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
“에이, 그놈이나, 저놈이나 다 최 실장이 오너 아닙니까?”
최경진 편집장도 이제 어지간한 사람이 다 아는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티븐이라…….”
컴퓨터 데스크톱 시장을 개척한 인물이자.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만든 개척자.
창의적인 제품을 앞세워서 광고에 혁신을 불어넣은 이다.
마케팅 전략에 대한 스티븐의 행보는 이미 신화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설립한 에플에서 쫓겨나서 더 주목받는 이다.
‘NextOS 상황이 안 좋다고 했어. 에플에서 번 돈을 다 까먹었으니까. 픽사 쪽 역시 좋은 상황은 아니잖아. 어쩌면 그래서 더 절박한 것일까?’
그렇다고 스티븐과 최민혁 실장을 연결시킬 수는 없었다.
“이상하군. 스티븐이 고작 최민혁 실장을 보러 한국에 온다니?”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KM 전자가 아니고서야 스티븐이 한국에 올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둘 사이에 뭔가 모종의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범용구 기자는 특파원 쪽에 나가 있는 기자 통해서 얻은 벨린 투자와 스티븐의 정보를 토대로 추측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스티븐의 상황이 안 좋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NextOS는 사업이 흔들리는 중이고, 그나마 5,000만 달러를 투자한 픽사 역시 추락을 거듭 중입니다.”
“그것으로 힘들어.”
“물론입니다. 다만 그런 그가 만약 뒤늦게 ARN 지분 매각 소식을 알았다면, 그것도 최종적으로 그 지분을 쥔 이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냥 있을 리가 없습니다. 뭔가 행동으로 보였을 겁니다. 어쩌면 와컴 인수가 그 정점을 찍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스티븐은 현재 에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잖아.”
“아마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스티븐도 나서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에플이 망해가는 상황입니다. 에플 이사회가 에플을 살리려고 계속 외부 수혈을 거듭하는 중이죠. 토비 CEO도 그 대상 중의 하나입니다. 스티븐이라면 이런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닙니다.”
범용구 기자도 편집장을 설득하면서 한 말이 그럴듯해서 자기 스스로도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내 추측대로 되는 것은 아니겠지?’
최경진 편집장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KM 전자를 알았고, 자신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을 만날 이유로 충분하다?”
“네. 틀림없습니다.”
“좋아. 내가 4~5명을 붙여줄 테니, 제대로 기사를 따 와!”
“알겠습니다!!”
‘성공이다.’
* * *
범용구 기자는 취재를 준비하면서 슬그머니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오혜정 비서를 통해서 최민혁 실장과 바로 통화를 할 수가 있었다.
그는 냉큼 최민혁 실장의 가슴을 쿡 찔렀다.
[최 실장님, 혹시 스티븐과 약속을 잡았습니까?]
최민혁은 내심 깜짝 놀랐지만, 말을 돌렸다.
[스티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 정말 모르세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최민혁은 냉큼 강하게 나갔다.
[자꾸 주어를 빼고 이야기하면 전화를 그냥 끊겠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스티븐이 오늘 오후 3시에 도착합니다. 혹시 그 일이 최민혁 실장님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렇습니까?]
최민혁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썩어도 준치라고 설마 스티븐의 내한 정보를 한영 일보에서 얻었을 줄은 몰랐다.
다만 그도 잠깐 고민을 해보았다. 조용히 만나서 이야기기만 나누느냐 아니면 공론화하느냐 하는 부분이다. 어느 쪽이든 일장일단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에플 이사회를 흔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아는 것이 유리해.’
그건 스티븐에게는 판을 좀 더 키우는 결과가 된다.
이게 최민혁에게도 꽤 나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스티븐이라면, 설마 에플의 그 스티븐을 말하는 겁니까?]
[넵! 역시 최 실장님과 무슨 사전 약속이 있는 것이겠죠?]
처음에는 슬쩍 부인했다.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하지만 스티븐이 굳이 오성 전자나 LC 전자와 만나려고 한국에 올 이유는 없습니다. 더욱이 한국 정부 관계자는 아닐 거고 말이죠.]
이게 포인트.
