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23화 (423/1,021)

#423.

“와컴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국내 쪽은 조용하죠?”

“네. 아무래도 와컴의 기업 성향을 잘 아는 기업은 많지 않습니다.”

사실 국내에서 이 시점에 와컴의 가치를 알아보는 기업은 거의 없다.

권태성 실장이 그나마 과거에 와컴과 협상을 한 것은 그만큼 기업의 미래가치를 보는 능력이 있다고 해야 한다.

최민혁의 인생 1회차에서 와컴의 폭발적인 성장은 인투스 이후다. 그 시점에서 모바일 생태계가 커졌던 것이다.

그리고 오성 전자는 에플보다 먼저 와컴과 손을 잡았다.

그것이 바로 10년 후의 일로 오성 전자의 와컴 지분 5% 인수가 그때였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와컴의 미래가치를 알아볼 수가 없다.

모바일 생태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있는 핸드폰은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를 지났을 뿐이다.

“하긴 와컴이 이제 막 비약을 하는 단계라서 그럴 겁니다. 한 몇 년만 더 지나면 상황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질 겁니다.”

“그렇습니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와컴을 노리는 기업이 급증할 겁니다. 뭐, 와컴이 순순히 당할 리가 없습니다만. 우리가 이를 보완한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최민혁은 원래 스마트폰 시장 공략을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이 아니면 핵심 기술을 얻을 방법이 없었다.

그도 당장 스마트폰을 개발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필요한 기술의 선점을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그럴 겁니다. 다만 우리가 시간을 당긴다면 상황이 또 달라집니다.”

김명준 과장은 새삼 최민혁의 행보에 혀를 내둘렀다.

“켐코 사업부나 ARN 지분 인수와 같은 일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네.”

김명준 과장은 보고하면서도 최민혁 실장 눈치를 계속 봤다. 조성돈 팀장과는 달리 경호를 비롯한 지저분한 일에 집중한 덕에 설명을 들어도 최민혁 의도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히 국내 기업도 잘 모르는데, 일본 와컴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와컴의 미래가치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최민혁 실장은 의미가 가득 담긴 미소를 지은 채 씩 웃었다.

“아마 상상도 못 할 겁니다. 지금과는 비교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성장할 겁니다. 모바일 시대가 열리면 가장 이익을 보는 기업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우리 쪽과 손을 잡게 되면, 그 성장은 수 배, 아니 수십 배가 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자, 이렇게 하죠.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한영 일보를 우리 회사 홍보지로 이용할 수 있다면 지난 일을 덮어두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한영 일보에 연락해서 와컴 이슈를 좀 더 크게 띄우라고 지시를 내리기 바랍니다. 이왕이면 큰 화제를 일으켜도 좋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민혁은 뒤늦게 호출을 받고 실장실에 들어온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와컴 미팅 일정은 다시 확인하세요. 굳이 그들을 재촉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구석으로 너무 몰면 죽자 살자 덤벼둘 수가 있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지켜봅시다. 전 권태성 기획실장이 어리석은 판단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영 일보 일도 잘 지켜보기 바랍니다. 혹시 괜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네.”

조성돈 팀장은 실장실을 나가면서 골치가 아팠다. 최민혁 지시는 일반적인 업무 지시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판돈이 너무 많이 걸려 있으니.’

* * *

한영 일보 최경진 편집장은 일단 급한 불이 껐다는 소식을 듣고, 불과 삼 일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이동수 부사장에게 이를 갈았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어쩔 수가 없잖아. 최 편집장도 잘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해?”

“그 이야기는 뭡니까. 문제가 생겼으면 절 희생양으로 삼아 덮으려고 했습니까?”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내 의사는 아니었다고 해두고 싶어.”

“설마 사장님 지시입니까?”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 걸린 판돈이 너무 컸으니까. 오성 전자가 성공 보수로 제안한 광고만 해도 200억이 넘었어.”

“200억이 다가 아니겠죠?”

