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
권재홍 비서실장은 그런 최문경 부회장의 마음을 잘 알았다.
“지금은 최민혁 실장이 아니라 VA 패널 계열사 설립에 집중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와컴은 그냥 내버려 두자고?”
“당장 터져 나오는 문제가 많습니다. 김호동 박사 태도도 딱히 우리 그룹에 좋지도 않습니다.”
“혹시 민혁 그놈이 중간에 방해한 것 아냐? 그놈이 순순히 우리 요구를 들어준 것부터가 의심스러워.”
“그건 아닐 겁니다. 제가 듣기로 오성 전자가 김호동 박사 연구실 기술을 빼돌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랬기에 오성 전자는 빠르게 IPS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민혁이 그놈이 그것을 몰랐다는 소리야?”
권재홍 비서실장은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최민혁의 수법이 흔히 말하는 특허 괴물이 애용하는 수법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알았을 겁니다. 그런데 IPS 기술 특허를 보유한 이가 최민혁 실장입니다. 따라서 설사 오성 전자가 IPS 상업화에 성공한다고 해도 특허료 협상을 해야 할 겁니다. 아마 그때 가서 돈으로 보상받을 겁니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최문경 부회장은 한동안 넋을 잃은 채 IPS와 관련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이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자칫하다가는 VA 관련 기술을 오성 전자에 빼앗길 수도 있었다.
“…김호동 박사와 약속을 잡아. 일단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
“알겠습니다.”
“와컴 상황은 다시 인력을 배치해서 확인해 봐. 설사 우리가 낄 여력이 안 된다고 해도 돌아가는 상황은 확인해야 하니까.”
“…네.”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다소 굳은 얼굴을 한 채 부회장실을 나섰다.
최문경 부회장은 너무 답답해서 넥타이를 푼 채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도 뇌가 없는 조연 같은 자신의 처지가 답답했다.
하지만 뭔가 하려고 하면 최민혁이 깔아놓은 장애물이 산더미같이 자신을 막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룹 사장 회의에서 만난 오영근 사장을 부추겨 봤지만, 재미를 못 봤다.
‘젠장맞을, 와컴 상황도 뭔가 있어. 그런데 그냥 불구경하듯이 지켜볼 수밖에 없다니. 오영근 사장이라도 최민혁을 견제하면 좋을 텐데, 그저 바지 사장 노릇에 만족하고 있으니.’
* * *
오영근 사장은 요즘 들어서 제2의 인생기를 보내는 중이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제안을 받아서 사장으로서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싫어하는 회사 외적인 일을 주로 담당했다.
일테면 사회단체 행사에 얼굴을 보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아마 야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불편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오영근 사장은 딱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심지어 고아원을 방문해서 그들과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언론을 통해서도 이런 모습은 조명을 받았다.
한국 언론이 최민혁 실장을 정말 싫어했기에 더 오영근 사장의 취재는 빼놓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오영근 사장 모습은 언론 기사를 통해서 조명을 받았다.
오영근 사장은 물론 최용욱 회장 저택을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KM 전자 내부에서 돌아가는 이야기를 가끔 했다.
그는 덕분에 KM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영향력을 넓혀갔다.
따라서 와컴 경영진의 방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 최민혁 실장이 뭔가 하는가 싶었다. 다행히 조성돈 기획 팀장이 올린 보고서 덕분에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파악했다.
‘…역시 최 실장.’
최민혁 실장이 하는 일은 회사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가끔 KM 전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업을 상대로 공갈, 협박을 일삼았다.
정점은 스마트 펜과 관련 3,000건이 넘는 특허였다.
이 특허에 KM 전자 핵심 실무진이 다 투입된 터라 그도 보고를 받았다.
당시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와컴 경영진 협상 내용을 보고서야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최 실장, 이 친구는 징해.”
문형섭 부사장 역시 와컴 경영진 협상 리스트를 확인하면서 혀를 찼다.
“전 다른 것을 떠나서 최 실장이 와컴을 상대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 싫지는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협상 전에 주도권을 잡는 것이 좋을 테니까.”
“다만 와컴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최 실장이 어디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일하지 않잖아. 아마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을 거야.”
“그게 뭘까요?”
문형섭 부사장 역시 오영근 사장의 의견을 반박하지 않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다행히 오영근 사장은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넌지시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차세대 MP3에 스마트 펜을 적용한다는 소리가 있어. 아마 거기에 적용될 거야.”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요?”
“글쎄.”
오영근 사장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기획 팀 통해서 올라온 보고서를 봐도 선뜻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모바일 산업을 주도하는 것은 핸드폰과 삐삐와 같은 기기다. 그러니 아예 이들과 종이 전혀 다른 모바일 기기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최민혁 실장이 해외 출장이 바쁘다는 핑계로 오영근 사장에게도 제대로 보고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성돈 팀장 역시 최민혁 속내를 잘 알아서인지 오영근 사장에게 단편적인 정보만 보고했다.
오영근 사장은 그런 일을 알아도 모른 척했다. 그는 애초에 그런 일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솔직히 최민혁 실장이 이제 어디까지나 가나 호기심을 느꼈다.
아니,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이 굿캅 역할을 제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최민혁 실장의 압박에 질린 와컴 경영진을 다독거려 준다면 협상은 한층 좋아질 거라고 판단했다.
그는 결국 와컴 경영진의 방문 시간을 확인한 후에 자신이 직접 회사 로비로 향했고, 출장 명목으로 나가는 척하면서 와컴 경영진을 만나려고 했다.
