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24화 (424/1,021)

#424.

당시 사다 수석은 한창 와컴 관련 제품을 권태성 실장에게 보여주면서 오성 전자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을 비췄다.

하지만 그 당시, 와컴 이사회에서 반대하면서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와컴 내부에서 사다 수석을 밀어주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사다 수석부장이 보여준 열정은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외압에도 자기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기 영향력을 계속 키워 나갔다. 결국, 지금에는 그 열정으로 수석 부장까지 승진한 셈이다.

당시 협상을 제안했던 한 사람은 기획실장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수석 부장이 되었다.

두 사람은 그때 일 덕분에 서로 친밀감을 가졌다.

“그때 서로 손을 잡았으면, 지금은 더 밀접한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을 텐데, 너무 아쉽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뒤늦은 후회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최민혁 실장이 중간에 끼어서 횡포를 부린 덕분에 마음을 달리 먹은 셈이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마치 헤어진 연인을 보듯이 사다 수석을 바라보았다. 정치적인 의미가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를 부드러운 미소를 한 채 조용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과거 관계가 윤활유가 되자 한층 분위기가 좋아졌다. 대화도 딱딱한 계약 관계와는 달랐다.

자신이 굳이 끼어들어서 불편한 관계를 만들 수가 없었다.

지금은 최민혁 실장이라는 포식자가 자신을 노리는 상황.

괜히 자존심을 내세워서 문제를 만들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하지만 둘 사이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코지 시마다 부사장의 안색은 점점 변해갔다.

최민혁 실장 이야기가 간단히 나오는데, 그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사다 수석 부장의 하소연에 가까운 이야기를 대충 넘기지 않았다.

“처음부터 KM 전자와 오해가 있었다는 말이군요.”

“당시 만남 자체는 두 회사 간의 협상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서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다소 고압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부분에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습니다.”

“흠.”

그는 팔짱을 한 채 헛웃음을 터뜨렸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상대로 보여주는 고압적인 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이야기를 왜 자신 앞에서 할까.

그만큼 벼랑 끝에 몰렸다는 의미다.

‘하긴 최민혁 실장이 설사 간접적인 방식이라도 모욕을 당하고도 꾹 참을 성격은 아니지. 적어도 20배 정도는 복수할 사람이니까. 설마 그 일 때문에 최 실장이 와컴을 상대로 분탕질한 것일까?’

사다 수석은 계속 권태성 실장 눈치를 보면서 하소연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 관계에서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KM 전자는 고작 그것을 빌미로 우리 기업을 상대로 3,000건이라는 특허를 만들어서 보복했습니다.”

“아.”

권태성 기획실장은 역시 ‘최민혁 실장’이라는 생각이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성 전자를 상대로 보여준 최민혁 실장의 행동은 기업 양아치가 울고 갈 정도로 악랄했다.

차라리 조폭 기업이 인수 합병하는 것이 그것보단 덜 지독했다.

와컴은 그런 최민혁 실장의 성향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기습전을 대비도 하기 전에 포격을 받아서 박살이 난 것이다.

‘딱하게 되었군.’

아마 최민혁 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만 알았어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다 수석 부장은 하소연할 상대를 만나자 가슴속에 품고 있는 억울함을 털어놓았다.

“저희가 KM 전자를 상대로 무례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기업 숨통을 조일 만한 행동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오해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네.”

넌지시 도와달라는 뜻을 표현한 셈이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침묵한 채 조용히 고개만 숙였다.

콧대가 하늘 꼭대기까지 올랐던 와컴 경영진이 보일 수가 없는 행동이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자 어떻게 이들을 도와줄까 고민했다. 자신이 나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결국 그가 차선으로 선택한 것은 최민혁 실장이 이제까지 한 행동이다. 진실을 안다면 신중한 행동을 할 것이라 봤다.

“…잘 몰라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최민혁 실장은 원래 성향이 그렇습니다. 문제는 지금의 KM 전자를 주도하는 인물이 최민혁 실장이라는 겁니다. KM 전자 오너답게 모든 KM 전자 의사 결정에 다 관여합니다. 아마 와컴 사태 배후도 최민혁 실장일 겁니다.”

“……!”

최민혁 실장의 정체를 뒤늦게 안 사다 수석 부장은 마치 경기 들린 환자 같은 얼굴로 잠시 대답하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제가 듣기로 고작 20살에 불과하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입니까.”

“직접 최민혁 실장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최민혁 실장이 KM 전자를 넘어서서 KM 그룹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국내 기업도 많으니까요. 사람은 자기가 경험해 보지 않은 비상식적인 일을 믿지 않습니다. 설마 절 만나자고 한 것이 이 일 때문입니까?”

코지 시마다 부사장이 슬쩍 두 사람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우리 와컴도 오성 전자에 대한 내부 평판은 좋습니다. 이사회조차 아시아 파트너 상대로 오성 전자를 보고 있습니다. 이번 일만 해결된다면 앞으로 양사 관계에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질 겁니다.”

실제로 와컴 이사회 내부에서 차라리 오성 전자와 손을 잡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KM 전자는 꼴 보기도 싫어서 나온 고육지책이다.

이번 KM 전자 사태를 거치면서 그 분위기는 어느 정도 성숙 단계에 올랐다.

하지만 권태성 기획실장 입장은 달랐다. 지금 오성 전자는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특히 최근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 분위기가 바뀐 사실을 직접 통보받았다.

그중에는 IPS LCD 문제가 끝나기 전까지는 KM 전자와 대립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이라면 와컴 투자도 가능할 텐데…….’

그런데 KM 전자를 무시하고 그 일을 진행할 수는 없다.

