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
“권력을 가진 공무원은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국세청이라도 최민혁 실장님에게 대들기는…….”
“절 노린 이가 강은택 이사의 조카인 강상혁 조사국장입니다.”
“저, 정말입니까?”
조중국 사장은 입을 딱 벌렸다. 그가 몇 번 만난 강상혁 조사국장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혈한이었다.
그가 강은택을 이사로 끌어들인 것도 다 강상혁 조사국장의 제안 때문이었다.
역외 탈세가 들통이 난 후에 협박을 받았는데, 적당히 무마하는 대가로 강은택을 이사로 앉힌 것이다.
덕분에 세무조사를 피할 수가 있었다.
아니, 오히려 국세청의 눈을 피한 덕분에 서안 유통이 그 동안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에는 도저히 강은택 이사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퇴출했다.
업체에 뇌물을 받으면서 불량 물품을 눈감아줬기 때문이다.
협력업체에서는 난리를 쳤다. 그들 역시 불량 품목 때문에 소비자에게 단단히 깨졌기 때문이다.
그 손실이 제법 컸다.
조중국 사장이 가까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했지만 큰 타격을 받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기업의 신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내막을 안 조중국 사장은 더는 최민혁 실장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이 한 제안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 가만, 그렇다면… 음, 정말 저희 쪽에 피해가 오지 않는 것이겠죠?”
최민혁은 인생 1회 차에서 이번 일 때문에 서안 유통이 어려워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행이라면 조중국 사장처럼 당한 한 제보자에 의해서 이 내막이 어느 정도 밝혀진다는 거다.
‘그때는 물론 서안 유통이 파산한 이후지만.’
“어차피 모든 범죄는 강은택 이사의 손을 거친 것 아닙니까. 더욱이 필요하다면 KM 전자 공장 내의 생산 물량 중에서 하자 때문에 누락된 콜린스 물량을 공급할 의향도 있습니다. 서안 유통에게 꽤 매력적인 물건일 겁니다.”
조중국 사장은 최민혁 실장이 적극 도와주겠다는 말에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목이 부러지도록 아래위로 흔들었다.
“무, 물론이죠. 하, 하겠습니다. 까짓것 이렇게 된 바에 한번 끝장을 보겠습니다!”
최민혁은 이미 인생 1회 차 때 본 뉴스를 통해 몇 가지 사안을 파악했다. 다만 그가 굳이 그것을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좋네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강은택 이사나 강상혁 조사국장과 관련해서 불법적인 증거물이 있습니까? 녹취록이면 더 좋습니다.”
사실 그가 진짜로 원하는 건 이거다.
제보자의 소송은 처음에는 쉽게 풀리지 않았는데, 조중국 사장이 녹취록을 재판 과정에서 폭로하고 나서야 상황이 변했던 것이다.
조중국 사장은 최민혁의 말을 듣자 이번에는 귀신을 만난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녹취록은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그, 그걸 어떻게?”
“감이죠. 사장님 정도 되는 분이 아무런 보험도 없이 그 인간들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강은택 이사를 잘랐지 않습니까? 대안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있습니다.”
“그게 좀 필요합니다.”
“후유, 잠깐만요.”
그는 슬쩍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다시 봤다. 만약을 대비해서 모아놓은 증거는 중요한 보험이다. 자칫하면 서안 유통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다만 문득 최민혁 실장에 대한 찌라시가 떠올랐다. 특히 최훈열 전무를 감방으로 보낸 일이 말이다. 최민혁 실장은 보기와는 달리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뒤늦게야 왜 최민혁 실장 같은 인물이 굳이 서안 유통까지 찾아와서 자신을 직접 만난 것인지 그 이유를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부디 이번 일로 문제가 없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강상혁 조사국장은 조 사장님에게 뭔가를 하긴커녕 국세청에서도 조용히 사라질 겁니다. 그러니 그 이후 일은 걱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더욱이 조 사장님과 관련해서는 수사 제보도 있고, 정상 참작을 한다면 이번 건은 집행유예 정도로 끝이 날 겁니다.”
