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
스티븐은 한숨을 내쉰 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아맬리오 이사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 역시 에플 매각 때문에 에플 이사회 내에서 밥그릇 싸움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랬기에 KMP-01의 가치를 뒤늦게 안 것이다.
자연스럽게 ARN 지분의 가치를 다시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스티븐이 아니라면 상황은 최민혁의 인생 1회차처럼 흘러갔을 것이고, KMP-01를 다시 평가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티븐이 MP3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냅스트 소송 이후다.
이 시점부터 MP3 플레이어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몇 년이 지난 후에 일어날 일이 최민혁 실장의 행동 때문에 바뀐 것이다.
아맬리오 이사의 표정이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바뀌었다.
스티븐은 그런 그를 위해서 친절하게 KM 전자의 와컴 인수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금 봐서는 터치 문제 때문에 와컴을 인수했을 겁니다. 메시지 패드가 실패한 원인 중의 하나는 느려 터진 펜 응답 특성 때문이니까.”
“하면 일본에서 난리가 난 와컴 지분의 인수가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란 겁니까?”
“물론입니다. 심지어 와컴 인수 이전에 KM 전자는 벨린 투자를 이용해서 커닝의 켐코 사업부를 따로 인수했습니다. 그런데 이 켐코 사업부가 만드는 제품이 바로 특수 유리입니다. 이 유리는 일반적인 유리와 달라서 경도가 무척 강합니다. 기스가 잘 안 나는 특수한 유리인 셈입니다.”
“그 말은 메시지 패드에서 문제가 된 터치 표면에 생기는 기스를 막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저도 확인해 보고 나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마 커닝은 아직도 왜 KM 전자가 켐코 사업부를 인수했는지 모를 겁니다.”
사실 KM 전자 아이템과 켐코 글라스를 깊이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스티븐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이건 도대체가…….”
아맬리오 이사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갑자기 해머로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패닉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 잠깐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스티븐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후다닥 밖으로 나서는 아맬리오 이사의 모습에 혀를 찼다. 그는 다시 한번 KMP-01을 살펴보았다.
다만 그 역시 보고서 중의 한 가지 항목을 확인한 후에 곧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자신은 MP3 저작권 문제가 MP3 산업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MP3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면 상황이 좀 다르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수요가 되기 때문이다.
‘이건 뭐지. 미국 음반 협회가 냅스트에 소송을 걸었다고?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잖아. MP3 플레이어에 관한 관심이 폭발할 텐데…….’
* * *
최민혁은 스티븐이 엮인 상황을 중요하게 생각해도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다. 차기작 개발이 이미 9부 능선을 넘은 상황에서 굳이 스티븐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만 기획 팀은 상황이 좀 달랐다. 그들은 위기감을 느낀 탓에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덕분에 스티븐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를 보고받았다.
다만 그 자료가 간접적인 방식이라서 정보의 한계가 명확했다.
‘어지간하면 기획 팀을 믿고 싶지만 그럴 수만은 없지.’
결국 최민혁은 VLSI의 마크 듀켄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NextOS 측에서 모바일 OS 관련 특허를 출원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쪽은 모바일 OS 쪽과는 관련이 없을 텐데, 혹시 아는 것이 있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마크 듀켄 이사 역시 최근 KM 전자가 와컴 지분을 인수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제 최민혁 실장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아는 지인을 통해서 NextOS 상황을 확인했다.
다행인 일이라면 에플 쪽에 아는 지인이 있어서 관련된 정보를 금방 얻었다.
그는 최근 스티븐이 에플의 아맬리오 이사를 만난 정보를 얻었다.
더욱이 아맬리오 이사는 스티븐을 만난 이후에 KM 전자에 관한 조사에 들어갔다.
[우리 쪽으로도 정보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스티븐이 나간 직원에 의혹을 느끼고 따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KM 전자의 행보를 파악했고, 위기감을 느끼자 바로 특허 출원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스티븐 생각은 좀 달랐나 봅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특허를 출원한 것 같습니다. 그는 전 에플 CEO인 스컬리가 MS에게 된통 당한 것을 보고 이번에는 그런 상황을 반복하기 싫다고 했습니다.]
