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그는 솔직히 최민혁 실장이 어떻게 3,000건이 넘는 스마트 펜 특허를 고안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와컴 이사회에서 자신의 입지가 박살이 났다.
이 모든 사태가 자신이 와컴의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다 수석 부장은 심상치 않은 와컴 이사회의 내부 반응 때문에 계속 그의 눈치를 봤다.
“저기 이사님…….”
“사다, 자네도 내가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코지 시마다 부사장을 따르는 이들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흥, 설마 와컴 이사회 내부에 분란을 일으킨 것이 나라는 소리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최민혁 실장 그 새끼 수법이잖아!”
버럭 소리 지른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
하지만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마사히코 이사를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쳐다보았다.
분명히 빌미를 제공한 것은 KM 전자다. 그런데 와컴 이사회 내부에서 이를 이용해서 코지 시마다 부사장 세력을 찍어 누른 것은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 본인이었다.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이런 사내 정치가 정말 싫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라인이 있어야 했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일까?’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사다 수석 부장마저 갈등하자 이를 으드득 갈았다. 굳이 와컴 내부의 다른 사람 분위기를 살필 필요가 없었다.
당장 단호하게 대처해야 했다. 안 그러면 정말 이제까지 큰 갈등이 없던 와컴 이사회가 정말 조각날 수도 있었다.
“…타가하시 마무라 변호사에게 연락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KM 전자 특허 자료를 검토한 바로는 소송한다고 해도 우리가 꼭 유리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면 이사회에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이 사태가 절대로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겠지. 아니, 뭔가 수작이 있을 거야. 아니면 속임수가 있든지 해야 해. 자네가 할 일은 그 원인을 찾는 거야!”
추론에 따른 이야기다. 아직 최민혁 실장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는 그저 단편적인 정보뿐이기에 나온 이야기다.
“그게 저도 확인을 해봤는데, 그 어떤 문제점도 찾지는 못했…….”
“야, 사다 수석,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인간이 그 짧은 기간에 이 많은 특허를 어떻게 고안할 수 있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속이 답답했다. 그는 지난번 조성돈 팀장을 만났을 때 최선을 다해야 했다고 뒤늦게 자책했다.
그랬다면 이런 황당한 경우에 처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설마 KM 전자가 이런 식으로 나올지는 상상조차 못했다.
‘특허 정보를 알았다면 사전 대처 방법이라도 찾았을 거야.’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소극적인 사다 수석 부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마 자네는 책임을 지기 싫어서 그런 건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조성돈 팀장 일행을 만났을 때,……. 아쉽습니다.”
“그딴 변명 따위는 하지도 마. 애초에 우리 와컴에 뒤통수칠 준비를 하고 달려든 거야.”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제가 행동을 잘했다고 하기는 힘듭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자네 탓이 아니야. 처음부터 최민혁 실장 그 새끼는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이고 협상이 문제가 생기자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야.”
“죄송합니다.”
“괜찮다니까.”
하지만 사다 수석 부장을 다독거리는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상황이 자칫하면 최악의 국면으로 갈 수도 있었다.
‘최민혁 실장 이 새끼는 도대체 이런 특허를 어떻게 고안한 것일까? 하지만 진짜는 문제는 코지 시마다 부사장이야. 이번 일을 빌미로 우리 쪽에 대한 압박을 강화할 거야. 차라리 먼저 선수 치는 것이 났겠어!’
* * *
사실 와컴 이사회 내부에 여러 가지 알력이 있다고 해도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와컴 기업이 시장에서 독점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꼭 와컴 이사회 내부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갈등은 존재했다.
최민혁 실장의 제안은 와컴 내부 갈등의 씨앗을 발아시킨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만약 외부 압력 요인이 없었다면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KM 전자의 스마트 펜 관련 특허가 와컴 이사회 갈등의 씨앗을 발아시킨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다.
영업부에서 잔뼈가 굵어서 대인관계가 좋은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는 와컴 이사회 내부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와컴 이사회 내부 혼란에 적극 움직여서 이 모든 사태는 KM 전자가 꾸몄다는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지난 협상 자리도 그저 요식적인 행위라고 말한 것이다.
[이번 일은 코지 시마다 부사장이 괜히 KM 전자를 자극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마사히코 이사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 이사회에서 당신이 한 말은 아예 기억도 못 하는 겁니까!]
[전 어디까지나 주장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코지 부사장님은 행동으로 옮겼지 않습니까. 그건 분명히 코지 부사장님 책임입니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가 자신이 이사회에서 한 말을 다 뒤집은 것을 보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어이가 없는 것은 와컴 이사회의 태도다.
자기 시선을 피한 채 무조건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 손을 들어주었다.
정작 모든 사태는 최민혁 실장이 원흉이라고 몰고 가면서도 자신의 처신이 잘못되었다는 질책을 받았다.
1차 협상 과정에서 사전에 최민혁 실장의 흉계를 알았다면 얼마든지 대안을 강구할 시간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이 모두 자신 탓이라고 한다.
‘답답하네.’
그 자신이 이 상황을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KM 전자의 특허 때문이 아니라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의 행동 때문이다.
지난 수년간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지만 마사히코 야마다 이사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상리에 벗어난 일이었다.
* * *
이사회가 끝난 후에 타가하시 마무라 변호사 역시 코지 부사장을 독대한 자리에서 마사히코 이사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마사히코 이사는 소송으로 끌고 가자고 주장하면서도 회사 차원에서 KM 전자에 대한 대응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일을 나보고 맡으란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지난 협상 자리를 주도한 분이 코지 부사장님인 것은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당시 KM 전자의 제안은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커닝의 켐코 사업부 상황 때문에 KM 전자를 무시하기 힘들었다.
