?”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빨리 가서 뉴스를 한 번 보십시오!]
강상혁 조사국장은 영문을 몰라서 최종철 과장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최종철 과장은 강상혁 조사국장 손을 잡고는 후다닥 TV가 있는 휴게실로 뛰어갔다.
휴게실 안에 모여서 쉬고 있는 수십 명의 국세청 직원은 멍하니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큰 충격을 받아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직원도 있었다.
[이번 서안 유통 임직원이 폭로한 사실로는, 작년 4월,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간부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온 것은 녹취록.
[조중국 사장님, 제 제안에만 따르면, 역외 탈세에 대한 혐의는 없을 겁니다. 대신 저도 보험이 필요합니다. 강은택을 서안 유통 이사로 스카우트하세요.]
[만약 그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특별 세무조사에 들어가겠죠. 아마 역외 탈세를 떠나서 횡령만으로도 조 사장님은 몇 년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 겁니다.]
[국세청 고위직에 있는 분이 지금 절보고 협박하는 겁니까?!]
[아, 왜 이러실까. 세상이 어떤지 잘 아시는 분이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제 제안을 받으세요. 그리고 회사를 성장시키고, 그 파이를 나누기만 하면 됩니다. 아니면 지금 당장 감옥에 가든지!]
녹취록 목소리가 자신이라는 것을 금방 안 강상혁 조사국장은 패닉에 빠져서 넋을 잃고 말았다.
휴게실에 있는 국세청 직원 중에 뒤늦게 강상혁 조사국장을 발견한 이가 옆의 동료를 툭툭 건드렸다. 결국, 다른 이들도 전부 강상혁 조사국장을 쳐다보았다.
“저거 강 국장님 목소리 맞지?”
“설마 저분이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 믿을 수가 없네. 말은 점잖게 하는데, 그 내용이 흉악하기 짝이 없잖아.”
강상혁 조사국장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휴게실을 후다닥 나섰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을 향해서 허겁지겁 뛰었다.
휴게실에 있는 국세청 직원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 *
최민혁 실장은 박두영 부장검사에게서 국세청 압수수색영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할 수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압수수색영장이 이렇게 빨린 나온 경우도 드물었다.
하지만 법원에서 이를 막기에는 역외 탈세를 통한 규모가 너무 큰 것도 있지만, 제출된 증거가 너무 구체적이었다. 특히 빼돌린 미국 자산이 문제였다.
이러니 법원도 영장 발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증거 인멸과 도주의 우려 때문이다.
최민혁은 자신이 만든 이 막장 드라마의 에피소드 전개를 미리 떠올렸다. 이대로 그냥 덮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이번 일을 시도한 우리 첫째 큰아버지에게의 경고도 필요했다.
그는 결국 최영란 이사의 정황부터 살폈다.
다행히 예상대로 최영란은 KM 산업 본부장으로 진급했다.
AD 설계 내부적으로 큰 반발은 없었다. 최영란이 KM 산업 본부장으로 진급해서 그렇다기보다는 KM 산업의 9% 지분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AD 설계 임직원들은 KM 산업 안에서 안정적인 자본과 인력 풀을 수혈받을 수 있는 기반을 얻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최민혁은 최영란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승진 축하 파티를 하자고 제안했다.
[알았어.]
그는 약속을 정하기가 무섭게 김명준 과장에게 지시해서 최문경 부회장에게 최해진 본부장과 최영란 본부장이 오붓한 저녁 파티를 벌인다는 정보를 흘렸다.
이 자리에서 KM 산업과 한부 그룹 사이에 긴밀한 거래가 있을 것이라는 역정보까지 뿌렸다.
특히 최해진 본부장이 KM 산업 지분을 얻은 최영란을 밀어줘서 최문경 부회장을 끌어내릴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덧붙였다.
이게 얼마나 그럴듯했던지 듣고 있던 김명준 과장이 반문했다.
“…정말입니까?”
“아, 이런 우리 김 과장님마저 속으면 어떻게 합니까. 하긴, 적을 속이기 전에 아군부터 먼저 속이란 말이 있기는 하죠.”
“…아니었군요.”
“개연성이 높지 않습니까. 아버지에게 복수하려는 장녀가 연인과 손을 잡고 반격하는 시나리오죠. 캬, 이건 진짜 대박 드라마입니다.”
“…개연성이 없습니다.”
“김 과장님은 유머 코드가 부족합니다.”
“…….”
김명준 과장은 더 최민혁의 농담을 받아주고 싶지 않아서 자리를 비웠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이러면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절대로 그냥 두지 않겠지?’
그다음은 약속 시각을 국세청 압수수색 시간보다 조금 당겼다.
거기에 약속 장소에 반드시 대형 TV가 있어야 했다.
불행히도 분위기가 괜찮은 호텔 라운지 중에는 미니 영화관 수준의 대형 TV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은 김명준 과장에게 지시해서 임시로 호텔 내부에 대형 TV를 설치하게끔 지시했다.
대신 갑질을 처음 하는 김명준 과장이 중간에 마음고생을 좀 했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우리 첫째 큰아버지를 극도로 자극할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하는 쇼이니, 문제가 없도록 해주세요. 특히 타이밍이 맞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첫째 큰아버지가 실수할 확률이 높습니다. 한부 그룹까지 끌어들여서 사고를 치도록 유도할 수도 있고요.”
“다른 계획이 있으시군요.”
“뭐,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최민혁은 굳이 이 자리에서 아직 진행되지 않은 계획까진 말하지 않았다.
* * *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지 않던가.
약속 장소로 정한 그랜드 호텔은 꽤 유명했지만, 최민혁 실장의 갑질에 가까운 다양한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그랜드 호텔은 뜬금없는 대형 TV를 설치해야만 했다.
최민혁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껏 멋을 부린 최영란 본부장이 와 있었다. 그녀는 최해진 본부장 문제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 그녀도 호텔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TV에 혀를 찼다.
“도대체 저게 왜 저기 있는 줄 모르겠어. 이 호텔에는 TV가 없던 것으로 아는데…….”
“뭐, 영란 누나를 축하해 주려고 한 것이 아닐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니면 네가 누나 승진 축하 기념으로 서비스했다고 생각해?”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