‘그 정도는 내가 해줄 수도 있지.’
“…알겠습니다.”
조중국 사장은 그제야 주섬주섬 사무실을 나가서 사내 금고 안에 든 물건을 찾았다.
최민혁은 좀 기다렸다가 조중국 사장에게서 녹취록은 물론 여기에 덤으로 강은택 이사가 한 범죄의 증거 서류까지 받은 후에 서안 유통을 빠져나왔다.
“…….”
김명준 과장은 새삼 최민혁의 수법에 놀라서 그의 뒤를 따르면서 힐끗힐끗 쳐다보기만 했다. 물론 최근 서안 유통 관련된 이야기가 언론에 나오기는 나왔다. 다만 그 일이 수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일인지는 상상조차 못 했다.
조사한 자신도 그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 특히 조중국 사장 혼자 아는 비밀은 자기 재주가 아무리 좋아도 알기 불가능했던 것이다.
‘저건 또 어떻게 안 것일까?’
최민혁에게 질문할까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한테서 만능 변명인 ‘감이죠!’란 말을 들을까 싶어서 굳이 하지 않았다.
* * *
박두영 부장검사는 갑작스러운 최민혁의 연락을 받고는 어이가 없었다.
휴가를 내서 인천항으로 오라는 연락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도 무시할까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과의 관계는 이미 손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제 중앙지검장으로 자리를 잡은 조정수 중앙지검장이 넌지시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계속 묻는다는 것이다.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이다.
최민혁 실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한번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꾸준히 요구했다.
두 사람은 인내를 가진 채 서로 만나기만을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조정수 중앙지검장이 뇌물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굳이 그렇게 추후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뇌물 따위를 박두영 부장검사처럼 받을 생각이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을 원했다.
일테면 KM 전자 주식처럼 돈이 되는 정보를 말이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결국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아서 일단 휴가를 냈다. 그는 인천항에 도착한 후 낚싯배로 요트에까지 도착했다.
환한 대낮이기는 하지만 수려한 요트의 모습은 군계일학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50인승에 가까운 덩치의 요트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가끔 보이는 게 있으면 최민혁 실장의 경호원들이었다.
배 승무원들은 배 안에 들어가서 아예 나오지를 않았다.
주변에는 그 흔한 고깃배 하나 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파파라치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설령 있다 해도 그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잠수함에 타고 있지 않은 이상에야 말이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헛웃음을 짓은 채 요트에 오르기가 무섭게 최민혁 실장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날이 발전하시는 것 같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글쎄요. 운만으로 보기에는 좀 그렇죠. IT 쪽을 잘 모르는 저도 퀄컴 인수에는 꽤 놀랐습니다.”
“그건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제까지의 모든 일은 어쩌다가 진행된 겁니까?”
까칠한 박두영 부장검사의 지적에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일을 하다 보면, 딱 이거다 싶을 때가 있어요. 에플 측과의 협상 때문에 미국에 가서 일하다가 퀄컴 상황을 안 거죠. 그래서 무리수를 던져서 인수한 겁니다.”
“…사전에 어느 정도 그림을 그렸겠지요?”
“하하하, 이거 박두영 부장검사님의 눈을 피하기 어렵네요.”
박두영 부장검사는 너스레를 떠는 최민혁 실장을 잠깐 살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중앙지검에서 최민혁 실장을 처음 봤을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최민혁 실장의 변화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그로서는 아직도 최민혁 실장에 대한 것이 잘 믿기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늘 조용한 날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제가 듣기로 이번에는 국세청하고도 요즘 대거리한다고요?”
“어?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최민혁 실장이 요트 한쪽에 꾸며 놓은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요리가 늘어서 있었다.
소위 말하는 캐비어부터 시작해서 가격을 짐작하기 어려운 요리가 가득했다.
“먹으면서 이야기하시죠.”
“알겠습니다.”
요리를 음미하는 박두영 부장검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요리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아니, 자신이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최고의 요리였다.
얼마나 맛있는지 용건조차 다 잊을 정도였다.
