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88화 (488/1,021)

#488.

퀄컴 내의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안다면 상황을 눈치를 챌 수도 있으니까.

데니스 샐로먼 이사가 버럭 소리쳤다.

“어원 사장님, 제 질문에 답변을 해주십시오. 매각한 겁니까? 아닌 겁니까?”

“아직은 아닙니다만…….”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따른 데이비드 싱어뿐만 아니라 샐로먼 본사에서 갑자기 연락받고 온 이들 역시 안도했다.

퀄컴 지분 매각이 결정 나지 않았다면 아직 기회는 있었다.

“그 지분, 매각하지 마십시오!”

어원 제이콥 사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의 고압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걸 당신네가 끼어들어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닙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자신의 말이 얼마나 일방적인 강요인지도 알았다.

“압니다. 대신 우리 샐로먼 브러더스가 다른 제안을 하겠습니다.”

상대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어원 제이콥 사장은 데니스 샐로먼 이사를 비웃었다.

“설마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몸을 움찔 떨었다.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막으려고 다급하게 뛰어오는 바람에 정말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것을 깨달았다.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 일이란 게 그렇다.

첫인상이 나쁘면 무슨 말을 해도 쉽게 먹히지 않는 법이다.

어원 제이콥 사장이 비록 최민혁 실장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퀄컴에 그만큼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퀄컴의 상황은 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저도 최민혁 실장의 제안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돈으로 뭔가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서로 동반자 관계로서 제안을 해왔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이바지한 만큼 지분을 원하는 겁니다. 그걸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뭡니까? 돈이 많으니,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다급하게 사과했다. 심지어 허리도 숙였다. 식은땀마저 흘렸다.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제야 이 자리에서 깨달았다.

“아니, 그러면 무슨 의도입니까?!”

뒤늦게 이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대화를 듣고 있던 크리스 아몬 박사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끼어들었다. 그 역시 샐로먼 브러더스와의 협상 과정에서 얻은 앙금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우리 회사 사정을 알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 겁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한 노력이 그깟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네 샐로먼 브러더스가 돈에 환장한 집단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아봤지만, 이 정도까지 쓰레기 집단인지는 몰랐습니다!”

“그, 그건 죄송합니다.”

“개같은 소리 마. 내가 그때 받은 모멸감은 아직도 잊지 않았으니까!”

“…….”

격한 크리스 아몬 박사의 반응에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딱히 크리스 아몬 박사의 지독한 비난을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퀄컴 핵심 이사진의 분위기를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원 제이콥 사장은 상대가 샐로먼 브러더스라는 것을 고려해서 크리스 아몬 박사를 말리려다가 관두고 말았다.

“사실 우리 퀄컴 사정이 어려운 것은 돈이 부족해서 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동료입니다. TDMA 진영과 싸울 수 있는 병력과 무기가 필요합니다. 아쉽지만 샐로먼 브러더스 측은 이런 점에서 기준 미달입니다.”

“…제가 성급하게 말한 것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압니다. 저도 샐로먼 브러더스 측의 투자 제안을 받고 싶습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좀 곤란합니다.”

어원 제이콥 사장 역시 지금 이 자리에서 많은 고민을 해봤다. 그런데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의 제안이 퀄컴에게 얼마나 유리한 것인지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과 손을 잡으면 TDMA 진영의 압박에 당장 대응할 수 있다.

심지어 더 큰 이유는 바로 미래다.

최민혁 실장이 가진 원천기술을 활용한다면 기존 TDMA 진영 핸드폰보다 격이 높은 제품의 개발이 가능했던 것이다.

‘최민혁 실장은 이미 오현종 박사 팀과 손발이 맞아. 그가 리더가 되어서 오큘러스 프로젝트처럼 CDMA 장비와 시스템 개발을 진행한다면 결과는 생각보다 빨리 나올 거야. 그러면 한국을 시작으로 바로 미국 시장을 공략할 수가 있어.’

그 과장에서 생기는 수익은 단순히 생각해도 수십억 달러는 가볍게 넘어간다. 심지어 다른 나라까지 영역을 확장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될지 계산이 되지 않았다.

어원 제이콥 사장의 표정은 더욱 굳어만 갔다. 그는 생각하고 있는 바를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이마에 총알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원 제이콥 사장이 떠나는 걸 보면서도 붙잡지 못했다.

뒤늦게 후회하는 감정이 밀려왔다.

‘최민혁 실장과 어원 사장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해야 했어.’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했다.

퀄컴 지분을 먹은 후의 최민혁 실장.

그리고 최민혁 실장을 돕는 스티븐.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건 단순히 KM 전자나 KM 그룹을 공격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파급력은 기존 계획 전체 판을 다 뒤집고도 남을 게임 체인저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의 이 사태가 한국을 메인으로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지금 위에 보고를 해봐야 무시될 뿐이다. 오히려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심각하네.’

* * *

어원 제이콥 사장은 데니스 샐로먼 이사와 이야기를 끝낸 후에 회의실로 돌아와서 갑자기 기가 팍 죽은 크리스 아몬 박사를 쳐다보았다.

“이봐, 크리스.”

“아, 됐어.”

“아니, 주어와 목적어를 빼고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으란 소리야?!”

“난 지분 매각 찬성.”

“……?!!”

뒤늦게 연락을 받고 나타난 퀄컴 이사회 임원들은 다들 크리스 아몬 박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 때문이다.

중요한 건 크리스 아몬 박사가 가진 지분이 꽤 된다는 점이다.

어원 제이콥 사장이 그들을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거야?”

“아, 그 데니스 샐로먼이란 친구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른 뾰쪽한 수가 없겠더라. 지금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최민혁 실장밖에 없어. 우리 어원 사장님도 잘 알면서 왜 질문하는 거야.”

