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
하지만 아맬리오 이사의 감정 역시 토비 CEO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에플을 위기에서 구제해야 한다는 욕망에 집착해 있었다.
그가 벼랑 끝에 몰리지 않고서야 스티븐을 만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이사회를 소집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이 물건을 보세요.]
그가 이사회 회의 테이블 위에 올려둔 것은 바로 KMP-01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이와 관련된 상세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도 있었다.
그중에는 냅스터와 관련된 부분도 있었다.
토비 CEO는 아맬리오 이사의 말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눈앞에 놓인 보고서 자체를 패스할 수는 없어서 일단 확인은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냅스트와 관련이 있는 KMP-01을 그냥 간과할 수는 없었다.
냅스트의 유저가 미친 듯이 빠져 있는 물건이 바로 이 KMP-01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내에서 판매되지 않아서 오히려 한국에 가서 제품을 사온 이들도 있었다.
이 의미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바로 제조업과 IT 산업이 절묘하게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토비 CEO는 이 KMP-01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깨달았다.
‘이건 메시지 패드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잖아!’
창백하게 변한 토비 CEO는 슬쩍 에플 이사회 임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그들 역시 바보는 아니었다. 자기 앞에 놓인 결과물과 보고서를 보면서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심지어 눈치 빠른 이는 ‘아, ARN 지분!’이라고 탄식한 이도 있었다.
MP3 음원과 관련된 원천 기술은 당장 ARN CPU와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메시지 패드에 담겨 있는 비전이 딱 그와 같았다.
에플 이사회가 아무리 욕망에 미쳐 있다고 해도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토비 CEO는 자신이 했던 일과 관련이 있자 살기가 가득한 아맬리오 이사의 시선을 피했다.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맬리오 이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보고서 마지막에 적혀 있는 한 항목을 보자 탄식하고 말았다.
[…설마 와컴 지분을 인수한 회사가 KM 전자였다니.]
KM 전자의 와컴 지분의 인수는 한국에서도 말이 많았다.
실상 일본에서는 이 일이 한국에서보다 더 크게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전자 펜과 관련이 있는 미국 사업가들 역시 이 사건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와컴의 성향이 얼마나 보수적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와컴이 어째서 KM 전자에 굴복했는지 이해를 못 하는 이도 많았다.
토비 CEO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아맬리오 이사 역시 와컴의 지분 매각에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그런데 그 일의 시작이 결국 에플의 ARN 지분 매각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토비 CEO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모두 사실입니까?]
아맬리오 이사 역시 토비 CEO가 실패하면 그 바통을 이어받아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토비 CEO를 자극하지 않았다. 이 사태에 관한 책임을 토비 CEO에 돌려야 했다.
[그러면 제가 없는 말로 토비 CEO를 비방하겠습니까. 가장 큰 문제는 ARN 지분을 매각한 겁니다. 그 일이 KM 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그건…….]
토비 CEO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에플 매각을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ARN 지분 매각을 그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도 억울했다. 에플 이사회가 자기 말을 전격 수용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주제를 돌렸다.
[이 일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핵심은 아닙니다. 기존 OS가 윈도우에 밀린 것이 전임자가 MS와 미친 계약을 했기 때문 아닙니까. 지금 집중해야 할 일은 바로 OS입니다. ARN과 같은 일에 매달릴 여유가 없습니다!]
[토비 CEO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벌떡 일어난 아맬리오 이사는 삿대질까지 하면서 토비 CEO를 맹비난했다.
에플 이사회는 다시 쪼개지면서 각자 자기주장만 외쳤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자 에플 이사회 회의는 또다시 개판이 되고 말았다.
아맬리오 이사가 이를 보다 못해서 양손으로 회의실 테이블을 쾅쾅 내려쳤다.
[정신 좀 차리세요!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면서도 이럴 겁니까? 에플이 망하기를 바라는 겁니까?!!!]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 소리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가슴속에 쌓인 것을 털어놓은 에플 이사회는 그제야 서로 눈치를 봤다.
[한 시간 후에 다시 회의합시다!]
* * *
토비 CEO는 에플 이사회실을 나서기가 무섭게 자기 사무실로 돌아와서 KMP-01과 KM 전자에 대한 자료를 실무진에게 요청했다.
다행히 이미 KM 전자에 관한 조사는 꽤 진행되어 있었다.
그 원인이 와컴 지분의 인수 때문이었으니.
“…이거 정말이야?”
“네. 사실입니다. 하도 이상해 수십 차례 검토를 한 결과입니다.”
“아니, 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보고를 안 한 거야?”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에플 구조조정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토비 CEO의 주장은 딱히 무리한 지시는 아니었다. 망해가는 에플 입장에서는 KM 전자 일을 들여다볼 여건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이 정보를 사전에 알았다면 다른 판단을 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지난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
토비 CEO는 KM 전자와 관련된 항목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 과정에는 에플도 한 역할을 했다.
정확히는 토비 CEO 자신이었다.
‘내가 미쳤었구나.’
하지만 이건 토비 CEO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외부 시선을 피하려고 포복 자세로 박박 기었다.
그리고 당시 에플 이사회는 망해가는 에플을 어떻게 해서라도 구하기 위해서 정신이 없었다.
이사회는 모였다 하면 서로 이권을 가지고 싸우기만 했다.
그런 혼란을 만든 주범 중의 하나가 토비 CEO 본인이었다.
아니, 그는 정작 그 와중에 상대 의중을 짐작도 못 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팔아버렸다.
이제는 에플 매각이 문제가 아니었다.
에플의 가치가 가장 큰 문제였다.
만약 에플이란 기업의 상품 가치가 없다면 다른 기업에서 에플을 순순히 사들일 리가 없다.