그는 가까스로 숨을 돌리고 난 후에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국세청에서 남부지검 쪽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담당자가 바로 제 대학 후배입니다.”
정확히는 남부지검 박상희 부부장검사였다. 그는 박두영 부장검사의 부탁 때문에 직접 자원해서 끼어든 것이었다.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생길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최민혁은 박두영 부장검사가 하는 말의 의미를 대충 이해했다.
“아, 그래요? 그럼 혹시 돌아가는 상황도 아시겠어요?”
“최 실장님을 내사했다가 혐의가 없어서 바로 접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 녀석 이야기로는 국세청이 괜한 삽질을 했다고, 어이가 없어 하더군요.”
최민혁은 자신의 자산 이야기가 나올 것을 사전에 막았다.
“…하면 그 누구더라? 아 맞아, 김상무 남부지검장이 이번 일에 가담했다는 소리군요?”
“그건 아닐 겁니다. 국세청 윗선에서 도움을 청했고, 최민혁 실장님이 초창기 주식 투자 명세를 잘 알기에 사람을 보낸 것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이었던 거죠.”
최민혁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자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을 노리는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신의 영향력이 워낙에 강해서 간만 보고 있는 셈이다.
‘그래도 다행이군. 당장 급한 일은 다 끝냈고, 지금은 영란 누나의 정략결혼과 구조조정 문제만 남았으니 말이야.’
게다가 두 가지 문제도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구조조정 문제는 정리할 기업 리스트가 확정된 상황이니 자신이 신경을 쓸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세청 내사 문제가 더 심각했다.
확실히 이번 문제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직접 자신이 손을 써서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 좋았다.
그것도 대충 해서는 곤란했다.
지켜보는 이들이 다들 겁먹을 정도로 명쾌하게 처리해야 했다.
마치 중세 공개 처형 방식처럼 잔인하게 말이다.
최민혁은 조용히 한쪽에 서 있는 김명준 과장에게서 서류를 받아서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내밀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몸을 움찔 떨었다. 최민혁 실장이 노골적으로 이렇게 나오는 것은 처음이다. 가볍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확신해서 문서를 살폈다.
딱 5분이었다.
문서를 모두 확인한 그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강상혁 조사국장이라니.”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이번 일에 관련된 이들을 다 정리하기보다는 강상혁 조사국장만을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직위가 무슨 문제가 됩니까. 불법을 저질렀다면 처분을 받아야죠. 더욱이 강상혁 조사국장은 생각보다 악질입니다. 이자는 특히 해외 거래를 많이 하는 기업의 약점을 잡아서 돈을 해외로 빼돌렸습니다. 미국에 꽤 적지 않은 부동산까지 사들였더군요.”
강상혁 조사국장은 보통 다른 공무원과는 달리 해외 쪽에서 주로 놀았다. 뇌물로 받은 돈을 페이퍼컴퍼니를 통해서 돈세탁을 한 후에 미국 내 부동산을 사들인 것이다.
박두영 부장검사의 처지에서는 이 정보 자체에도 놀랐지만 이런 정보를 최민혁 실장이 대체 어떻게 얻었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도대체 이 자료는 어떻게 구한 겁니까?”
최민혁은 얼마 전에 만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부국장 조시 로버트에게서 도움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 최근 미국을 오가면서 인맥을 늘려가는 중인데, 그들 중 한 분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상하군요. 이런 정보를 얻으려면, 미국 정부 내에서도 꽤 고위층이어야 할 텐데…….”
고위층 맞다. 최근 조사한 바로는 SEC 차기 수뇌가 될 인물이니까.
“그런 게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증거이니까. 아마 이 자료라면 수사를 하고도 넘칠 겁니다.”
“하아.”
그는 이마를 잡았다. 국세청 조사국장은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보통 이 자리를 거친 후에 서울청장을 거쳐서 국세청장으로 영전하기 때문이다.
즉, 국세청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위직이다.
청장이나 그 밑에 직급은 정치 쪽과 관련이 있어서 실무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