결국 자신이라도 나서서 KM 전자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다.
물론 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한 협상 자리에서 뭔가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 보지 않았다.
물론 자신의 대응이 너무 소극적이란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고작 그 대응 때문에 KM 전자가 보복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응하기도 어렵구나.’
자칫 잘못했다가는 자신이 KM 전자의 갈등에 대한 문제를 다 뒤집어쓸 수도 있다. 만약 사태가 악화한다면 그 자신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웠다.
‘20년 동안 밑바닥에서 구르면서 별의별 짓을 다 했는데, 설마 이 일 때문에 내 위치가 흔들린다는 말인가. 이게 모두 최민혁 실장 그 인간 짓일까?’
* * *
최민혁이 원래 의도한 것은 와컴 내부를 흔드는 일이다. 특히 와컴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박살 내서 보수적으로 있지 못하게 하는 게 목표였다.
결과는 그의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와컴 이사회 내부에서 말들이 나오고 있다는 말입니까?”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일본 언론의 반응을 언급했다.
“아무래도 아사히 신문의 기사가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후속 기사가 나오면서 와컴 이사회 내부는 더 크게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거 좋네요. 그렇다면 일본 언론이 와컴 미래를 불신할 수 있도록 손을 써보세요. 필요하다면 광고를 더 넣어도 됩니다.”
“하지만 일본 매출이 그렇게 크지 않은데, 효과가 있을까요?”
“상관없습니다. 더욱이 MP3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계속 외부에서 흔들어야 내부 갈등이 심해지니까.”
조성돈 팀장도 지금까지 최민혁이 한 지시와 결과를 떠올리면서 혀를 내둘렀다. 상상을 초월한 공격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켐코와는 대응이 다른 것 같습니다.”
“켐코와는 상황이 좀 다른데, 그쪽은 꼭 사업부 인수를 안 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커닝 쪽에서 납품을 받는 것도 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스마트 펜은 좀 다릅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요. 만약 와컴에서 차세대 제품을 출시한다면 이런 압박도 안 먹힐 겁니다.”
실제로 인투스 출시 이후에는 와컴 분위기가 완벽히 달라진다.
전자 출판 시장을 적극 공략하면서 회사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뛴다.
그 상황이 된다면 최민혁이라도 해도 와컴을 흔들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조성돈 팀장 역시 와컴 내부를 조사하면서 차세대 제품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민혁 실장 이야기를 듣자 와컴의 미래를 대충 그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특허가 지금의 와컴에게는 치명적이었구나.’
“…알겠습니다. 요미우리 신문을 비롯한 필요한 언론사는 다 접촉하겠습니다.”
“아사히 신문이 이미 심지에 불을 붙인 상황이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다만 굳이 무리하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네.”
* * *
아사히 신문을 시작으로 요미우리 신문이 후속 기사를 내보내면서 와컴 내부의 갈등은 더욱더 심해졌다.
와컴 이사회 소집이 하루건너 한 번 꼴로 열리면서 KM 전자 대응책을 세웠다.
물론 와컴 이사회에서는 이번 사태에 대한 희생양으로 코지 시마다 부사장을 선택했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시간이 갈수록 와컴 이사회의 압력을 받자 계속 침묵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섣불리 나서서 자살 특공대가 될 수는 없었다.
이때 나선 사람은 뜻밖에도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이다.
그는 와컴 이사회 자리에 나와서 KM 전자가 아사히 신문 한 페이지를 통해서 공개한 특허 풀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지금 당장 파는 제품은 문제가 아니지만,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차세대 제품은 모두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합니다.]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원천 기술을 보유한 우리가 왜 재검토를 해야 합니까?!]
[KM 전자에서 내놓은 특허는 우리 차세대 제품을 타깃으로 한 특허입니다.]
[차세대 제품이라면, 설마 인투스를 말하는 겁니까?]
[…네.]
인투스는 와컴의 펜과 디지털을 연결해 주는 다음 세대 기술로 와컴 이사회 역시 내심 큰 기대를 하는 제품이었다.
기존 와컴 제품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즉 세대를 완전히 뛰어넘은 핵심 기술이었던 것이다.
와컴 이사회가 외부 압박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다. 실제로 와컴 스마트 펜 기술의 가장 정점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제품이 바로 디지털 시대로의 방향 전환의 키포인트 제품이나 마찬가지다.
[아니, 그러면 우리도 특허를 출원하면 되지 않습니까?]
[늦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을 하는군요. 아니, KM 전자가 우리 차세대 제품 정보를 아는 상황이 아닌데, 어떻게 출시하지도 않은 제품을 겨냥해서 특허를 출원합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야마모토 수석은 이제 와컴 내부 정치질보다는 이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도 조사를 진행하면서 드러난 특허 내용에 경악했다.
KM 전자의 스마트 펜 특허는 너무 많아서 단기간에 그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중에는 인튜스와 관련된 부분이 꽤 많았다. 아니 대부분의 특허는 기존 와컴 특허가 아니라 차세대 제품을 타깃으로 했다.
그가 이 정보를 뒤늦게 안 것은 책임 문제 때문에 눈치만 보던 연구원의 뒤늦은 보고 때문이다.
와컴 이사회는 시장 바닥처럼 시끄럽게 변했다.
[사다 수석 부장,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도대체 지금까지 차세대 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말하면서 한 게 뭐야. 어떻게 KM 전자가 한 특허보다 더 못해!!]
[이번 사태에 대해서 당신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