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
이 축하 자리에는 KM 그룹 일가가 전부 참석했다.
아이들까지 같이한 자리인 터라 비즈니스 자리와는 달랐다.
별장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자리에는 최용욱 회장이 입가에 미소를 가득 띤 채 옆에 앉은 최민혁이 아니라 정미선을 추켜세우기 여념이 없었다.
“영화 일은 힘들지 않으냐?”
“아버님, 아닙니다. 제 적성에도 맞고, 앞으로 계속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혹시 회사 일은 관심이 없느냐?”
“전 사업하고는 안 맞습니다.”
정미선은 최용욱 회장 질문에 정중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이 마냥 부담스럽기만 했다.
단순히 KM 그룹 일가만이 아니라 사장단의 시선도 열기로 가득했다.
이 모든 사태는 역시나 아들 최민혁 때문이다.
맞은편에 앉아서 포도주를 홀짝이는 최민혁은 이 광경을 보고 꽤 만족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정미선을 같이 부른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인생 1회 차라면 온갖 비웃음이 가득한 자리였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다.
경의.
특히 KM 그룹 사장단이 보이는 시선은 절대 가볍지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겉으로는 살갑게 최민혁을 대했다.
그런데 그의 두 눈은 질투로 차갑기만 했다.
반면 그의 아내 김이경 여사는 착한 큰며느리 역할에 여념이 없었다.
오히려 장녀 최영란이 김이경 여사를 어이가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까칠한 차녀 최지연은 김이경 여사를 향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엄마, 창피하지 않아?”
“…무슨 말이니?”
“막내 작은 엄마를 스토커처럼 그렇게 괴롭히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 딸처럼 대하는 것이 눈에 거슬려서 그래. 사람이 좀 그렇지도 않아?”
김이경은 눈치껏 최지연에게 등 스매시를 달렸다.
“야!”
“왜?!”
모녀의 갈등 소리가 작긴 해도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다들 그쪽을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피했다.
최영란이 오히려 한숨을 내쉬었다.
“민혁아, 미안하다.”
“괜찮아요.”
최민혁은 김이경이 최지연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힐끗 봤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들을 탓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최문경 부회장과 시선을 마주했다.
두 사람 사이에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겉으로는 조카를 대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은 그렇지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최민혁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바로 KD LCD 설립과 관련해서 죽어라 뛰어다닌 일 때문이다.
물론 이 회사 설립은 이제 8부 능선을 넘었지만, 그게 썩 좋게 느껴지질 않았다.
회사 설립이 어느 단계를 넘어가자 이상한 점을 느낀 것이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 아직 몰랐다.
그래서 오늘 모임 자리를 통해서 그 부분을 확인하고 싶었다.
최문경 부회장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최민혁은 이를 기회라고 생각하여 최문경 부회장을 자극하려고 했다.
“우리 큰…….”
하지만 눈치 빠른 최용욱 회장이 냉큼 끼어들었다.
“민혁아, 그동안 고생했다.”
“아, 네, 아닙니다.”
“아니다. KD LCD 설립을 네가 나서서 돕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일이 해결되지 않았을 거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할아버님께서 적극 나섰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니다.”
실제로 그러했다.
김호동 교수가 나서서 VA 패널과 관련된 기술을 적극 도와주었다. 심지어 그는 오성 전자에 넘긴 기술을 이용해서 VA LCD가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이 모든 일은 최민혁이 뒤에서 은근슬쩍 손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쿵저러쿵해도 어차피 수익이 그의 손바닥에 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VA 패널은 스마트폰에 적합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핸드폰 패널에는 사용할 수가 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잘 모르는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이 아주 고맙기만 했다.
그는 누구보다 두 사람의 대립과 갈등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장단의 시선도 기묘하게 변했다.
그들 역시 두 사람이 극단적인 대립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들은 오히려 조용히 옆자리에서 침묵한 최동영 상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아내 조희정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경영권 갈등은 최문경 부회장과 최동영 상무의 싸움이어야 했다. 그런데 최동영 상무를 대신한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런데 최동영 상무는 겉으로는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마 감옥에 있는 최훈열 전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정말 볼만한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는 최소한 최동영 상무처럼 조용한 스타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이 이런 분위기를 읽었다. 그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원한 건전한 경쟁 때문이다.
그런데 장승일 실장이 갑자기 나타나서 최용욱 회장에게 뭔가 보고했다.
최용욱 회장의 표정이 곧 바뀌었다. 그는 비서 한 사람에게 손짓해서 정원 한쪽에 설치된 대형 TV를 켜게 했다.
곧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뉴스 속보였다.
[에플 창립자인 스티븐, 내한하다!]
최민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딱 좋군.’
TV에서 송출되고 있는 화면은 다름 아닌 스티븐이 공항에서 기자 회견을 하는 장면이었다.
범용구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 밀었다.
[가만, 그렇다면 스티븐이 내한한 이유가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과 협상을 하기 위함이란 말입니까?]
[저는 이번 자리에 에플 대리인의 자격으로 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정확히는 에플과 KM 전자가 손을 잡도록 돕는 겁니다. KM 전자가 최근 발표한 KMP-01은 에플과 손을 잡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제품입니다.]
[하지만 이미 KMP-01은 이미 출시가 된 상황인데, 굳이 에플의 도움이 필요하겠습니까?]
[KM 전자의 역량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여러 면에서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 단점을 잘 알기에 선택과 집중을 했습니다. 그 성과는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레벨을 올리려면 지금과 같은 형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에플이라면 KM 전자가 단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콜린스는 여러 가지로 응용할 여지가 많은 제품입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건 협상 내용이라서 이 자리에서 밝히기 그렇습니다.]