최민혁은 강하게 부정했다.
[자꾸 허위 사실을 계속 실제인 것인 양 나오면 재미없을 겁니다.]
[이 일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입니다.]
[흥, 기업끼리의 비즈니스가 무슨 국민의 알 권리와 관련이 있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 건과 관련해서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유포하면, 당신네 한영 일보를 절대로 그냥 안 둘 겁니다!]
[하지만 최 실장님이 오히려 더 부정하니, 이상합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저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전화가 곧 끊어졌다.
하지만 범용구 기자는 최민혁 실장의 소심한 태도에 확신했다. 그가 아는 최민혁 실장이라면 정말 사실이 아닌 경우 강력하게 협박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의 반응을 통해서 그는 이번 일에 최민혁 실장이 관련돼 있다고 확신했다.
‘이거 정말 특종인 거야? 가만, 스티븐을 만나보면 알겠지.’
* * *
범용구 기자는 기대를 한 채 공항으로 갔다. 다행히 얼마 있지 않아서 스티븐이 공항 로비 쪽으로 나타났다. 경호원과 수행원을 동반한 채 청바지를 입은 가벼운 차림이었다.
간혹 공항을 오가는 이들 중에 스티븐을 알아보고 고개를 갸웃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유명한 스티븐이 한국의 공항에 나타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범용구 기자는 100m 단거리 선수처럼 잽싸게 스티븐을 향해서 뛰어갔다.
그런데 곧이어서 나타난 다른 기자 몇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뒤늦게 서로를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눈치는 정말 빠르다니까.’
그들 역시 공항 내의 출입국 관리소나 아니면 다른 통로를 통해서 스티븐의 내한 정보를 얻은 것이 분명했다.
‘쳇, 독점이라고 생각했는데…….’
공항에 도착한 스티븐은 시차 적응과 더불어 최민혁 실장과의 미팅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기 때문에 피곤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시점이 정말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것을 알기에 애써 피로를 떨쳐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앞을 한국 언론사 기자들이 막아섰다.
모두 십여 명이 좀 넘었는데, 그들은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스티븐, 내한을 축하합니다!”
“흠.”
자신의 한국 방문은 갑자기 정해진 것으로, 비밀스럽게 진행된 일이다.
때문에 굳이 한국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몰려온 기자들 때문에 난감해진 스티븐은 힐끗 마크 실러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마크 실러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유연한 자세로 기자들 앞에 나서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범용구 기자는 웬 하루살이를 제친 뒤 스티븐의 얼굴 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그는 다른 기자처럼 쓸데없는 질문이 아니라 핵심을 찔렀다.
“혹시 오늘 내한한 이유가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을 만나려는 것이 아닙니까?”
몸싸움하는 다른 기자들 역시 깜짝 놀라서 스티븐 입을 쳐다보았다.
스티븐 역시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한국 기자가 어떻게 자신의 내한 목적을 아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 범용구 기자가 쾌재를 부르는 모습을 보곤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순간 당황했다.
최민혁 실장만 생각한 나머지 앞으로 일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에 대해서 정하지 않았다. 아니, 호텔에서 정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일이 터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독특한 에플 광고 전략을 통해서 역사적인 인물이 된 바 있다.
곰곰이 고민한 끝에 스티븐은 굳이 이들 한국 기자를 무시할 이유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사실입니다.”
시원스런 답변에 오히려 범용구 기자가 놀랐다. 그는 스티븐과 최민혁 실장을 엮어서 재미를 볼 생각만 했다. 두 사람의 진실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저, 정말입니까?”
“제가 굳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실…….”
그런 스티븐도 잠깐 머뭇거렸다. 놀랍게도 방송사 기자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더 신경을 쓸 이유는 없었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항 직원의 도움을 얻어서 아예 임시 기자 회견장을 차렸다.
“제가 이렇게 갑자기 한국을 찾은 이유는 당연히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과의 비즈니스 때문으로…….”
* * *
최민혁은 범용구 기자에게 적당히 판을 깔아준 후에 스티븐과 에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당장 그가 스티븐에게 내놓을 만한 카드가 필요했다.
