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
하지만 조사국장은 좀 다르다.
따라서 이 자리는 대기업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다.
지금 그런 이를 수사하라니.
박두영 부장검사도 조정수 중앙지검장이라는 든든한 방패가 없다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은 마치 이런 자신의 처지를 잘 아는 듯 무리한 제안을 해온 것이었다.
물론 이게 다가 아니었다.
“아, 이왕이면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대규모 수사 인원을 동원해서 큰 이슈거리를 만들어주면 좋습니다. 압수 수색 타이밍에 맞추어서 언론 쪽은 제가 알아서 손을 쓰죠.”
최민혁은 자신의 구체적인 제안에 허탈하게 웃는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툴툴거렸다.
“녹취록을 비롯한 명확한 증거가 그렇게 많은데, 감당하기 힘듭니까?”
“아, 아닙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여전히 굳은 안색을 떨치지 못했다.
최민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뭔가 다른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 정도 사건은 정치적인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중앙지검장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아, 사전작업이 필요하다는 말이군요. 필요하다면 제 이름을 파세요. 어차피 중앙지검장님은 한번 만나고 싶었으니까.”
실상 이 말은 이 순간에 처음 나온 말이 아니다.
최민혁 실장은 처음부터 박두영 부장검사가 어떤 식으로 성장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후일 검찰총장이 되는 조정수 중앙지검장을 염두에 두고 박두영 부장검사와 안면을 터온 것이다.
“으음.”
그러니 박두영 부장검사는 최민혁 실장의 부담스러운 제안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런저런 고민을 해봤는데, 따지고 보면 조정수 중앙지검장도 최민혁 실장에게 꽤 관심이 많은 상태였다.
‘돈 때문이겠지. 정확히는 돈이 되는 정보 때문일 거야. 그분은 후일 문제가 될 돈이나 금은 좋아하지 않지만, 뒤탈이 없는 정보는 좋아해. 더욱이 최민혁 실장이 밀어준다면 위로 올라가기에도 부담이 없을 테니까.’
거기다 최민혁 실장은 필요하다면 그 정도 정보는 얼마든지 넘길 사람이었다.
바로 자신이 그 수혜를 받았다. 덕분에 늘어난 자산은 평생 검사만 해서는 만질 수 없는 돈이다. 지금도 에플 주식에 손을 대서 재미를 보고 있다. 물론 계속 들고 있을 생각이다.
다만 그는 최민혁 실장과 과거 검사와 피의자로 만난 관계 이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실상 그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놀라울 정도로 변해갔던 것이다.
“…혹시 이런 상황까지 전부 예측하신 겁니까?”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점쟁이가 아닌데, 이런 상황까지 알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저 박두영 부장검사님은 믿을 만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반자가 되기에 나쁜 파트너는 아니니까요.”
“그렇습니까?”
최민혁은 감정이 없는 눈으로 박두영 부장검사를 쳐다보았다.
“믿을 만한 분이 아니었다면 이런 거래는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가슴 한구석이 움직이는 것을 바로 떨쳐냈다. 그는 이상한 분위기를 피하고자 대화 주제를 이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조정수 중앙지검장님은 폭등하기 전의 에플 주식과 같은 정보를 원할 겁니다.”
“아, 그런 정보요. 이왕이면 지금 말하죠. 에플 주식을 사놓으세요. 지금이 4달러 내외이니, 계속 조정장을 거치면 3달러 후반대까지 떨어질 겁니다. 그때마다 매집하면 될 겁니다.”
“네? 하지만 에플 주가는 이미 많이 올랐지 않습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김명준 과장에게 손짓했다. 김명준 과장은 눈치껏 서류철에서 최근 에플에게서 받은 프로젝트 현황을 내밀었다.
그는 서류를 줄 것처럼 하다가 슬그머니 품에 안은 후에 툴툴거렸다.
