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
일단 KM 전자의 행보도 행보지만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의 무책임한 대답이 더 큰 문제였다.
그리고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 역시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KM 전자의 대응에 대해서 사전에 조사했다면 파악했어야 할 정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사회에서 자기 속내를 다 털어놓았다는 점이다.
와컴 이사회의 시선이 차가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어깨는 스트레스와 번민 때문에 축 처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KM 전자의 특허를 분석하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공장에서 양산품을 찍듯이 나온 KM 전자의 전자 펜 특허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결과물이었다.
‘만들지도 않은 우리 차세대 제품의 특허를 어떻게 사전에 고안한 것일까?’
하지만 한편으로 수긍했다.
KM 전자 특허는 정상적인 제품이 아니라 오직 아이디어 중심의 특허가 태반이었다.
어딘가 어설픈 그런 면이 있었다.
한마디로 급조된 특허였다.
이건 KM 전자가 아예 와컴을 죽이려고 만든 특허가 분명했다.
‘설마 고작 지난 만남에서 보여준 우리 태도 때문에 이러는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 일이 뭐라고 그거 하나로 그 사이에 이런 사태를 만들 수는 없잖아.’
하지만 그의 고뇌가 복잡해도 특허는 특허다. 그 특허가 가짜인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와컴 내부 기술을 훔쳤다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왜냐하면 와컴 신제품 개발을 하는 연구원조차 생각도 못 한 특허였다.
황당한 것은 KM 전자의 스마트 펜 특허가 와컴 연구원에 연구 개발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스마트 펜 아이템을 전혀 모르는 KM 전자가 무슨 수로 우리보다 더 현실적인 스마트 펜 제품 특허를 출원한다는 말입니까?!!]
[…….]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와컴 이사회는 시간이 더해갈수록 이 사태에 대한 희생양을 찾았다.
그 대상은 역시 코지 시마다 부사장이었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뒤늦게 일전 KM 전자의 협상 자리를 후회했다. 고작 ‘최민혁 실장’ 탓으로 돌린 자신의 태도가 인제 와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제가 직접 한국으로 가서 최민혁 실장을 만나서 담판을 짓겠습니다!]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득의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일축했다.
[이번 일은 잘 처리해야 할 겁니다. KM 전자와 대립과 갈등을 만든 것에는 코지 부사장도 책임이 있습니다!]
[…….]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는 반응하지 않았다.
‘죽여 버리고 싶다!’
* * *
최민혁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좋아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역시 KM 전자 기획 팀 역시 빼놓기 어렵다.
오랜만에 열린 회식 자리에서도 주제는 단연코 와컴에 대한 이야기다.
배종대 과장이 제일 황당하게 생각한 것을 걸고넘어졌다.
“센서 IC와 터치스크린 제어 IC를 하나로 혼합하는 것은 정말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정성근 대리는 대수롭지 않게 툴툴거렸다.
“생산 단가를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와컴은 그러지 못한 것이 커요. 그 부분에서 제약이 걸렸으니, 디지털 제품을 어떻게 개발할 지 전 그게 궁금합니다.”
“정 대리 생각은 그 부분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 난 제품도 나오지 않았는데 너무 오버한 것이 아닌가 싶어.”
“그건 우리 회사 입장 아닐까요? 와컴은 따로 개발하는 것이 있을 텐데, 분명히 거기에 걸릴 겁니다.”
주섬주섬 나온 이야기는 꽤 다양했다.
터치 반응 속도, 펜 반응 속도, 위치 정확도를 비롯한 기울기나 필압에 대한 것까지 다루었다.
묵묵히 듣기만 하던 배종대 과장은 혀를 찼다.
“정 대리, 누가 보면 네 업무가 전자 펜이 아닌가 싶어.”
“뭐,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설마 그것도 강준석 대리가 만든 자료를 보고 알았다는 거야?”
“제가 서버에 올려두었으니, 한번 살펴보세요.”
“강 대리가 그런 것까지 할 여유가 있어?”