[하, 그렇습니까?]
[지금 에플의 몰락 원인 중에 하나는 스컬리의 황당한 삽질이니까요. 특히 MS와 밀실에서 몰래 한 계약은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스티븐이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스컬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욕설을 퍼부었을 정도입니다.]
[그건 또 몰랐습니다. 하, 혹시 스티븐이 절 스컬리 취급하는 것은 아니겠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마크 듀켄 이사는 말하기 곤란한 부분은 슬쩍 넘긴 후에 주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스티븐 때문에 에플 이사회가 KM 전자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연결 고리가 스티븐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좀 이상하군요. 스티븐이 아맬리오 이사와 사이가 좋을 리가 없을 텐데요?]
[아맬리오 이사가 그나마 토비 CEO보다는 좀 나은 편입니다. 그 역시 에플 구조조정에는 찬성하지만 에플을 매각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토비 CEO는 에플 기업을 IBM과 같은 기업에 팔아 치울 생각이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IBM은 에플에 관심이 있기는 하지만 선뜻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지금 에플은 과거의 그 에플이 아닙니다.]
[에플이 아직은 그런 여유가 없을 텐데요?]
[냅스트 소송이 본격화되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요즘 MP3 사용자가 급증했습니다. 그것이 미국 음반 협회에도 큰 압력을 준 것 같습니다.]
[…그건 뜻밖에 소식이군요.]
[만약 미국에서 KMP-01 판매를 시작한다면 매출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언제라도 필요하면 연락을 주십시오.]
[그러죠.]
최민혁은 전화를 끊고 나서는 피식 웃고 말았다. 달랑 전화 한 통으로 스티븐이 지금 뭘 하는지 파악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조성돈 팀장이 스티븐과 관련된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그는 조성돈 팀장에게 부랴부랴 스티븐과 관련된 보고를 받으면서 혀를 찼다. 자신이 전화 한 통으로 얻은 정보보다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성돈 팀장의 보고에는 스티븐의 의도와는 관련이 없는 단순한 정보만 있었던 것이다.
그는 괜히 조성돈 팀장의 기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결국 지금까지 파악한 것으로는 특허 출원은 스티븐의 지시에 따랐는데, 아직 그가 지금 무슨 목적으로 이 일을 진행하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이군요.”
“…죄송합니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습니다. 혹시 스티븐과 관련이 있는 이들도 다 조사를 해보세요.”
“…네.”
조성돈 팀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한 채 다시 실장실을 나섰다. 그 역시 지금 상황이 꽤나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최민혁은 새삼 인맥의 중요성을 이번에 느꼈다. 와컴 지분의 인수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만족했다. 굳이 와컴과 사생결단을 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냅스트 이슈는 자신이 뿌린 씨앗이었다.
‘만약 냅스트 상황이 인생 1회차보다 더 빨라진다면, KMP-02 양산을 좀 더 서둘러야겠어.’
* * *
미국 음반 협회도 처음에는 냅스트에 대해서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유는 미국 인터넷망 속도가 그렇게 빠른 편도 아니고, 인터넷 확산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냅스트는 오히려 이슈를 만들어서 음반 판매를 촉진하는 장점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바뀐 것은 커닝이 차세대 사업으로 광통신에 집중한 이후다. 커닝이 광통신을 공격적으로 경영한 것이다.
커닝의 이런 행보는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의 경영 스타일을 롤모델로 삼았는데, 그 타깃은 다름 아닌 미국 대학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 대학을 중심으로 한 냅스트의 성장에 변화가 생겼다.
결국 커닝의 경쟁사 역시 뒤늦게 아차 싶어서인지 미국 대학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렸다.
지금까지는 고만고만하게 성장하던 냅스트의 유저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견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미국의 음반 협회가 부랴부랴 냅스트를 법원에 제소한 것이다.
냅스트는 발 빠르게 대응했다. 개인 간의 음악파일 공유는 저작권침해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 음반 협회도 유명한 변호사를 선임해서 적극 나섰다.