KM 전자 임직원은 오영근 사장 모습에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문형섭 부사장 역시 오영근 사장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조용히 뒤를 따랐다.
다행히 시간을 맞춘 덕분에 현관 로비에는 와컴 경영진 일행이 도착했다.
그가 막 우연을 가장해서 나서려고 했을 때 나타난 이는 최민혁이었다.
최민혁 역시 와컴 경영진이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지 궁금해서 나온 것이다. 정확히는 협상을 어떤 식으로 풀어가야 할 지 정하기 위함이다. 만약 와컴 경영진이 여전히 똥오줌을 못 가리면, 당분간 와컴이 신제품 개발을 접도록 압박할 생각이었다.
‘설마 시작부터 공격적으로 나올까?’
그런데.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 최민혁을 발견하자 잠시 주춤했다.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번민이 가득 떠올랐다.
잠시간에 너무 많은 감정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의 혼란은 오래가지 못했다.
최민혁을 향해서 천천히 다가와서는 구십 도로 허리를 숙였다.
[최 실장님, 일본에서 있었던 일에 이 자리를 빌려서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뒤를 따른 사다 수석 부장은 화들짝 놀랐지만, 코지 시마다 부사장을 따랐다.
뒤늦게 합류한 타가하시 마무리 변호사 역시 썩 내키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오성 전자를 통해서 받은 자료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어금니를 악문 채 최민혁 실장을 향해서 허리를 숙였다.
와컴 경영진과 수행원이 모두 최민혁 실장을 향해서 사과하는 모습은 마치 조선 시대에 선비가 왕을 대하는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
KM 전자 현관을 오가는 임직원은 다들 입을 딱 벌린 채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오영근 사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 * *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KM 전자 본사로 향하면서 번민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 정체를 모를 때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권태성 기획실장이 넘긴 자료를 보고서야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 실장은 처음부터 우리 와컴을 노렸다고 봐야 해.’
그러면 지금 일도 다 말이 된다. 특히 갑자기 튀어나온 3,000건이 넘는 스마트 펜 특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와컴의 극단적인 반응은 두 회사 간의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
문제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 때 누가 더 큰 피해를 보느냐 하는 것이다.
KM 전자 제품 중에는 스마트 펜과 관련되는 제품이 당장 없었다.
아마 차세대 제품과 관련이 있을 수가 있다.
그런데 그건 또한 확실하지 않았다.
결국 KM 전자 스마트 펜 특허에 포위당한 와컴만 일방적으로 손해를 본다.
소송을 한다고 해서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소송을 걸어서 아예 개발 자체를 못 하게 만들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KM 전자 본사 입구에 도착했을 때 식은땀마저 흘렸다.
코지 부사장의 창백한 얼굴을 본 타가하시 마무리 변호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코지 부사장님, 괜찮습니까?”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은 코지 시미다 부사장은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의 혼란한 마음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뒤늦게 일행에 합류한 타가하시 마무라 변호사는 사다 수석 부장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게…….”
사다 수석 부장은 코지 부사장의 속내를 읽고는 바로 답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뒀다가는 타가하시 마무라 변호사가 협상을 깽판으로 만들 수도 있다. 지난 1차 협상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 수 없었다.
“오성 전자의 권태성 실장에게서 최민혁 실장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예상한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는 설명하면서 권태성 실장에게 받은 보고서를 내밀었다.
타가하시 변호사는 짜증스러운 마음에 대충 보고서를 읽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지만 그런 그도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내용에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저지른 분탕질 내용은 생각보다 많았다.
특히 피해 당사자인 권태성 기획실장은 그 부분을 상세하게 설명했던 것이다.
“이 무슨…….”
타가하시 변호사는 황당해서 사다 수석 부장을 다시 쳐다보았다.
사다 수석 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사실입니다. 자세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당사자가 당한 일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DL 화재를 흔들어 DL 그룹을 휘청이게 한 부분은 절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DL 그룹이라…….”
타가하시 변호사가 DL 그룹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한국에서 자본이 탄탄한 기업 중의 하나기 때문이다. 그의 안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침중해졌다.
전형적인 일본인으로 꼰대 기질이 심한 타가하시 변호사가 ‘말도 안 돼!’란 말을 남발하면서 보고서를 계속 봤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그 모습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만약 권태성 실장 보고서의 반만 맞아도 최민혁 실장이 만든 함정에 빠진 게 맞을 것이라 확신했다.
만약 최민혁 실장이 의도한 대로 행동했다가는 다시 한번 뒤통수를 맞는다.
따라서 최선의 대안을 생각했다.
지금 와컴은 최민혁 실장과 싸워서 이길 방법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민혁 실장과 손을 잡아야 했다.
‘그래. 만약 최민혁 실장과 손을 잡는다면, 인투스 개발을 3~4년은 당길 수 있어. 더욱이 모델 자체가 더 발전될 수 있어.’
실제로 와컴 엔지니어가 분석한 KM 전자의 특허 중에는 인투스와 관련된 부분이 꽤 많았다. 그 발전된 개념을 적용한다면 인투스 가치는 1세대, 2세대를 뛰어넘어서 3세대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거기에 KM 전자와 시너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특히 이번 협상이 깨지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아마 자신을 희생양 삼아서 다 엎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다.
‘과연 마사히코 이사가 최민혁 실장과 대립할까? 아니면 결국 손을 잡을까.’
그 자신이 판단하기에 120% 마사히코 이사는 최민혁과 타협할 것이다. 와컴 이사회에서와는 달리 늘 외부와 좋은 인맥 관계를 유지하는 이가 마사히코 이사이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