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
“스티븐이 가지고 있는 특허 그 자체는 효용 가치가 없습니다.”
역시나 스티븐은 단 한마디에 최민혁의 주장이 뭔지 정확히 파악했다. 자신이 가진 특허를 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모바일 산업의 미래는 지금과는 확연히 달라질 겁니다. 메시지 패드는 에플에서 비록 실패했지만, 이는 단지 시기적으로 앞서 나간 것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작한 스티븐 이야기는 뜻밖에도 길게 이어졌다.
스티븐은 메시지 패드의 가장 심각한 문제와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계속 피력했다.
그렇지만 그는 최민혁이 NextOS 직원을 빼돌린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이 고안한 특허가 가지는 미래 가치만을 계속 피력했다.
그 설명이 얼마나 진지한지 이 자리에 참석한 기획 팀은 마치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흠.”
최민혁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쉽게 갈 수 있으면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역시 스티븐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자기 신념을 포기하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사전에 손을 썼기에 그나마 ARN 지분을 먹을 수가 있었어. 만약 스티븐이 그 사안을 알았다면 초를 쳤을 거야.’
실제로 스티븐이 만약 에플에 있었다면 최민혁의 행보는 시작부터 제동이 걸렸을 것이다. 일단 ARN 지분 인수조차 어려웠을 게 확실했다.
스티븐은 아콘이나 VLSI에 압력을 넣어서 지분 매각을 철저하게 봉쇄했을 것이다.
그리고 스티븐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딱히 분노한 표정이 아닌 사무적인 얼굴로 벨린 소프트로 이직한 직원을 언급했다.
“벨린 소프트로 이직한 베트랑드 실브, 스콧 포스탈, 크레이크 행크스는 제가 아끼는 친구들입니다.”
최민혁은 스티븐이 아픈 점을 건드리자 움찔했다.
“설마요? 그들은 어디까지나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NextOS 직원이 스티븐의 개인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스티븐은 특허에 대한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 지난 일을 과장했다.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진행한 ‘넥스트 모바일’ 프로젝트는 제가 장기적으로 바라보고 만든 것입니다. 과거 전전 에플 CEO인 스컬리의 제안을 토대로 만든 것이란 말입니다.”
정확히는 장기 포석이 아니다. 스티븐이 전전 에플 CEO인 스컬리와 격렬한 논쟁을 한 끝에 받은 인상은 꽤 컸다.
당시는 스컬리와 일방적으로 싸우고 끝났지만 에플에서 쫓겨난 후에 그는 스컬리의 제안을 재검토했다.
다만 딱 거기까지.
NextOS의 상황이 어려워지자 그 이상은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밑에 실무진은 좀 달랐다. 그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서 기술 기반을 쌓았다.
최민혁은 딱 이 부분을 걸고 넘어갔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성과물은 없던 것으로 압니다.”
“최 실장님,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다.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 것뿐입니다.”
스티븐은 최민혁 실장이 부담스러운지 임직원을 빼돌렸다고 언급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기술을 도둑질했다고는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주장만 계속해서 피력했다.
“혹시 KMP-01을 말하는 것 같은데, 거기에 사용된 특허는 NextOS의 프로젝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실제로는 완전히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KMP-01에 사용된 사용자 인터페이스 중에 몇 가지는 NextOS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것이다.
다만 NextOS 사정이 나빠지면서 프로젝트가 중단되어 버렸다.
심지어 이 프로젝트에 관여한 이들 중에 과반수가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스카우트된 세 사람은 능력을 인정받아서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스티븐은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로 말미암은 갈등 때문에 부사장을 비롯한 실무진 몇 사람이 옷을 벗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스티븐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
반쯤 폐인이 되다시피 한 시절이다.
그런 틈을 노려서 최민혁 실장이 핵심 인재를 빼돌린 것이다.
그는 솔직히 내심 분노했지만, 그 감정을 최민혁 실장에게 언급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미 늦은 일이었다. 차라리 이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더욱이 자신이 가진 특허라면 KMP-02에 태클을 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몇몇 특허는 IPS 특허처럼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다.
만약 이걸 빌미로 소송을 건다면 KM 전자는 괴로운 상황에 부닥칠 수 있었다.
아니 후일 반드시 문제의 소지가 된다.
최민혁은 설마 했지만, 스티븐이 최악의 경우까지 대비하자 혀를 찼다. 사전에 미리 수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뒤통수를 맞을 상황이었다.
“결국 그 특허를 매각할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까?”
스티븐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반대로 주장하겠습니다. 최 실장님은 KM 전자가 가진 MP3 특허를 저에게 넘길 생각이 있습니까?”
“그것과 이것은 다릅니다. KMP-01은 이미 대박을 터뜨린 모델입니다.”
“그 KMP-01 OS를 개발한 이들이 세 친구인 것으로 압니다만?”
“하지만 그것은 NextOS가 보유한 기술이 아닙니다.”
“솔직히 그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한창 프로젝트 진행하던 이들이 얻은 기술을 적용한 것은 또한 사실 아닙니까?”
“흠.”
소모성 논쟁에 지친 최민혁은 혀를 차면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스티븐이 이렇게 집요하게 나올지는 상상도 못 했다.
‘지금까지는 진짜 운이 좋았어.’
스티븐은 심각한 최민혁 실장의 얼굴을 보자 움찔했다. 그는 솔직히 자신이 가진 특허가 실제로 최민혁 실장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 모르고 있었다.
최민혁 실장의 행동을 보고 나서 혹시나 싶어서 특허를 내기는 했지만 그 특허의 본질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이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시죠.”
“아니, 왜요?”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네?”
