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
“제가 직접 KM 전자에 가서 최민혁 실장을 만나보겠습니다.”
“정말입니까?”
토비 CEO는 의아한 눈으로 스티븐을 쳐다보았다. 그가 딱히 스티븐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에플 매각을 앞둔 시점에서 괜히 스티븐을 끌어들여서 문제를 더 키우고 싶지 않았다.
스티븐은 토비 CEO의 시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토비 CEO와 이렇게 협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는 개인 간의 갈등보다는 위기의 에플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나갔다.
“지금은 지난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시기는 아닙니다. 자칫 기회를 놓친다면 에플의 몰락이 가속화될 뿐입니다. 그건 토비 CEO님께도 결코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 에플 내부 갈등은 별개로 하고서도 에플 가치가 여기서 더 추락한다면 매각 협상도 더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상대는 에플의 약점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테니까.
실제로 그런 양상이 나타났다.
IBM처럼 에플 인수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인 곳도 최근에 와서는 그 행동이 미묘하게 달랐다.
굳이 망해가는 에플에게서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상황이 나빠지자 곤경에 처한 것은 바로 토비 CEO였다. 그는 미묘한 시기에 끼어든 스티븐 때문에 짜증이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맬리오 이사는 이 묘한 상황에 휘파람을 불었다. 토비 CEO의 불만은 나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스티븐을 전적으로 지지할 생각은 없었다.
‘다음 에플 CEO는 나니까.’
지금은 스티븐을 이용해서 토비를 압박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게다가 차라리 이번 기회에 에플이 큰 손실을 보는 것이 나았다.
이미 ARN 지분 헐값 매각 때문에 에플 이사회에서도 토비 CEO를 헐뜯는 이들이 생겨났다.
아마 KM 전자의 KMP-01 차세대 모델이 초대박을 터뜨린다면 토비 CEO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
사실 그게 토비 CEO가 굳이 이 불편한 자리에 나온 이유였다. 그 역시 ARN 지분 매각이 추후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해서 대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굳이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 좋은데, 스티븐은 이미 에플을 떠난 사람이지 않습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에플을 위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스티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모르고 하는 말입니까? 제가 바로 에플 창립자입니다. 최소한 에플이 망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아맬리오 이사는 한 가지 점을 확인했다.
“다른 뜻은 없다는 말입니까? 혹시 에플에 다시 돌아올 생각입니까?”
“그런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전 어디까지나 에플을 도와줄 수 있는 고문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실상 스티븐의 속내는 달랐다.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에플 이사회의 분열을 촉진해서 틈을 벌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가 마음의 고향인 에플로 다시 복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 이대로는 곤란했다.
에플 임직원의 마음을 휘어잡을 만한 수단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이사회에서 허락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흠.”
토비 CEO는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스티븐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NextOS 내에서 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 일 때문에 변하기는 변한 걸까?’
* * *
에플 이사회는 스티븐 주장에 대해서 말들이 많았다.
이제까지 에플의 구원자에 대한 선별 작업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런 차에 갑자기 스티븐이 나서면서 KM 전자가 그 사이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토비 CEO는 이사회에서 은근슬쩍 자신이 한 실책을 털어놓았다.
[ARN 지분을 매각한 것은 섣부른 판단이었습니다.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일을 처리했습니다. 최종 당사자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확인하지 않은 점은 분명 저의 잘못입니다.]
바로 ARN 지분 매각에 관한 건이다.
실제로 이 지분 매각을 주도한 이는 VLSI의 마크 듀켄 이사였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토비 CEO가 제대로 상황을 알아보지 않은 것은 잘못한 것이었다.
에플 기획 팀을 한 번만 가동했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에플 이사회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일은 넘어갑시다. 그리고 ARN 성과도 기대한 것보다 더 처참했습니다. 차라리 사업부를 구조조정 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론 반발은 좀 있었다. 토비 CEO를 싫어한 이들도 제법 있었으니까.
다만 에플 이사회는 굳이 토비 CEO를 자를 생각이 없었다.
아직은 에플 이사회가 ARN 가치에 대해서 제대로 몰랐던 것이었다.
‘후유, 다행이구나.’
토비 CEO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아맬리오 이사는 쥐새끼처럼 위기를 피하는 토비 CEO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토비 CEO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이 ARN 지분을 교묘하게 인수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KM 전자’, ‘최민혁 실장’ 이야기가 나오자 에플 이사회는 침묵했다.
아니, 옆자리에 있는 이들끼리 귓속말로 이야기했다.
‘KM 전자가 뭡니까?’
‘계속 최민혁 실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정체가 뭡니까?’
‘아니, 한국 기업이라니? 지금 우리가 한국 기업 이름까지 알아야 합니까?’
‘ARN 지분을 인수한 곳이 KM 전자인 겁니까? 아니면 벨린 투자입니까?’
‘벨린 투자는 또 뭡니까?’
‘최민혁 실장이 실소유주로 있는 곳이 벨린 투자인 것으로 압니다.’
뒤늦게야 이 정보를 안 에플 이사회 임원은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그들은 토비 CEO를 따가운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굳이 질책하지는 못했다.
아직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 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토비 CEO가 분노 어린 시선으로 쳐다본 이는 아맬리오 이사였다.
[…….]
아맬리오 이사는 내심 휘파람을 불면서 시선을 피했다.