결국 최병연 이사를 불러 지금 진행되는 프로젝트 리스트를 확인했다.
그중에는 미처 간과한 부분도 있었다.
“이건 뭡니까? 모니터용 콜린스라니?”
“TV용 콜린스와는 다른 컴퓨터 모니터용 콜린스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TV와 모니터에 사용되는 패널이 좀 다릅니다.”
둘은 기본적으로 화질에 대한 세팅이 다른데, 전자는 블랙이나 레드 색을 더 강하게 할 수 있는 반면에 후자는 가독성이 핵심이다.
그런데 콜린스는 근본적으로 화질에 초점이 맞추어진 제품이다.
개발 전 단계에서 이 부분에 대한 트레이드 오프가 있었다.
두 가지를 다 수용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결국 KM 전자의 특성상 TV용 패널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하지만 콜린스 자체가 가지는 가독성도 가볍게 볼 수는 없었다.
때문에 여기에 대한 연구는 따로 진행이 되었다.
최병연은 소장이 된 후에 이 연구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렸다.
“양산성 검토가 끝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모두 실장님 덕분입니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의 선택과 집중이 효력을 발휘했다.
KM 전자의 여건 자체가 콜린스와 관련된 연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최민혁은 최병연 소장의 판단에 혀를 내둘렀고, 그의 안내를 받아서 TV 연구 팀을 직접 찾아갔다. 그곳에서 시제품인 컴퓨터 모니터용 콜린스를 볼 수 있었다.
외형은 TV용 콜린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옆에는 최구만 과장, 김갑래 과장, 윤선기 과장 세 사람이 피로에 지친 표정을 한 채 최민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서는 전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 때문에 말이 많았는데, 이 연구를 끝까지 마무리했다니, 진정으로 놀랐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최병연 소장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경영과는 무관하게 일을 진행했던 것이다.
최민혁은 새삼 최병연 소장 사단의 행보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러면 지금 바로 양산은 가능합니까?”
“그건 좀 더 검토를 해야 합니다.”
“잘되었네요. 말 나온 김에 이것도 한번 연구를 해보세요.”
최민혁이 내놓은 것은 인생 1회 차에서 스티븐이 에플로 복귀한 후에 내놓은 모니터, 본체 일체형 컴퓨터였다.
“…이건 흥미롭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을 겁니다. 콜린스 디자인에서 본체를 넣을 만한 틈은 많습니다.”
“좋네요.”
‘최병연 소장이 집요한 면이 있지.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어. 이제 스티븐의 반응을 보면 되는 걸까?’
* * *
최민혁은 스티븐의 방한 특종을 기대하는 중에 다시 걸려온 최용욱 회장의 전화에 골치가 아팠다. KD LCD 설립 축하 파티 참석 요청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계속 거절했는데, 최용욱 회장이 계속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다만 최용욱 회장도 최민혁의 강한 부정에 결국 초대를 포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최민혁이 직접 최용욱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번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최용욱 회장은 환호했다.
파티 시간은 시기적으로 봤을 때 스티븐 방한 소식이 딱 나오는 시점.
KM 그룹에 대한 영향력을 좀 더 키울 수 있는 괜찮은 장소다.
‘특히 우리 첫째 큰아버지를 자극하기에 딱 좋은 소재인데…….’
스티븐의 행보를 본다면 최문경 부회장도 지금처럼 소극적으로 나오기는 어려웠다.
‘가장 큰 것은 역시 TV 사업부 몸값을 키우는 것이니까. 아마 그걸 생각하면 탐욕 때문에 뭔가 일을 크게 벌일 거야.’
결국 그는 최용욱 회장의 제안을 받아서 KD LCD 설립 파티에 참석했다.
KD LCD 계열사 설립 축하를 벌이는 별장은 고즈넉했다.
별장 앞을 지나는 강과 그 주변에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KM 그룹 내의 사장단도 같이 이 자리에 참석했지만, 누구 한 사람 들뜨지 않았다.
KD LCD 계열사 설립을 축하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회사의 중요 자리를 노리는 이들은 쉽게 탐욕을 떨치지 못했다.
구조조정 때문에 한창 위축되던 KM 그룹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