타이밍이 좋지가 않았다.

과거 그렇게 콧대 높은 행동을 보여준 와컴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최 실장이 참 난 사람은 난 사람이야. 오만하기 짝이 없던 와컴 경영진을 이 모양으로 만들다니. 한편으로 통쾌하다니까.’

권태성 기획실장은 특히 최민혁 실장이 자기가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올린 오성 전자를 그냥 둘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반드시 자신을 상대로 보복할 것이다. 자칫하면 IPS LCD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지도 못한 채 LC 전자에 휘둘릴 수도 있다.

그건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이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지금 우리 오성 전자 내부에 산적한 일이 많아서 당분간은 와컴과 힘을 합치기 힘듭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제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이라면 최민혁 실장을 조심하기 바랍니다.”

“최 실장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사태를 만들었다면 그 전에 뭔가 노림수가 있었을 겁니다. 전략적인 포지션에서 진행한 일이니, 이걸 방해하는 기업은 그냥 안 두려고 할 겁니다.”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사다 수석은 몇 번이나 하소연했지만,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태성 기획실장이 최민혁 실장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믿기 힘든 일이었다.

이제는 최민혁 실장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이미 와컴은 전략적으로 힘든 상황이니, 긍정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최선일 겁니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묵묵히 대화를 들은 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권태성 기획실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전혀 상상도 못 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오성 전자 기획실을 나서면서 새삼 최민혁 실장이 어떤 사람인지 뒤늦게야 깨닫고 말았다.

‘오성 전자가 최민혁 실장 눈치를 보다니, 도대체 저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 * *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권태성 기획실장과의 만남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이 자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한 괴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KM 전자와의 미팅을 연기한 후에 최민혁 실장과 KM 전자에 대한 정보를 다시 원점에서 천천히 확인했다.

다행히 권태성 기획실장이 준 자료가 기준이 되었다.

그 내용을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소름이 돋았다.

결국 고민을 거듭한 끝에 협상 일정을 다시 사흘을 연기했다.

먼저 진행한 일은 와컴 이사회에 연락해서 협상 내용을 변경하는 일이다.

마사히코 이사는 말도 안 된다는 주장을 몇 번이나 했지만, 오성 전자의 반응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오성 전자가 겁을 집어먹었다는 말을 믿지는 못해도 간과하지 않았다.

와컴 이사회도 결국 코지 시마다 부사장을 밀어줄 수밖에 없었다.

대신 권태성 기획실장에게 몇 번이나 연락해서 계속 도움을 청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해도 간접적인 정보를 와컴에 넘겼다. 이왕이면 이 기회를 통해서 와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최민혁 실장이 와컴을 노린다는 점을 재조사했다.

그런데 명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지금 와컴이 가지고 있는 제품과 KM 전자와 공통점은 없기 때문이다.

‘있다고 한다면 펜인데, KM 전자 제품 중에 펜을 사용하는 제품이 있나? 아, 차세대 제품에 적용할 수도 있어. 그게 무엇일까?’

권태성 기획실장은 아무리 궁리를 거듭해도 최민혁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아쉽네. 지금이라면 와컴 이사회를 상대로 얼마든지 좋은 조건으로 협상할 수가 있어. 그 아까운 기회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다니. 아니, 이대로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어. 최문경 부회장이라면 다른 견제책을 내놓을 수도 있을거야.’

* * *

권태성 기획실장은 와컴 경영진과의 만나서 협의한 내용을 슬쩍 최문경 부회장 쪽에 정보를 흘렸다.

최문경 부회장은 물론 한영 일보 때문에 와컴에 대한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오성 전자 덕분에 이번 사건의 내막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이전처럼 분노하거나 하지 않았다. 일본 기업의 자세를 잘 알았다. 와컴에 대한 최민혁의 수법은 기가 막혀서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짜 대단한 놈이야.”

권재홍 비서실장도 비서 팀을 통해서 취합된 자료를 확인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최 실장이 도대체 뭘 노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최문경 부회장 역시 굳은 안색을 한 채 결국 담배를 꺼내서 베어 물었다.

VA 패널과 관련된 신사업을 검토하면서 그 기술 가치를 뒤늦게 알아봤고, 뒤늦게 이 일에 DL 그룹을 끌어들인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자금 여력이 달리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자본금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자 VA 패널 업체에 대한 작업을 빠르게 진행했다.

아예 계열사를 새로 시작하는 방법도 있지만 괜찮은 중견 기업을 인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최민혁이 인수합병을 하는 것처럼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일이 또 쉽지가 않았다.

TN LCD 패널과 관련한 부품 대부분은 수입에 의존한 상황이다.

기존 TN LCD 핵심 기술의 해외 의존도조차 상당히 높았다.

하물며 IPS LCD는 TN LCD와 구조가 달랐다.

따라서 필요한 업체를 선별하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LCD에 들어가는 구동 IC, 백라이트 유닛과 관련된 부품 역시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성 전자는 이미 구동IC 개발에 성공했다고 했나?”

“구동 IC 구조 자체가 간단해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직도 버벅대는 건가?”

“그게 좀…….”

구동 IC는 액정을 구동하고, 제어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필수 기술이었다. 이것 자체는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다만 오성 전자는 김호동 박사가 만든 구동 IC를 도용했다. 그러니 겉으로 봐서는 큰 어려움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KM 그룹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들은 VA 패널 회사 설립에 집착한 나머지 기술적인 요인을 간과했다.

그리고 이런 소소한 문제점이 바로 최민혁이 우려하는 부분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는 이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니 와컴 이야기는 지금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욕망은 넘쳐나지만 정작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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