* * *
스티븐은 뜻밖에도 자신이 만약을 대비해서 챙겨둔 기술 특허가 꽤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잘만하면 KM 전자를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때문에 최민혁 실장 뒤를 따라서 이동하면서도 영문을 몰랐다.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계산하는 통에 통로를 오가는 KM 전자 임직원들의 시선을 확인할 틈도 없었다.
KM 전자 임직원들도 이미 스티븐이 KM 전자 본사를 방문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말 최민혁 실장과 스티븐이 협상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야 깜짝 놀랐다.
물론 스티븐은 그런 KM 전자 내부 분위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가 곧 도착한 곳은 KM 그룹 본사 중앙 연구소 내부였다.
안에는 이미 최병연 소장이 몇몇 연구원들과 같이 대기 중이었다. 그는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24인치 일체형 PC를 선보였다.
이 시제품은 테스트용으로 윈도우가 설치되어 있었다.
조성돈 팀장이 봤을 때에 비해서 한결 더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유려한 대형 콜린스 모델과 거의 유사한 모델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한 채 시제품 위에 손을 올렸다.
“어떻습니까? 일체형 PC입니다. 아, 이건 테스트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윈도우가 들어갔습니다만 파웍북 보드로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습니다.”
“…이건 콜린스가 아니군요.”
“콜린맥이란 모델입니다. 모니터와 PC 보드를 결합한 모델이죠.”
“…놀랍군요. 아니, 콜린스 같은 모델을 만든 회사라면 당연한 후속 모델이군요. 하, 하지만 이런 모델을 벌써 준비해 놓았다니.”
“…….”
최민혁은 방긋 미소만 지었다.
스티븐은 화질을 보기가 무섭게 이 시제품이 중형 콜린스 모델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PC 일체형이기에 설마 PC용 모니터를 넣었나 싶었는데,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기존의 모니터가 뒤로 툭 튀어나와서 디자인이 수습 불가인 점을 고려한다면 디자인 면에서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그리고 스티븐 그가 가끔 구상하는 딱 일체형 PC 타입이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에플로 다시 귀환만 할 수 있다면 이런 모델을 개발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그런 물건이 벌써 눈앞에 떡 놓여 있었다.
사실 NextOS의 하드웨어에 사용된 모니터는 실로 명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의문의 시제품은 그 모델의 모니터와 비교해도 화질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나았다.
스티븐은 마치 총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콜린맥의 외형을 이리저리 만졌다. 딱 그가 원하는 그런 물건이었다.
최민혁은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넨 사람처럼 느긋하게 스티븐에게 말했다.
“전 스티븐이 에플에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콜린맥이라면 죽어 버린 에플 엔진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스티븐은 기가 한풀 꺾인 표정을 한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최민혁은 굳이 더 스티븐을 자극하지 않았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제가 에플에 투자하고, 에플이 NextOS를 인수하는 겁니다. 그리고 스티븐은 에플로 복귀해서 이 콜린맥을 활용한 신제품으로 다시 에플 이사회를 장악하는 겁니다.”
“단, 모바일 관련 특허를 포기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는 겁니까?”
“글쎄요. 그 특허는 스티븐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앞에 놓인 물건이 스티븐에게는 더 필요한 물건 아닙니까?”
“…….”
스티븐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받자 머릿속에 준비한 모든 계획이 소용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플은 어차피 회사를 매각하는 분위기로 가는 중이다.
굳이 IBM과 같은 기업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들 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KM 전자라면 상황이 좀 다르다. 오히려 IBM보다 더 이상적인 인수 후보자였다.
그는 씩 미소 짓고 있는 최민혁 실장이 새삼 무섭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반면 최민혁은 여유가 넘쳤다.
“아, 물론 에플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니,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넉넉하게 기다릴 테니, 답변을 주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 * *
스티븐이 떠난 후의 KM 전자 기획실은 사교 모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스티븐을 본 것만으로도 감격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한술 더 떴다. 그는 놀랍게도 스티븐을 상대로 갑질을 일삼았던 것이다.
기획 팀은 바로 다과 파티를 벌였다.
과자를 훌훌 입안에 털어 넣은 배종대 과장은 도저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역시 우리 최 실장님, 진짜 대단하다!”
박광민 사원이 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요. 이번 일은 제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못 믿을 일입니다.”
“난 다른 것을 떠나서 계속 자기주장만 하던 스티븐의 입을 단 한 방에 다물게 한 것이 놀라워. 콜린맥이라니.”
박상기 차장 역시 이번 일에 대해서는 찬사를 늘어놓았다.
“최병연 소장님도 대단한 분이지. 그분이 없었다면 스티븐이 그렇게 쉽게 수긍하지 못했을 테니.”
커피를 홀짝이던 이정원 과장 역시 이번 일만큼은 최민혁 실장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최병연 소장님이 그렇게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최 실장님 때문입니다. 최훈열 전무가 있었을 때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계속 방해를 했으니까.”
하지만 음료수를 마시는 조성돈 팀장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콜린맥 기획안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박상기 차장은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솔직히 콜린스 매각 이야기는 계속 나왔지 않습니까. 이런 차에 자금이 많이 들어가는 모니터용 패널 개발은 문제의 소지가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최민혁 실장님에게 반드시 확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켜본 바로는 최민혁 실장님도 모니터용 패널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 눈치였습니다. IPS LCD 시제품이 이미 나온 마당이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최민혁도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이게 좀 애매한 부분이다.
좋은 게 좋다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최병연 소장의 권한을 어느 정도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콜린스 신화를 고려한다면 최민혁의 처지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조성돈 팀장도 그런 점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기획 팀은 앞으로 더 긴장해야 할 겁니다. 이대로 계속 최민혁 실장님이 주도한 일에 끌려다녀서는 곤란합니다.”
“…….”
기획 팀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스티븐 관련 이슈는 끝났지만, 기획 팀에게 남은 숙제는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