“잠을 안 잡니다. 제가 알기로 하루에 2~3시간 자고, 주말에도 나와서 일하니까. 벨린 소프트 임직원도 다들 혀를 내두릅니다.”
“…대단하네.”
배종대 과장은 소주를 마시면서도 강준석 대리에 대해서 혀를 내둘렀다. 하는 짓을 봐서는 정성근 대리 그 이상이었다.
보다 못한 박상기 차장이 툴툴거렸다.
“배 과장, 회식 자리에서 꼭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나? 적당히 좀 하자.”
“그래도 가장 핫한 이슈 아닙니까. 솔직히 전 와컴이 개박살 나는 것을 보면서 기가 막혔습니다.”
기획 팀 대다수는 배종대 과장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근 대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이 오죽 답답하면, 우리 회사 방문 일정을 잡았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거 정말이야?”
배종대 과장은 힐끗 조용히 술이 아니라 음료수를 마시는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은 팀원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와컴 쪽에서 연락이 왔어. 아마 다음 주에 국내에 들어올 거야.”
“결국 와컴이 꼬리를 말았네요. 일본에서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조성돈 팀장도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철저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협상장에서 가능한 많이 챙겨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묘한 어조가 담긴 조성돈 팀장 말에 배종대 과장도 그렇지만 다른 기획 팀 역시 최민혁 실장을 떠올렸다. 설마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갈지는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우리 최 실장 성격이 참 끝내준다니까.’
뒤늦게 회식 자리에 잠깐 나타난 최민혁은 회식의 화제가 자신이라는 것을 듣자 피식 웃으면서 그 부분은 간단히 언급했다.
“너무 와컴을 대접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번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최민혁은 힘찬 함성을 지르는 기획 팀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역시 긍정적으로 나오는 와컴 행동이 이해가 되면서도 어이가 없기 때문이다.
‘고작 그거에 벌써 항복하다니. 하지만 이대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아. 분명히 다른 꼼수를 쓸 수도 있어. 미리 대책을 만들어야 하나.’
* * *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한국에 도착해서 KM 전자의 스마트 펜 특허 풀을 살피면서 분노를 가까스로 삼켰다. 그는 펜 시장에서 수십 년 동안 있으면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동행한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코지 부사장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히타치 공작소의 시가 박사가 왜 그렇게 난리를 피웠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그는 힐끗 사다 수석 부장을 차가운 눈으로 째려봤다.
“인제 와서 마사히코 이사 라인인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어.”
“네?”
“난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딱히 자네를 상대로 무슨 압박을 하거나, 위협을 한 것도 아니지 않나. 자네에게 지난 KM 전자 미팅에서 도움을 청한 것은 자네의 전문적인 지식 때문이었어. 나한테 왜 이러는 건가?”
“그 무슨…….”
크게 당황한 사다 수석 부장은 코지 부사장 눈치를 계속 봤다. 지난 만남에서 자신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가 오해했다고 판단하자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절대로 회사 내부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가장 피해를 본 것은 나일세. 자네가 작정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을 만들 수는 없어. 당시 KM 전자 실무진과 좋게 대화할 수도 있었어.”
“그게…….”
어이가 없는 질책에 사다 수석 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색한 코지 시마다 얼굴을 봐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래서 사내 정치가 싫었다. 그 문제와 KM 전자 대응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다행히 코지 부사장은 이 문제를 계속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뭐, 지금 와서는 늦은 이야기지.”
코지 부사장은 예약한 호텔 입구에 들어와서야 뒤늦게 걸음을 멈춘 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모든 사태가 결국 KM 전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KM 전자가 짜놓은 그물에 스스로 기어들었다고 확신했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다른 대안이 반드시 필요했다.
“…KM 전자 측과 약속 시각은 이틀 후라고 했나?”
“네.”