‘김진석 이사가 따로 부사장과 딜을 했겠지. 개놈의 새끼들.’

정확히는 권태성 실장이 진행한 일이 아니라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 김진석 이사가 뒤에서 몰래 밀어붙인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김진석 이사 외에 아는 사람이 몇 명 없었다.

일이 잘못될 경우에 김진석 이사 역시 토사구팽 대상이었다.

그다음에 최민혁 실장과 다시 재협상하면 된다.

밑에 실무진의 욕심이 과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된다.

최경진 편집장은 오성 그룹 내의 암투를 대충 느낄 수 있었다. 더 호기심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괜히 많이 알아봐야 좋을 것이 없는 일이다.

“내년 광고 지출을 200% 가까이 늘려주겠다고 했어. 그런 제안을 거절할 이사진은 아무도 없어.”

“하.”

“이미 일은 잘 끝났잖아. 자네 능력도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해. 앞날만 생각하자. 이제 최 편집장을 얕잡아 보는 사람은 없어.”

“…….”

최경진 편집장은 쌍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분노를 토해봤자 얻는 것이 없었다.

억울하지만 이 정도에서 협상을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사회생활을 이제까지 하면서 이보다 더할 일도 경험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심화를 억눌렀다.

“대신 이번 와컴 건은 제가 전담하겠습니다.”

“괜찮겠어?”

“…이미 제가 시작한 일입니다. 끝까지 마무리하겠습니다!”

최경진 편집장은 어차피 달리는 말 위에 올라탔다고 생각했다. 비록 더러운 꼴을 자주 봤지만 얻은 것이 제법 있다.

다만 이것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이동수 부사장은 선뜻 내키는 얼굴은 아니었다. 힘든 고비를 넘긴 상황이다. 수확만 잘하면 된다. 지금 와컴 건은 잘만 이용하면 얻는 것이 꽤 많다.

특히 ‘국뽕’을 자극해서 판매 부수를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다고 눈에서 레이저를 쏘고 있는 최경진 편집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자넨 이 일에서 손을 떼야 할 거야.”

“좋습니다.”

최경진 편집장은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런데 역시 이 일은 그의 예측대로 이대로 그냥 끝나지 않았다.

KM 전자에서 연락해 온 것이다.

다행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을 통해서 한 일을 국내에서 하라는 것이니까.

따라서 기사 자체는 어렵지가 않았다.

아사히 신문에 넘긴 자료 중에 적당한 것을 추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대신 아사히 신문과는 달리 한영 일보 일 면 전체를 와컴 기사로 도배했다.

[KM 전자, 드디어 와컴을 시작으로 일본 기업 인수 합병에 나서나!]

와컴에 관한 내용으로 지면의 반 이상을 할애했다.

한영 일보는 이들 와컴이 가진 원천기술에 대한 것을 마치 경제 교과서처럼 다루었다.

그리고 KM 전자가 출원한 특허가 와컴의 개 목걸이라는 것도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일본 언론에서 안다면 난리가 날 일이지만 다행히 이곳은 한국이다.

국뽕을 과녁으로 한 이 노골적인 기사는 당연히 국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 *

한영 일보가 미친 것처럼 KM 전자를 띄우기 시작하자 한국 언론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IPS LCD 전쟁 때문에 눈치를 보던 다른 언론사도 KM 전자에 대한 최비어천가를 외쳤다.

[KM 전자가 드디어 일본 공습을 시작하나!]

하지만 이런 기사를 내보내는 언론사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그들은 어서 빨리 IPS LCD란 폭풍우가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이 정보를 접한 권태성 기획실장은 생뚱맞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도 와컴 이야기를 사전에 듣기는 했지만, 사태가 이 지경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는 몰랐다. 정확히는 막 보고를 받는 시점에서 기사가 나왔던 것이다.

“…보고가 늦어.”

임권수 부장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아?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충분히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어. 아사히 신문이 일 면에 내보낸 정보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돼?”

