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
최용욱 회장은 크게 당황했다. 사실 CDMA 이야기는 지금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옆에 수행원을 동원해서 일단 최문경 부회장을 자기 차량에 태웠다.
하지만 그는 차량이 떠난 후에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운 전경련 1층의 모습에 혀를 찼다. 저런 광경은 여태 전경련에 참석하면서 본 적이 없었다.
CDMA 관련 정보를 안 실무진이 돌아다니며 다른 이들에게 퍼뜨리면서 급격하게 정보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핸드폰이 갑자기 계속 울렸다.
최용욱 회장은 당장은 상황을 알 수가 없어서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그는 그제야 득의 어린 표정을 한 최문경 부회장이 다시 정색하는 모습을 보자 이를 으드득 갈았다.
“네놈이 이럴 수가 있어?!”
최용욱 회장의 분노를 깨달은 최문경 부회장은 움찔했다.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제가 감정이 상해서 흥분한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장남의 의도를 알았지만 일단 CDMA 관련 의혹에 대해서 부정했다.
“야, 내가 민혁이 그놈만 따로 밀어줬다고 생각하느냐? 난 CDMA 관련해서는 민혁이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정말입니까?”
“이 새끼가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네가 이 아비를 아주 우습게 아는구나.”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도 이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CDMA 사업은 정말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오성 전자와 HY 전자다. 오성 전자는 그럴 수가 있다고 해도 HY 전자는 KM 그룹을 상대로 발톱을 들이댈 수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런 역학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제가 자세한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최문경 부회장.
“…….”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최문경 부회장의 의도가 전경련 실무진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차마 최문경 부회장을 탓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이 CDMA 쪽에 손을 댔다면 어차피 알려질 일이다.
더욱이 CDMA와 같은 사업에 대한 선을 그은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이야? 민혁이 그 녀석이 CDMA 쪽에 손을 댔다고? 하지만 난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어. 만약 그 사실이 알려졌다면 오늘 전경련 모임은 난리가 났을 거다.”
“아, 한국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에 있는 퀄컴 쪽에 직접 손을 대는 것 같습니다.”
“설마 민혁이 그 녀석이 퀄컴 지분을 인수할 생각이라는 말이야?”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민혁이 그놈이 MIT 퀄컴 연구소에 갈 이유가 없으니까요.”
“…….”
최용욱 회장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잡았다. 아니,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퀄컴 지분을 얻는 것은 이동통신 사업에 끼어드는 것과는 다르다.”
“하, 아버지,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겁니까?! 아버지는 저한테 CDMA 관련 쪽 사업에는 일절 손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민혁이 그놈과 이렇게 차별을 두는 겁니까. 설마 병문이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 제가 병문이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 모든 일은 아버지 때문 아닙니까?!!”
“…….”
최용욱 회장은 다시 분노한 최문경 부회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확실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이제까지 쌓인 앙금도 터져 나왔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의 이야기는 딱히 틀리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뒤늦게야 한숨을 내쉰 채 입을 다물었다.
아니, 곧바로 장승일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현재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를 내린 후에 다시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속내를 다 들여다 내놓은 최문경 부회장은 최용욱 회장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정말 이놈은 다 좋은데, 이게 문제야. 민혁이 그 녀석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건지. 지금까지 잘하나 싶더니, 또 문제를 만드네. 일단 퀄컴 사정부터 알아봐야겠어.’
* * *
MIT 내의 퀄컴 연구소 회의실 분위기는 이틀 내내 온통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했다.
어원 제이콥 사장이 줏대도 없이 이랬다가 저랬다 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었다.
최민혁 실장의 제안은 그만큼 마약처럼 달달했기 때문이다.
더 황당한 것은 퀄컴 이사회의 한 사람이 지난 사교 모임에서 유니버설 측 임원을 통해서 KMP-02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점이다.
KMP-02에 사용된 기술은 한마디로 소름이 끼쳤다.
문제는 이 기술 대다수가 최민혁 실장이 대주주로 있는 기업의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역시 더 큰 문제는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성과 때문에 KMP-02에 대한 것도 의심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낀 크리스 아몬 박사는 고성방가 하는 노숙자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씨발,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오현종 박사 배후가 최민혁 실장이란 소리잖아. 아니, 사전에 이미 음모를 꾸민 거잖아!”
소위 말하는 음모론.
그런데 이 주장에 반박하는 이들은 없었다.
보다 못한 다른 동료가 크리스 박사를 말렸다.
“크리스, 그만해. 이미 오현종 박사를 통해서 이야기를 다 들었잖아!”
“아니, 지금 그 말을 믿는 거야?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한 사람이 주도해서 만들었다고? 아니, 그게 인간이 가능한 거야?!”
최민혁이 한 일은 당연히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한 것은 이미 인생 1회 차에서 여러 개의 연구 팀이 만들어놓은 기술을 짜깁기한 것에 불과했다.
정작 그 의미를 모르는 부분도 많았다.
거기다 추가로 ETRI 측의 연구원이 그 부분을 각자 나누어서 처리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일 자체가 과소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소위 말해서 지금 이 대형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최민혁이 한 것이니까.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최민혁 실장이 도대체 어떻게 위성 사업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을 다 알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건 MIT 내의 위성 담당 전문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일이었다.
이제 겨우 대학교 1학년생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건 천재라는 말로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어째 오큘러스 프로젝트 프로그램을 총괄한 김승구 팀장 말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는 김문호 박사에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때 비웃었습니다. 김문호 박사도 난감한 얼굴이었는데, 그게 사실인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김문호 박사는 오큘러스 프로젝트 실무진을 총괄한 이다. 따라서 그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퀄컴 연구원이 너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냥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하,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아무리 세기의 천재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아이디어 정도라면 이해를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뼈대를 만들었다니.”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단순히 노력만으로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실무 경험과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최민혁 실장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다.
