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
“솔직히 그 부분은 아직 기획실 내부에서 검토하는 중입니다. 다만 메시지 패드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MP3 플레이어 기능이 내장되고, 스마트 펜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IPS LCD 패널도 포함될 겁니다.”
“IPS LCD 패널이라면, 일전에 보여준 2.7인치를 탑재한 모델을 말하는 겁니까?”
“네.”
김진석 이사도 머리가 복잡해지자 LCD 부분은 더 언급하지 않았다. LCD 사업에 관련되어서 이리저리 엮여 있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흠. 좋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이전과는 사뭇 다릅니다. 권 실장님이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할 겁니다. 우리 전략 기획실도 돕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대화를 끝낸 후에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가 아는 최민혁 실장이라면 이렇게 단순하게 일을 벌일 것 같지는 않았다.
‘차세대 메시지 패드는 쉽지가 않을 거야. 더욱이 에플과 손을 잡아서 진행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최민혁 실장이 스티븐과 손을 잡고 벌이려는 일은 무엇일까?’
그로서는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을 쉽게 찾지는 못했다.
* * *
오성 그룹이 스티븐의 내한과 관련된 정보를 파는 동안에도 다른 대기업 역시 스티븐과 접촉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오히려 그 때문에 콜린스에 대한 대응책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딱히 최민혁이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티븐의 이슈 때문에 정작 차세대 콜린스에 관한 관심은 사람들 시선에서 멀어졌다.
조성돈 팀장은 덕분에 느긋한 마음으로 최민혁의 지시를 따랐다.
그건 기획 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도 최민혁이 내놓은 디자인 스케치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콜린스의 유려한 모양에 관한 이야기는 늘 있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형 TV용이었다.
이걸 모니터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배종대 과장은 탄식했다.
“최 실장님은 늘 한 수 앞서 나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KMP-02가 아니라 오히려 갑자기 튀어나온 모니터용 패널에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실장님이 이 아이템에 선정한 겁니까?”
“야, 정 대리, 최 실장님 해바라기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 이상하잖아요. 지금까지 KMP-01 차세대 모델에만 집중하던 분이 갑자기 다른 아이템을 선정한 것이 이상해서요.”
“스티븐 때문인 것 같아.”
정성근 대리는 평소와는 달리 유창하게 자기 생각을 피력했다.
“스티븐과의 협상 말입니까? 하지만 그건 이미 다음 주로 연기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스티븐은 다른 업체들 만나느라 정신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배종대 과장을 비롯한 기획 팀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성근 대리가 저렇게 나오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실장님이 뭔가 의도한 바가 있겠지. 최 실장님이 언제나 우리 뜻대로 움직인 분은 아니니까. 아마 스티븐과 에플에 대한 공략을 고민하는 것 같아.”
“…….”
정성근 대리는 고개를 갸웃했고, 다른 기획 팀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돈키호테 같은 최민혁 실장의 행보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모니터용 패널에 대해서 다시 들여다봤다.
아니, 조성돈 팀장이 기획 팀과 같이 아예 KM 전자 본사의 다른 층에 있는 중앙 연구소를 찾았다.
거기서 모니터용 패널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
뒤늦게야 과거 최훈열 전무가 있을 때부터 중단되었다가 다시 시작된 모니터용 패널 결과를 보게 된 것이었다.
“서, 설마 벌써 시제품이 나온 겁니까?”
이들을 마중 나온 최병연 소장은 오히려 씩 웃고 말았다.
“벌써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개발 시작한 지가 벌써 3년이 넘었으니까요.”
최병연 소장은 오성 전자로 이직한 후에 콜린스 개발을 진행하면서 컴퓨터용 모니터에 관한 연구도 꾸준히 진행했다.
해당 연구가 최훈열 전무가 끼어들어서 잠깐 중지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그 연구 성과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콜린스의 초대박 이후에 KM 전자 상황이 나아진 후에는 이 제품에 관한 연구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최병연 소장이 다시 돌아온 후에는 오히려 이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덕분에 KM 전자 초창기에 고만고만하게 만들던 컴퓨터용 모니터의 품질이 대폭 개선되었다.
다만 이 프로젝트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KMP-01 대박 이후에 회사 분위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콜린스 초대박 이후에 컴퓨터 모니터용 콜린스 개발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최병연 소장은 기획 팀이 관심이 없던 말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국 조성돈 팀장조차 모니터용 패널 시제품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건 정말 놀랍습니다.”
최병연 소장은 침을 튀겨가면서 이 개발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연구소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콜린스가 성공한 마당에 굳이 이 일을 포기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더욱이 콜린스에 사용된 기술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일이 쌓이는 마당에 연구원이 제대로 최병연 소장 지시를 따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최병연 소장은 여전히 자기 고집을 쉽게 버리지 않았다.
그는 콜린스 사업부 매각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자기 의지를 굳히지 않았다.
의구심을 드러내던 정성근 대리도 혀를 내두른 채 시제품을 만져보았다.
다른 기획 팀원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매사에 늘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배종대 과장은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는 최병연 소장에게 탄식하고 말았다.
“최 소장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하하하, 뭘 그런 소리를 다 합니까. 제가 소장 직급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친형과 같은 늘늘한 최병연 소장의 반응은 도저히 한 대기업의 소장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중소기업 직원처럼 가볍기만 했다.
하지만 그래서 기획 팀원은 더 최병연 소장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앞에 놓인 시제품은 콜린스와 외향이 거의 유사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채도가 과장되지 않았고, 인풀랫에 심각한 문제가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겉모양은 TV용 콜린스와 모니터용 콜린스가 같지만 속은 꽤 차이가 존재했다.