화면이 곧 바뀌면서 나온 이는 바로 아나운서였다. 그는 평소 뉴스를 내보낼 때와는 달리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실로 놀라운 소식입니다. 에플의 창립자인 스티븐이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과 미팅을 하기 위해서 내한했다는 겁니다. 지금 인터뷰에서 스티븐이 밝힌 내용이지만…….]
KD 설립 축하 파티장에 갑자기 침묵이 감돌았다.
다들 황당한 표정으로 최민혁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들은 설마 에플 창립자인 스티븐이 한국에 최민혁 실장을 만나러 올지는 상상조차 못 했다.
물론 스티븐의 이름이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퇴색된 바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티븐 명성이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에플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미국에서는 망해간다는 소리가 파다하지만, 한국인은 그걸 잘 몰랐다.
다만 최용욱 회장만큼은 에플의 상황이 어떤지 들어봤기에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
최민혁은 따가운 최용욱 회장의 시선에 혀를 차면서 포도주를 홀짝였다.
오늘 축하하러 온 인사 대부분이 최민혁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최용욱 회장은 힐끗, 아직도 깊은 고심에 빠진 장승일 실장을 쳐다본 후에 최민혁을 바라 봤다.
“스티븐이 그렇게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과거에는 그랬습니다만 지금은 한물간 인물일 뿐입니다.”
“그게 네 평가냐?”
“지금은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모르는 일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최민혁은 너무 놀라서 칭찬하기는커녕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최용욱 회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옆에 앉은 최문경 부회장은 마치 썩은 동태 같은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일 거야.’
물론 이건 다 최민혁이 원한 바였다.
다만 그도 스티븐이 공항에서 기자 회견을 통해서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낼 줄은 몰랐다.
‘의도한 거겠지. 에플 이사회를 압박할 절호의 수단이니까.’
정확히는 에플 임직원에게 스티븐이 제대로 광고를 한 셈이다. 에플 이사회가 스티븐을 좋아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 효과는 이 자리에서도 나타났다.
KD LCD 설립 축하 파티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다들 스티븐의 이야기만 했다.
최민혁은 평소와는 달리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자기 몸값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최용욱 회장조차 몸이 달아서 스티븐과 관련된 질문을 계속했다.
“민혁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원래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정도입니다.”
“허허.”
최용욱 회장은 까칠한 손자 반응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최민혁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침묵이 더 최민혁을 오늘 잔치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 * *
집으로 가는 차량 안에서 정미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너, 정말 내 아들 맞아?”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겁니다.”
“인석이!”
그녀는 등짝 스매시를 날렸다. 하지만 최민혁은 무덤덤했다. 너무 듬직해서 진짜 자신이 낳은 아들인지 의심스러웠다.
“우리 아들, 정말 대단하더라.”
“그렇습니까?”
“엉, 난 아버님이 처음에 그이를 생각해서 그렇게 도와주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더라. 전부 네가 부담스러워서 그렇게 한 것 같아.”
“맞습니다. 그러니 엄마도 앞으로는 절 믿고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고맙구나.”
갑자기 습기가 눈을 가리자 정미선은 다급하게 차창 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녀는 남편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싶었다.
최민혁은 그런 정미선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늘 마음에 두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생 1회 차에서도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을 결국 파헤치지 못했다.
‘다만 아무런 혐의가 없다면 나를 그렇게 주시할 필요가 없었겠지. 첫째 큰아버지의 행동이 단순히 날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 그리고 이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좀 더 힘이 필요해. 그렇다면 차라리 스티븐이 깔아놓은 이 판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야.’
* * *
스티븐의 방한 소식이 뒤흔든 것은 KM 그룹만이 아니다.
한국 기업이라면 다들 스티븐의 방한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최민혁은 KM 전자 본사에 복귀하자 바로 이 부분에 관한 조사를 지시했다.
조성돈 팀장도 이제는 꽤 최민혁에게 단련을 받아서인지 필요한 정보를 잘 취합했다.
그는 그중에 오성 전자에 관한 것을 유심히 살폈다.
“오성 그룹에서 움직이고 있다고요?”
“아무래도 스티븐이 가지는 파급 효과가 있으니까요. 그런 점을 이용하려 한 것 같습니다.”
“그렇죠. 스티븐은 필요에 따라서 얼마든지 이용할 수단이 많은 사람이니까.”
“역시 미국 내의 비즈니스 때문일까요?”
“아마 그게 클 겁니다. 국내에서 스티븐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면 미국 사업은 좀 더 쉬울 수 있을 겁니다.”
“전 설마 오성 그룹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이익이 크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최민혁조차 인생 1회 차에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하긴 그때는 스티븐이 한국에 올 일도 없으니까. 애초에 스티븐이 한국에 관심이 있을 사람은 아니었지.’
최민혁은 이미 최병연 소장을 통해서 새로운 아이템을 정해 놓았다.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 스케치해 둔 제품 아이디어를 조성돈 팀장에게 보여주었다.
이미 최병연 소장에게 지시를 내려서 진행이 되고 있는 제품이었다.
“콜린맥입니다.”
“콜린맥이라…….”
조성돈 팀장은 동그란 눈으로 최민혁의 디자인을 묵묵히 살폈다. 그도 전혀 간과한 아이템이었다. TV 모니터와 컴퓨터용 모니터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오히려 더 쉽게 말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컴퓨터 본체와 콜린스를 결합한 제품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딱 그것에만 집중하세요.”
“콜린스와 컴퓨터를 일체화시킨 제품을 말씀하시는 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