스티븐을 끌어들여서 KM 전자와 최민혁 실장 이슈를 터뜨린 것이 제법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플 이사회는 스티븐을 끌어들이는 일에 갈팡질팡했다.
문제는 NextOS가 가진 OS가 에플에게 꼭 필요하다는 거다.
거기에 스티븐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에플을 몰락의 수렁에서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이 스티븐일 수도 있다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저런 갈등은 있었지만, 스티븐의 매혹적인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다만 어떤 일이 있어도 스티븐이 다시 에플로 돌아오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토비 CEO나 아맬리오 이사 두 사람은 에플 이사회의 스티븐을 향한 반감에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 두 사람은 딱히 에플 이사회 주장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에플 이사회가 저렇게 나오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조심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한편으로 신기하네. 최민혁 실장이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스티븐이 이렇게까지 주목하는 걸까?’
두 사람은 계속 말이 나오는 최민혁 실장과 KM 전자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최민혁은 자신이 아는 인생 1회 차와는 많이 달라진 에플과 스티븐의 행보에 이를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기획 팀에 계속 이들의 행보를 모니터링 하라고 지시하면서 VLSI의 마크 듀켄에게 연락했다.
덕분에 에플 이사회의 내부 지인을 통해서 정보를 얻은 마크 듀켄 이사를 통해 꽤 놀라운 정보를 얻었다.
[에플 이사회가 에플 지분 매각 대상자로 우리 KM 전자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최근 IBM을 비롯한 인수 대상자 모습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한 대상자로 KM 전자를 살피는 것 같습니다.]
최민혁도 에플 지분 인수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지금 고민하는 문제는 바로 퀄컴과의 대립이었다.
이미 CDMA 폰의 상황이 막바지에 접어든 이상 퀄컴을 압박한 수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런 미묘한 시기에 에플 지분 인수를 고려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에플 상황이 그가 아는 인생 1회 차와 너무 달라져도 곤란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을 텐데요?]
[스티븐이 나서서 중재하는 상황이라서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스티븐이 말입니까? 아니,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한다는 말입니까?]
[스티븐 주장으로는 에플 몰락을 막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KM 전자와 손을 잡는 것이 차라리 에플의 위기를 돌파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이 정보가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마크 듀켄도 에플 이사회의 지인을 통해서 얻은 정보이지만 선뜻 장담하지는 못했다.
그건 최민혁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에플 이사회 내부가 전혀 이상한 쪽으로 방향 전환 하는 것에 크게 당황했다.
자신의 인생 1회 차때와 에플의 행보가 달라지면 그다음부터는 솔직히 어떤 상황으로 흘러갈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문득 지금 에플의 가치가 고작 25억 달러 남짓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지금 자금력으로 대출까지 낸다면 에플 인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아니, 그래서는 안 돼. 에플 투자자가 다 빠져나가면, 얻을 것이 없어. 다만 지분의 일부만 인수하는 거라면 나쁜 선택은 아냐.’
지금의 에플 이사회가 남아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은 선택이었다.
그들이 있어야 에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마크 듀켄 이사에게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에플 이사회와 스티븐의 동향을 면밀하게 살펴서 알려주십시오. 그렇게만 한다면 이번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같은 사업 동료인데, 당연히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민혁은 새삼 마크 듀켄을 동반자로 선택한 것이 나쁜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마크 듀켄은 이 일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나선 것일 뿐이지만 말이다.
‘스티븐도 마찬가지겠지. 다만 스티븐 이 양반은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좀 그렇지. 그런 점만 조심한다면 괜찮은 상대야. 글로벌 음반 업체와의 협상 대상자로 최상이니까.’
* * *
에플 이사회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에 스티븐은 뒤늦게 자신이 다급하게 낸 몇 가지 특허가 최고의 한 수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깨달았다. 그 특허가 없었다면 KM 전자와 협상을 하고 말고 할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스컬리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그는 새삼 과거 스컬리와의 갈등을 떠올렸다.
스컬리는 당시 에플의 새로운 돌파구로 모바일 산업을 선택했다.
메시지 패드는 바로 이 새로운 산업을 위한 선봉장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시 GUI에 집착하던 스티븐과는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에플 전 CEO인 스컬리는 모바일 산업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면 굳이 GUI OS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다.
스티븐은 스컬리와 대립하면서도 그의 주장이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스티븐이 굳이 NextOS를 설립한 후에 모바일 OS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다만 그는 NextOS가 내부 갈등 때문에 혼란한 상황을 틈타서 최민혁 실장이 모바일 관련 담당자를 빼돌릴지는 상상도 못 했다.
‘빌어먹을.’
뒤늦은 자책.
당시 왕따를 당한 스티븐은 다른 일 따위엔 신경을 쓰지 못했다. 회사 직원이 그만둬도 그냥 그만두나 싶었을 정도다.
스티븐은 복잡한 내적갈등을 뒤로한 채 지금 대화에 집중했다. 그는 지금 NextOS만으로는 KM 전자와 싸울 수 없다는 것은 잘 안다.
따라서 에플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에플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였다.
스티븐은 이런 상황이기에 자신이 에플 자문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예상대로 에플 이사회에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만난 토비 CEO와 아맬리오 이사를 상대로 NextOS의 OS가 어떤 강점이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나서야 위기의 에플을 구해낼 수 있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NextOS의 OS는 에플이 집중해야 할 완벽한 OS입니다. 이 기반이 만들어져야 에플이 다른 경쟁자를 앞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