코지 부사장 비서도 코지 부사장 눈치를 봤다. 이번 한국행에 동행한 이들 표정이 다들 좋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코지 부사장은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다가 자기 눈치만 보고 있는 사다 수석 부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봐 사다, 자네 저번에 한국 기업과 제휴 때문에 만난 기업이 있지?”
사다 수석 부장은 강렬한 코지 부사장의 시선에 조심스럽게 지난 일을 떠올렸다. 당연히 한국 대기업 중에 와컴과 제휴 협상을 한 기업이 있었다.
다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한국 대기업은 고압적인 면을 보였고, 와컴이 그런 한국 기업과 손을 잡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스마트 펜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장 기억나는 기업은 오성 전자, LC 전자, HY 전자입니다. 특히 오성 전자가 꽤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윗선에서는 소극적이었지만 실무진 입장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 실무진 중에 당장 연락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나?”
사다 수석 부장은 한국행 때문에 미리 준비한 내용을 살폈다. 다행히 오성 전자 임직원 중에 주목받는 인물이 있었다.
“권태성 부장입니다. 아, 지금은 오성 전자 기획실장으로 있습니다.”
“KM 전자와 미팅은 2~3일 뒤로 연기하고, 그쪽이랑 미팅 약속을 잡아봐.”
“…알겠습니다.”
사다 수석 부장은 의문이 있었지만, 굳이 더 묻지는 않았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다. 오성 전자는 KM 전자가 스마트 펜 관련 분야로 영역을 넓히는 것을 원치 않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긴 오성 전자라면, 도움을 얻을 수 있어. 그들이라면 KM 전자가 크는 것을 용납할 리가 없어. 어쩌면 대안이 될 수 있어.’
* * *
최민혁은 와컴에 대한 공략을 시작한 후에 유심히 와컴의 행동을 지켜봤다. 따라서 갑자기 협의 일정을 연기한 것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그런데 답은 오성 전자를 지켜보던 이들 통해서 보고를 받았다.
“권태성 기획실장과 만나기로 했다고요?”
김명준 과장도 혀를 내둘렀다.
“과거 권태성 기획실장이 부장 직급에 있을 때 와컴 쪽과 협상 실무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와컴 쪽에 아는 지인이 제법 있습니다.”
“그래요? 하긴 그럴 수도 있죠.”
최민혁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와컴 반응이 다른 기업에 연락하는 것이라면 나쁜 선택은 아니다. 오성 전자 역시 와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와컴 제안을 받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그 상대가 KM 전자라면 어떨까.
“…한영 일보 반응은 어때요?”
“허리를 납작 숙인 상황입니다.”
“다른 반발은 없습니까?”
“아무래도 지난 ARN 지분 인수에 대한 여론 선동전 일 때문에 몸을 바짝 사리고 있습니다.”
최민혁은 지난 ARN 지분 인수를 떠올리면서 고민에 빠졌다. 딱히 한영 일보를 이 건으로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잘만 이용하면 그게 더 이익이니까.’
ARN 지분 인수 선동전을 했다는 이야기는 다른 대안도 가능했다. 다만 괜히 언론에 압박을 줬다는 이야기가 흘러나가면 그건 또 곤란했다.
차라리 이번 와컴 공격전처럼 이용하는 것이 차라리 좋았다.
“아, 다른 언론사 분위기는 어때요?”
“그쪽은 한영 일보만 지켜보는 중입니다. 자기들에게 괜한 불똥이 튈까 계속 우리 쪽에 연락을 보내는 중입니다.”
언론사가 KM 전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바로 IPS LCD를 두고 일어나는 대기업 간의 갈등 때문이다.
당장 오성 전자와 LC 전자가 대립 중이었다.
거기에 KM 그룹과 DL 그룹이 참전 중이었다.
이들 성향으론 아무리 최민혁 실장을 싫어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최민혁 실장 눈 밖에 벗어날 행동을 하기 어렵다.
다르게 보면 최민혁 실장이 이들을 압박해서 한국 언론사 광고를 다 내리게 할 수도 있었다.
최민혁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한영 일보를 다시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