“이 자료를 넘겨줄 수는 없고, 이 자리에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
박두영 부장검사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영문을 몰랐지만, 보고서에 나와 있는 ‘KMP-02’와 ‘아이컴’에 대한 자료를 읽으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티븐이 최근 수정한 디자인이 적용된 두 가지 제품은 기존의 다른 제품과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미래지향적인 제품이었다.
KMP-02와 아이컴의 시너지 효과는 더 논하기 힘들 정도였다.
거기에 진짜는 바로 아이컴에 사용된 맥OS였다.
최민혁은 딱 한 가지만 말해주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아이컴의 OS는 윈도우95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OS입니다. 아마 이 제품이 출시되면, 윈도 95 판매량도 주춤할 겁니다. 더욱이 KMP-02는 KMP-01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기능이 발전했는데, 가격은 똑같습니다. 미국 내의 판매량은 최소한 천만 대 이상일 겁니다.”
그런 기술 쪽을 잘 모르는 박두영 부장검사는 이를 듣고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맙소사. 이, 이게 가능합니까?!”
그는 보고서 뒤를 넘기서 구체적으로 하나둘씩 찍어주었다.
“쉽지는 않은 일이죠. 여기에 들어간 기술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4~5년에 걸친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결실이니까.”
“…하면 에플의 예상 주가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는 보수적인 예측을 이야기했다.
“단기로 볼 때는 70~80달러. 장기적으로는 최소 100달러? 아니, 적어도 120달러는 돌파할 겁니다. 물론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3달러 기준이라면…….”
이미 벌어들인 수익으로 1달러 초반에 구입한 에플 주식. 4달러로 뛴 것도 초대박이라고 생각하던 박두영 부장검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최민혁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다만 이 일은 절대 비밀입니다. 뭐, 안다고 해서 믿을 만한 이는 아무도 없겠지요. 더욱이 미국 나스닥에서 일어나는 주가 변동인데, 설마 금감원에서 시비를 걸겠습니까마는 괜한 의심은 받기 싫으니까요.”
“끙, 알겠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도 결국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정보가 딱 조정수 중앙지검장이 좋아하는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떠나는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넌지시 한마디 더 해주었다.
“이번 정보는 조정수 중앙지검장님 때문에 특별히 제공해 주는 겁니다. 말 좀 잘 전해주세요.”
낚싯배에 내려온 박두영 부장검사는 힐끗, 요트 위에 서 있는 최민혁 실장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낚싯배가 출발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겠습니까?”
“누구 말입니까. 박두영 부장검사 말입니까? 아니면 조정수 중앙지검장 말입니까?”
“둘 다입니다. 그 두 사람을 너무 일방적으로 믿는 것 같습니다.”
최민혁은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두 사람은 결코 저를 배신할 사람들이 아니니까.”
“…설마 돈 때문이라는 말씀입니까?”
그가 믿는 건 두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집착하는 물건이다.
“정확히는 돈 되는 정보 때문이죠. 저 정보는 뒤탈이 없으니까.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절대로 제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제삼자가 안다고 해서 문제 삼을 수도 없습니다.”
“…설마 그게 조정수 중앙지검장이 원하는 거란 말입니까?”
“네.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탐관오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루한 꼰대 기질의 관료도 아닙니다. 적당히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죠. 능력도 탁월합니다. 아니, 검찰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성향이기에 박두영 부장검사를 키운 겁니다.”
“…하지만 중앙지검장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안목도 있어요. 그는 결국 대검을 거쳐서 검찰총장까지 갈 겁니다.”
“…….”
김명준 과장은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처럼 미래를 예지하는 최민혁 실장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가 이제까지 경험한 바로는 최민혁 실장이 하는 말은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소리일까?’
당연히 질문은 하지 않았다.
웃고 있는 최민혁은 마치 김명준 과장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할까 대기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감입니다!’이렇게 말이다.
“…….”
떫은 감을 씹은 듯해서 김명준 과장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 * *
서울 중앙지검이 힘이 있는 조직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국세청 역시 만만한 조직은 아니다.