‘설마 IBM이 에플 인수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도 이런 문제 때문일까?’
토비 CEO는 식은땀을 닦으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 일단 OS 문제를 서둘러서 종결시켜야 해.’
에플의 지금 OS는 MS의 윈도우 때문에 박살이 나서 가망성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차세대 OS를 찾아야 하는데, 윈도우의 대항마로 마땅한 OS가 없었다.
‘그나마 BeOS가 있기는 한데, 평이 너무 안 좋아.’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토비는 뒤늦게야 고민을 거듭하다가 전 에플 CEO인 스컬리에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스컬리가 비록 메시지 패드를 실패하기는 했지만 나름의 꿈은 있었다.
다만 그 꿈은 소설에 불과했다.
뉴턴 메시지 패드는 유저를 유혹할 만한 콘텐츠도 없었고, 편리한 프로그램도 없었으며, 멀티 터치는 최악이었다.
배터리 역시 취약해서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데 KMP-01은 이야기가 달랐다.
최적의 CPU에, 최적화된 콘텐츠, 편리한 프로그램, 심지어 단순한 제어 버튼이 있었다. 거기에 최적화된 배터리 관리를 통해서 사용 가능 시간도 제법 길었다.
버튼식이 멀티 터치로 답답한 메시지 패드보다 오히려 더 나았다.
‘MS와 사기 계약만 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쯤이면 이 KMP-01 문제에 집중했을 텐데…….’
스컬리가 떠나면서 에플이 가진 OS 특허 일부를 팔아 치운 것이 컸다.
MS는 특허의 맹점을 활용해서 윈도우의 업그레이드를 반복했다.
결국 올해 와서 제대로 대박을 터뜨렸는데, 그 일이 에플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토비 CEO는 다시 한번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대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건 자신의 경력에도 치명적이었다.
‘대안이 필요해.’
* * *
한 시간 후가 아니라 다음 날로 연기된 에플 이사회 회의는 전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다들 KM 전자의 이력을 살핀 터라 나라 잃은 표정이 대부분이었다.
그들도 뒤늦게야 KMP-01이 뉴턴 메시지 패드의 다운그레이드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KMP-01에 적용된 기술이 뉴턴 메시지 패드의 맹점을 극복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중에는 한국이란 나라 이름을 처음 들어본 이도 있었다. KM 전자라는 회사 명칭도 몰랐다.
그런 듣보잡 회사가 자신이 실패한 뉴턴 메시지 패드와 비슷한 상품을 상업적으로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쇼크는 생각보다 컸다.
아맬리오 이사 역시 맥이 빠져서인지 토비 CEO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침울한 토비 CEO를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생각입니까?”
토비 CEO는 뒤늦게 따가운 에플 이사회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KMP-01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지금 당면한 문제는 OS입니다. 파워북이 망한 것도 상업적인 OS가 없기 때문입니다.”
OS 이야기가 나오자 에플 이사회는 또 고개를 푹 숙였다.
이야기는 다시 전 에플 CEO인 톰 스컬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메시지 패드란 유산을 만든 이가 톰 스컬리다.
당시에는 이 메시지 패드가 실패하는 바람에 현대판 돈키호테라며 비웃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톰 스컬리의 꿈이 실제로 세상에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맬리오 이사도 토비 CEO의 지적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BeOS 이야기가 나오는데, 전 스티븐 역시 괜찮은 협상 상대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안 됩니다!”
버럭 소리친 이는 에플 이사회 임원이다. 그들 중에 특히 스티븐 퇴출에 앞장선 이다. 스티븐이 회사로 돌아오면 자신은 끝장이라는 것을 잘 아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맬리오 이사도 평소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KM 전자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대로면 정말 에플은 끝장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회사가 물러날 자리가 없다는 것은 잘 알 텐데요. 설마 에플이 망하면 당신들이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
“우리 솔직해집시다. 지금 이대로 상황이 악화되면 회사 매각은 더 어려워질 겁니다. 에플이 잠재력마저 없어지면 그 누구도 거들떠도 안 봅니다!”
“…….”
에플 이사회는 서로 눈치를 봤다. 그들은 KM 전자와 최민혁 실장에 관한 보고서를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아맬리오 이사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제야 토비 CEO를 쳐다보았다.
“지금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극약 처방도 감수해야 합니다. 스티븐은 나름 우리에게 맞는 사람입니다. 그 역시 NextOS 설립 후에 많은 풍파를 경험했고, 지금은 좀 달라졌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더욱이 NextOS가 하드웨어 사업부는 팔아 치웠지만, OS 사업부만큼은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자는 겁니까?”
“일단 스티븐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죠. 그가 대안을 내놓는다면 그의 제안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에플 이사회는 여전히 스티븐과 협상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그건 토비 CEO 역시 다르지 않았다.
“후유, 좋습니다. 스티븐이랑 이야기해 봅시다!”
* * *
스티븐은 아맬리오 이사의 제안을 받아서 토비 CEO를 만났다. 그는 그 자리에서 NextOS가 가진 OS의 장점을 절절하게 설명했다.
스티븐의 설명은 꽤 호소력이 있었다.
NextOS가 가진 OS가 최소한 파워북에 사용된 OS보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앞서 있었다.
더욱이 강력한 보안 체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NextOS의 OS는 윈도우보다 오히려 더욱 강력한 OS였다.
원래라면 BeOS와 경쟁을 해야 하는데, 상황이 그렇게 여유롭지가 못했다.
에플은 어떻게 해서라도 돌파구가 필요했다.
스티븐은 토비 CEO와 아맬리오 이사의 입맛에 맞는 제안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