이들 소송전은 미국 언론을 통해서 조명되면서 미국 내에도 알려졌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소송이 노이즈마케팅이 되어서 냅스트의 유저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다음부터다.
냅스트 유저는 주로 PC로 내려받아서 음악을 들었는데, 이때서야 KMP-01이란 제품이 한국에서 팔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결국 아는 지인을 통해서 KMP-01을 사들였는데, 그러면서 KM 전자 게시판에 계속 KMP-01 미국에 팔아달라고 요청했다.
KM 전자는 국내 소비자 수요도 못 맞추는 상황이라서 정중하게 공지로 거절했다.
하지만 냅스트 유저들은 쉽게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가용 수단을 동원해서 KMP-01을 샀다.
한국 내의 KMP-01 물량이 빠르게 소진된 이유였다.
오성 전자가 부랴부랴 낸드 메모리의 양산 문제에 매달렸고, 다행히 이 문제를 해결했다.
국내와 미국에서 판매가 동시에 이루어지자 KMP 판매 대수는 50만 대에서 70만 대로 껑충 뛰어올랐다.
아맬리오 이사가 급하게 구한 KMP-01은 바로 이를 통해서 얻은 것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에플 이사회를 소집해서 이 안건을 다루었다.
에플 이사회에서 애초에 에플의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선입한 사람이 바로 아맬리오 이사였다.
그들이 긴급회의 소집에 참석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토비 CEO는 썩 내키는 얼굴이 아니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대량 해고, 공장 폐쇄, 사업부 구조조정은 아맬리오 이사 당신도 공감한 내용 아닙니까?]
둘 다 에플을 살리기 위해서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점은 공감하지만, 생각 자체는 많이 달랐다.
토비 CEO는 에플을 그냥 정리해서 매각하자는 쪽이지만 아맬리오 이사는 회사를 정리하는 것보다는 경영 악화를 벗어나자는 쪽이었던 것이다.
[그런 말을 하자고 이사회를 소집한 것이 아닙니다. 토비 CEO님은 왜 ARN 지분을 매각한 것입니까. 그 의도를 알고 싶습니다.]
[그건 이미 밝혔지만 아콘과, VLSI와의 관계 악화 때문입니다. 우리 쪽에서 진행한 메시지 패드가 망하면서 두 회사 역시 손실이 컸습니다. 그쪽을 그냥 내버려 두면 이사회를 통해서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토비 CEO는 차가운 눈으로 오늘 회의에 참석한 에플 이사회 임원을 쳐다보았다.
실상 그의 말처럼 아콘, VLSI 대주주를 통해서 압박을 받은 이사회 임원은 오히려 토비 CEO 말에 반박했다.
[토비 CEO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이렇게 절망적인 늪에서 진작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겁니다.]
[하, 그게 왜 제 탓입니까. 설탕 장사꾼인 전임자가 회사를 똥통에 빠뜨린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을 CEO로 뽑은 것은 당신들입니다. 아무리 스티븐이 실수했다고 해도 지켜봤어야 했습니다!]
[아니, 거기에 스티븐 이야기가 왜 나오는 겁니까?!!!]
스티븐의 이름은 에플 이사회에서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스티븐’ 이야기가 나오자 에플 이사회는 시장 바닥처럼 바뀌었다.
심지어 토비 CEO를 상대로 욕까지 하는 이도 있었다.
지난 아픈 일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맬리오 이사가 보다 못해서 주먹으로 회의실 탁자를 내려쳤다.
쾅 소리에 에플 이사회는 그제야 침묵이 감돌았다.
[당신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습니까?!]
하지만 토비 CEO는 그런 아맬리오 이사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얼굴은 아니었다.
내셔널컨덕트를 파산에서 구한 아맬리오 이사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에플에서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아니, 에플 이사회가 보험으로 내세운 이가 바로 아맬리오다.
‘개새끼들, 만약 에플의 경영 악화가 계속된다면 나에게 모두 책임을 뒤집어씌울 생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