“…아무래도 와컴 부분은 IPS LCD 사업과 비교하면 우선순위가 낮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사히 신문이 그 난리를 쳤는데, 오성 전자 기획 팀 반응이 너무 느렸다.

하지만 권태성 기획실장은 임권수 부장을 탓하지 않았다. 지금은 IPS LCD에 집중하는 것이 맞았다. 그건 임권수 부장 얼굴이 증명한다.

피로로 절어 있는 그 모습은 임권수 부장이 KM 그룹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한 모습이었다. 마치 한 달을 굶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이번 IPS LCD TFT 연구 팀에 합류한 이들은 당장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연구원의 건강 사태가 심각했다.

오성 전자 기획 팀이 고름을 짜듯이 쥐어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연구원에 대한 압박은 오성 전자 기획실만 해당하지 않았다.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도 삼 일 꼴에 한 번 연구 팀을 찾아서 격려라는 명분으로 협박했다.

대신에 이번 일을 제대로 끝내기만 한다면 1년 연봉 수준의 성과보수를 약속했다.

“…LC 전자의 권기식 박사 연구 팀의 행보 때문에 다른 쪽은 돌아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알아. 자네가 고생하는 것을 모를 수가 없잖아.”

‘전혀 모르는 눈치입니다!’란 말을 가까스로 삼키고만 임권수 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KM 그룹에서 오성 전자 기획실로 이직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착취당할지는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차라리 KM 그룹에 계속 남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KM 그룹 기획 조정실도 바쁘기는 하지만 오성 전자만큼은 아니었다.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뒷정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일은 그렇게 쉬면서 일을 해도 실적은 나온다는 것이다.

임권수 부장은 곧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상념을 털어냈다.

권태성 기획실장이 임권수 부장의 고민을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IPS LCD 관련 연구 팀에 대한 압박은 살인적이기 때문이다.

“…와컴 코지 시마다 부사장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고?”

“네. 자세한 것은 보고서에 올렸습니다.”

보고서를 살피던 권태성 기획실장은 내심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의 행보는 오성 전자에게도 큰 도움이었다.

와컴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과거엔 제대로 된 협상도 못 했다.

그런데 지금 와컴 행보를 봐서는 이전의 태도를 바꾼 것처럼 보였다.

‘하긴 와컴도 변할 때가 되었지.’

그리고 이건 그 자기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핸드폰 산업이 중요한 논란거리가 되면서 모바일 생태계가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스마트 펜 관련 영역도 이제는 적극 살펴야 했다.

문제는 지금 KM 전자의 행보다. 무려 3,000건이 넘는 스마트 펜 관련 특허를 양산품처럼 찍어내서 와컴을 압박 중이다.

이게 무슨 행동인지 권태성 기획실장이 모를 수가 없었다.

“일단 만나자고 하는데, 만나야지. 그런데 우리 쪽에서 제안할 것은 있어?”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차세대 프로젝트 중에도 전혀 없어?”

“당장 접목이 가능한 아이템은 없습니다.”

“그런가? 일단 만나자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 와컴 쪽과 손을 잡을 만한 안을 검토해 봐.”

“지, 지금 말입니까?”

“어쩔 수 없잖아. 당장 이 일을 할 사람은 자네뿐이니. 자네가 고생 좀 하게.”

“…네.”

스트레스와 중노동에 지친 임권수 부장은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실장실을 나섰다.

* * *

코지 시마다 부사장의 오성 전자 기획실 방문은 사전 약속도 없이 이루어졌다.

오성 전자 기획 팀에서도 따로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딱히 오성 전자를 탓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존심을 찾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권태성 실장과 마주하자 부드러운 어조로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바로 뒤를 이어서 나선 이는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이다. 그는 과거 과장 직급일 때 본 권태성 실장의 얼굴과 과거 기억을 떠올렸다.

“권 실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10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12년 만입니다.”

권태성 기획실장도 과거 사다 수석 부장을 만났던 와컴 공장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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