“…그래.”

어원 제이콥 사장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잘 생각해 보면 최민혁 실장의 제안은 거절하기 힘든 것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자신의 제안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굳이 더 매달리지 않았다.

이 자리에 뒤늦게 참석한 퀄컴 이사회 임원들은 더 심각했다.

심지어 어디서 구했는지 퀄컴 이사회 중의 한 사람인 에반 이사가 KMP-02 관련 자료를 회의실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 안에는 대략적인 KMP-02와 관련된 기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얼핏 봐서는 고작 신용카드 절반 크기의 모바일 기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수십 가지의 원천기술이 문제였다.

돌려가면서 그 자료를 본 이들은 한결같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이, 이거 어디서 구한 거야?”

에반 이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비밀이야.”

“혹시 유니버설 쪽 아냐?”

“흠.”

에반 이사는 움찔하기는 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KMP-01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다 안다. 따라서 이와 유사한 제품이라면 KMP-02다.

최근 최민혁과 스티븐이 유니버설 이사진을 만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까.

“가만, 에플 주가가 미친 듯이 오른 것도 이것 때문이었어?!”

확신한 이들은 결국 욕설을 퍼부었다.

“결국 사전에 정보를 안 놈들이 에플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였다는 소리네.”

“개놈의 새끼들!”

하지만 입을 다문 이도 있었다. 바로 이 자료를 내놓은 에반 이사였다.

“에반, 설마 너 에플 주식을 매입한 거야?”

“조금.”

“얼마나 매입한 거냐?”

“얼마 안 된다니까.”

차마 아는 지인에게 돈을 빌려서 5,000만 달러에 가까운 물량을 매입했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인상을 찌푸린 이들은 에플 주식을 10만 주 정도 매입한 이들이다.

그들 역시 스티븐과 최민혁 실장을 믿고 투자를 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어원 제이콥 사장은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이미 게임은 끝난 셈이다.

“그러면 퀄컴 지분은 최민혁 실장에게 매각할 겁니다. 대상은 최민혁 실장이 실소유자로 있는 벨린 투자입니다.”

대다수는 말은 없었다.

그는 크리스 아몬 박사를 위시한 다른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이번 지분 매각은 고육지책입니다. 지금은 TDMA 진영과 싸우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고, 너무 작은 이익에 집착해서 큰 것을 놓치지 맙시다!”

“…….”

역시 대답은 없었다. 다만 여전히 지분 매각에 반대하는 이는 있었다. 하지만 그도 혼자 지역방송을 계속하다가 따가운 시선을 받자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들은 각자 내놓아야 할 지분을 계산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분 매각도 좋은데, 1달러는 좀 너무하지 않아?”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의견을 주시면 협상에는 반영할 겁니다.”

* * *

최민혁은 퀄컴 법무 팀이 와서 내민 지분 매각 계약서에 사인한 후에 휘파람을 불었다. 1주당 1.1달러 가격이었다.

어원 제이콥 사장을 비롯한 퀄컴 이사회 임원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어쩔 수 없어서 한 선택이지만 여전히 착잡하기만 했다.

이와 반대로 이번 지분 협상을 총괄한 안현수 법무 팀장은 상기되었다. 그는 이 정도 규모의 지분 협상을 한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비록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고생했지만, 성취감을 느꼈다.

과거 KM 그룹에 있을 때는 경험하기 힘든 규모의 거래였기 때문이다.

최민혁 역시 안현수 법무 팀장을 격려했다.

“고생했습니다.”

그는 퀄컴 임원들의 눈치 때문에 한국어로 조용히 속삭였다.

“최선을 다했지만 좀 아쉽습니다. 퀄컴 주가는 현재 0.8 달러 선에서 계속 움직이다가 최근 1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0.9 달러 선에서 합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안다. 그걸 최민혁이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최민혁은 퀄컴 주가가 어떤 식으로 향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0.1 달러를 누구 코에 붙이려고. 3달러에 협상해도 괜찮아.’

하지만 굳이 퀄컴 쪽 인사 이십여 명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한국어로 대화했다.

“그 정도면 최선을 다한 겁니다.”

“아닙니다. 이번 기회를 경험 삼아서 앞으로는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면 좋고요.”

최민혁은 안현수 법무 팀장이 이번 일을 통해서 제대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에 만족했다. 지금까지는 이런저런 잡일만 하다가 제대로 된 협상을 한 것이니까.

그는 힐끗 퀄컴 쪽 인사를 쳐다보았다. 퀄컴 경영진이 나름 머리를 많이 굴렸겠지만 크게 신경을 쓸 바는 아니었다.

‘역시 공돌이의 한계일까? 아니면 상황이 너무 절박해서일까?’

둘 다라도 상관은 없었다.

그로서는 이 퀄컴 지분이 이번 미국행에서 전혀 생각도 못 한 득템이었다.

‘어쩌면 이 지분 가치가 더 빨리 드러날지도 몰라. 내년 초면 서울, 경기 쪽의 CDMA 서비스가 시작되니까. 필요하다면 그 일정을 당겨야겠어.’

최민혁은 솔직히 샐로먼 브러더스가 고맙기만 했다. 그들이 자신을 압박하지 않았다면 이 계약은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차라리 고맙네. 타이밍이 딱 좋았어. 내년 상반기만 되어도 어원 제이콥 사장의 태도가 달라졌을 거야. 하반기는 더 어려울 거고.’

다만 그는 굳어 있는 어원 사장을 생각해서 겉으로는 자기 감정을 내세우지 않았다.

“자, 일단 급한 일이 끝났으니, 작별할 시간입니다. 앞으로 잘 좀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어원 제이콥 사장 역시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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