그중 가장 큰 차이점은 하단 부분을 뚫어서 그 안에 컴퓨터 본체를 결합해 놓았다는 것이다.
솔직히 아직 넝마와 같은 모양이라서 볼품은 없었다.
그래도 일체형 컴퓨터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최병연 소장은 뜨거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획 팀원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최 실장님이 이미 지시해 둔 물건입니다!”
“설마 최 실장님이 사전에 이 물건을 만들라고 한 겁니까?”
정확히는 틀린 표현이다. 개발 시작 자체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진행된 일이다. 다만 이 시제품 디자인은 최민혁 실장이 지시한 것이 맞았다.
“물론입니다.”
“…역시 최 실장이다!”
최병연 소장은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조성돈 팀장을 포함한 기획 팀원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들도 다들 보고를 받은 사실이었다.
“이미 기획 팀에 충분히 알린 것 같습니다만…….”
“아, 그게 다른 일이 너무 많아서 소홀히 했습니다.”
슬쩍 얼굴을 붉히는 조성돈 팀장.
그로서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조성돈 팀장을 탓할 문제는 아니었다.
콜린스 초대박 이후 KMP-01이 다시 대박을 치면서 KM 기획 팀은 정신이 없었다. 그런 중에 일이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만 갔다.
솔직히 이제는 KM 전자 계열사(?)를 관리하는 것도 간단하지 않았다.
당장 ARN 지분 인수 후에 이쪽에도 연구 인력이 빠져나갔다. 와컴 지분 인수 후에도 그쪽과의 협업으로 인력이 추가로 빠져나갔다.
기획 팀은 가용 가능한 인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들을 관리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콜린스에 대해서는 소홀히 한 셈이다.
하지만 최병연 소장은 기획 팀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주도권을 가지고 기획 팀에서 놓친 일을 꼼꼼히 다 챙긴 것이다.
이게 어떻게 보면 콜린스 신화의 근간이기도 했다.
그때도 최훈열 전무가 방해를 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사점이 있었다.
조성돈 팀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병연 소장을 쳐다보았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천만에요. 다만 IPS LCD 양산이 눈앞에 놓인 시점이라서 상황이 모호합니다. LCD를 응용해도 이런 모델이 가능해서요.”
하지만 조성돈 팀장 생각은 달랐다.
“소형 LCD 양산은 어떻게 한다고 해도 대형 LCD 양산이 순조롭게 진행되겠습니까?”
“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실상 소형 LCD 시제품 생산에서도 아직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오는 중이다. 그러니 중대형 LCD 양산에는 적어도 2~3년, 현실적으로 3~4년은 족히 필요했다.
거기에 오성 전자나 LC 전자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산적한 내부 문제도 있다.
특히 PDP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니 설사 두 회사는 IPS LCD 양산을 할 수도 있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다른 회사는 특허 때문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조성돈 팀장은 새삼 입맛을 다시는 최병연 소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사전에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면 실장님에게 할 말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뭐,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정말 PC 타입 제품까지 고려하는 겁니까?”
“최 실장님 이야기로는 우리 쪽에서 하기보다는 에플을 통해서 일을 진행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에플을 밀어줄 생각입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석연치 않은 얼굴을 한 채 머뭇거렸다.
다만 다른 기획 팀원은 모두 복잡한 얼굴을 한 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네.’
* * *
두 번째 콜린스 타입을 본 기획 팀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들은 최민혁 실장의 지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죽으라고 움직였다.
그러다 정작 다른 일을 간과한 것 때문에 침묵한 것이다.
배종대 과장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콜린스 사업부 매각은 정말 진행하던 일이었잖아. 사업부 매각까지 이미 정해 놓은 마당에 차세대 콜린스 모델을 어떻게 신경 써?!”
다른 이들은 다 침묵했다.
기획 팀도 나름 변명의 여지는 많았다.
지난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딱히 이런 기획 팀 분위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콜린맥이 필요한 사람은 정작 따로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자신이 얻는 것이 있어야 특허를 내놓을 테니까.’
그리고 실상 윈도우를 탑재한 콜린맥이 한국에서는 제대로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한국과 미국 PC 시장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 시장에서 콜린맥이 성공한다면 콜린스 이후 또 다른 대박이지. 그 이익도 만만치 않을 거야. 물론 이건 에플과도 이야기가 잘되어야 해.’
더욱이 최병연 소장이 독단적으로 밀어붙인 부분도 있었다. 따지자면 최병연 소장의 직권이 좀 과한 면이 있는 일이다.
그는 때문에 스티븐과의 만남에 더 집중했다.
회색 뉴발란스 운동화, 리바이스, 터틀넥으로 무장한 스티븐은 TV에서 흔히 나오는 그 모습이었다.
다만 인생 1회 차 때와는 달리 한결 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얼굴에는 강한 의지와 자신감이 있었다.
“당신이 최민혁 실장님이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악수를 청하는 스티븐은 이제까지 최민혁이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활력이 넘쳤다.
과연 에플에서 쫓겨나서 망해가는 처지에 놓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기획 팀은 수첩 내용을 살피면서도 스티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들 개인 PC 신화를 만들어 낸 스티븐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건 조성돈 팀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 역시 역사적인 인물을 보게 되어서 살짝 흥분했다. 그도 인생 1회 차에서 귀에 따갑도록 들은 인물을 직접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마치 타임머신으로 과거에 돌아온 기분이네.’
그렇다고 개인감정과 사업을 혼동하지는 않았다.
최민혁은 슬쩍 스티븐이 자리에 앉자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발휘했다.
혹시나 해서 통역까지 대동한 스티븐이 이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런 스티븐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스티븐이 가지고 있는 특허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