“…설마 최민혁 실장이 우리와 ETRI의 공동 연구를 방해한다고 압박한 겁니까?”
어원 제이콥 사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런 말은 없었어. 다만 TDMA 틈바구니에서 과연 CDMA가 생존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시하더군.”
“아니, 그러면 지금 한국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신세기 통신이 앞으로 1조를 더 퍼부을 거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건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도 있어. 비록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와 딜을 했다고 해도 결과가 나쁘면, TDMA로 갈아탈 수 있으니까.”
실제로 미국 정부에 로비한 핵심 세력 중의 하나가 바로 퀄컴 이사회였다. 그들은 한국을 테스트베드 삼아서 CDMA 기술을 완성하고자 했다.
어차피 원천기술은 자신이 가지고 있으니, 나머지 자잘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봤다.
ETRI 역시 토사구팽 시키면 되니까.
물론 겉으로야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다들 셈은 끝낸 상황이었다.
어원 제이콥 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런 말 해서 그런데 KMP-02는 핸드폰으로 갈 수 있는 징검다리 같은 아이템이야. 최민혁 실장은 아마 그런 점도 고려했을 거야.”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뼈대를 만든 천재라면 못 할 것도 없지 않아? 그렇게 보면 최민혁 실장의 지금까지 행보는 다 큰 그림에 따라서 움직인 거야.”
“…….”
자존심이 상한 이도 있고, 화가 난 이도 있었으며, 짜증을 낸 이도 있었다. 그런데 다들 딱히 어원 제이콥 주장에 반박하지 못했다.
더 심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하면 지금 ETRI 측 연구를 지원하는 이도 최민혁 실장이란 말입니까?”
“그건 확인하지 못했어. 하지만…….”
굳이 더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이 한 행보를 잘 보면 절대로 공짜로 일을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ETRI 경우는 아예 예외였다.
최민혁도 이쪽에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퀄컴 연구원이 오해한 셈이다.
하지만 그들 표정이 정말 좋지가 않았다.
어원 사장은 역시 사장답게 현실적인 이야기를 내놓았다. 그는 지금 최민혁 실장의 압박에 대항하는 것보다는 최민혁 실장과 손을 잡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계산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어.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손을 대서 실패한 일은 없어. 당장 에플 인수가 그 증거야. 망해가던 에플 주가가 벌써 3달러를 돌파했으니까. 어쩌면 지금 협상도 에플의 또 다른 제품을 위한 밑그림일 수가 있어.”
다들 그제야 서로 쳐다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최근 최민혁 실장의 이야기가 무성했다. 그리고 최민혁 실장은 실제로 미국에 와 있었다.
그가 이곳에 왔다면 만나는 사람은 스티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에플 내에서 최민혁 실장이 뭔가 진행하고 있다는 거다.
‘그게 결국 에플 주가에 반영된 건가?’
최민혁 실장의 제안은 너무 달콤해서 도저히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크리스 아몬 박사는 여전히 나 홀로 결사 항쟁을 외쳤다.
“말도 안 돼. 이제 와서 외부의 도움을 끌어들일 수는 없어!”
어원 사장이 보다 못해서 그를 구박했다.
“아니면 크리스 박사 당신이 TDMA에 경쟁할 수 있는 자금과 기술을 끌어와 봐. 그것도 아니면 본인이 직접 고안하든지, 그러면 자네 제안대로 하지!”
“자, 자금이라니.”
“회사 사정을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해? 우리 회사는 지금 망하기 일보 직전이야!”
좀 과장된 이야기였지만 다들 안색을 찌푸리고 말았다.
한국 신세기 통신, 오성 전자, HY 전자, ETRI가 열심히 자기 손발이 되어서 CDMA 관련 장비를 만들고 있다고 말하지 못했다.
사실 회사 사정이 어려운 것보다는 TDMA 진영의 압력이 더 큰 문제였다.
하지만 어원 제이콥 사장도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을 피력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그는 뒤늦게야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전화를 떠올렸다.
‘하필이면 왜 이 시기에 만나자고 한 것일까? 일단 만나보고 나서 결정해야겠어.’
“저녁 여섯 시에 다시 결론짓자!”
* * *
어원 제이콥 사장 역시 샐로먼 브러더스에 대해서 제법 알고 있었다. 과거 자신이 투자를 요청한 투자은행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샐로먼 브러더스는 CDMA 미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결국 여러 차례 만나봤지만, 투자를 받기는 어려웠다.
그것도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가 아니라 중간에 걸쳐 있는 투자 캐피털을 통해서다.
그런데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좀 달랐다. 전화해서 미팅 만남을 정한 지 불과 20분이 채 되지 않아서 자신 앞에 나타났다.
“……?”
어원 제이콥 사장은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MIT 내를 다급하게 뛰어온 덕분에 땀범벅인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나타나서 계단에 풀썩 앉은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는 치를 떨었다. 도대체 왜 자신이 이 나이에 이렇게 뛰어야 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그나마 운동을 꾸준히 한 터라 버틸 수가 있었지만 데이비드 싱어 수석 매니저는 혀를 내두른 채 어원 제이콥 사장을 쳐다보았다.
“계약한 겁니까?”
“네? 무슨 계약 말입니까?”
“퀄컴 지분을 매각했느냐 말입니다!”
“설마 최민혁 실장에게 지분을 넘겼다는 말입니까? 아니, 그걸 당신들이 어떻게 알고…….”
어원 제이콥 사장은 뒤늦게야 상대가 세계적인 투자은행 중의 하나인 샐로먼 브러더스의 직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