아무리 중앙지검장이라고 해도 국세청의 핵심 요직 중의 하나인 강상혁 조사국장을 무시하기는 아주 힘들었다.
강상혁 조사국장은 곧 서울국세청장을 거쳐서 국세청장에 오른다는 이야기가 파다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미래의 국세청장을 수사해야 하는 일인데, 어지간한 증거로는 힘들다.
그런데 박두영 부장검사가 가져온 증거는 그 어지간한 수준을 뛰어넘었다.
보고 체계까지 건너띈 보고에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침묵했다.
그는 자료를 꼼꼼하게 읽으면서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 자료는 어떻게 구한 건가?”
박두영 부장검사는 씩 웃었다.
“그걸 꼭 아셔야 합니까?”
“그래. 이건 나도 부담스러운 일이야. 명확하지 않으면 일을 진행하기 힘들어. 설마 윗선에서 날 찍어 누를 수도 있다는 걸 간과하지는 않았겠지?”
싸늘한 말투에도 박두영 부장검사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다른 검사들이 조정수 중앙지검장만 보면 벌벌 떠는 것과는 다른 태도였다.
“그래도 그 정도 증거면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지 않고서야 자네가 이런 식으로 날 찾지는 않을 테니까.”
“일단 한 번 더 살펴보시지요.”
사실 그로서는 좋아해야 할 일이다.
전임 중앙지검장이 갑작스러운 일로 물러나면서 이 자리에 올 때는 짜증도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다.
딱 이 사건 하나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두영 부장검사가 처음 태도와는 달리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넌지시 질문했다.
“괜찮겠습니까?”
“무슨 말이 그래?”
“아무리 그래도 국세청 조사국장입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문제가 복잡해질 겁니다.”
“오락가락하네. 도대체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박두영 부장검사의 걱정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 국세청은 칼자루를 휘두르는 조직이었다.
그들은 중앙지검을 상대로 얼마든지 보복도 할 수가 있다.
꼭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친족이나 외가 쪽을 노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피식 웃었다.
“우리 집안이 꽤 힘이 있어. 굳이 국세청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지. 더욱이 이런 불법적인 일을 묵인하란 말이야?”
자신만만한 조정수 중앙지검장의 태도에 박두영 부장검사는 씩 웃고 말았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적절한 수준에서 수위 조절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소심하기 짝이 없는 박두영 부장검사의 태도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봐, 박 부장검사, 자네는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이 이걸 중간보고 라인을 무시하고 나에게 직접 들고 와서 보고한 거야?”
박두영 부장검사는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가 보고 체계를 무시한 것은 이 정보가 괜히 외부로 누설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할 말도 있었다.
그는 넌지시 최민혁 실장에게서 들은 에플 주식 관련 정보를 보고했다. 물론 이 정보의 출처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라. 과연 대단하군. 그러면 내가 들은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라는 소리겠어. 하긴, 최용욱 회장의 일방적인 지시만으로 그만한 업적을 만들기는 어렵지.”
“…믿으시는 겁니까?”
“자네는 KMP-01를 사용해 보기는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면 콜린스를 봤어? 그걸 사용해 봤다면 그런 소리를 못 할 거야. 다른 대기업과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달라. 이건 종이 틀린 거야. 얼마든지 초월종이 될 수 있는 역량이니까.”
“…죄송합니다.”
“쯧.”
조정수 중앙지검장은 혀를 찼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한 채 고민했다. 일을 진행하기 전에 한 가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이 일을 부탁한 것은 역시 보복 차원이겠지?”
“이동빈 자산과세 국장이 최민혁 실장 내사를 했다고 하지만 지시를 받고 한 일입니다. 최상위층의 지시를 받아 배후에서 이를 통제한 이가 바로 강상혁 조사국장입니다. 그래서 최민혁 실장이 본보기를 보이려고 한 것 같습니다. 가장 강한 강도로 말입니다.”
“대단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