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16화 (416/1,021)

#416.

아직까지 최민혁이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모바일 시대를 완전히 읽지 못한 것이다.

이 정도면 딱히 외부에 정보가 누출되어도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어차피 핵심이 되는 기술은 이미 다 확보했기 때문이다.

그는 혹시 자기 속마음을 유출되었나 싶어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깜짝 놀랐잖아. 아, 와컴이 문제군. 설마 이 정보가 외부에 흘러나가지는 않겠지.’

최민혁은 새삼 혀를 내두른 채 이 보고서의 저자를 살폈다.

‘강준석 대리와 정성근 대리라. 역시 두 사람은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르군. 하긴 강준석 대리를 실리콘 밸리에 떨어뜨려 놓았으니, 뭔가 하기는 했을 거야. 하지만 이 정도로 성과를 낼지는 몰랐네. 아, 정 대리가 있었지. 그 친구라면 강준석 대리 잠재력을 최대한 뽑아낼 수 있어.’

강준석 대리는 문제가 많은 친구다. 특히 집착이 너무 강해서 어지간한 스토커 그 이상이다. 실제로 인생 1회차에 헤어진 여자 친구를 스토킹하다가 입건된 적이 있었다.

당시 사내에서는 이 일이 입소문이 나면서 난리가 났다.

그런데 강준석 대리가 딱히 무슨 나쁜 마음을 먹고 쫓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여자 친구와 다시 화해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드라마와는 달랐다.

다만 같은 동료는 강준석 대리가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인지 잘 알았다. 그들은 강준석 대리를 비방하지는 않았다.

이런 여자에 대한 집착은 업무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강준석 대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쉽게 포기하는 이가 아니다.

‘이제까지는 방법도 몰랐고, 얻는 정보도 한계가 있었지. 그런 친구가 쉽게 자신이 만든 보고서를 포기할 리가 없지. 기회가 생긴다면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심지어 조직 내부 연공서열 문제를 배제하면 극대화될 수밖에 없어.’

최민혁은 자신이 만든 일이지만 그 결과가 예상대로 흘러간 것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기 실장님.”

“아, 말씀하세요.”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 표정을 굳어 있는 것을 보자 혀를 내둘렀다. 그가 굳이 이 보고서 내용을 미리 밝히지 않은 것은 괜히 이 정보가 외부에 흘러나갈 것을 염려해서였다.

물론 조성돈 팀장이 이 정보를 멋대로 흘리지는 않겠지만, 단적인 예로 최용욱 회장이 조성돈 팀장을 상대로 집요한 요구를 한다면 그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다고 봤다.

‘차라리 스스로 알기를 바랐는데…….’

설마 그 일을 강준석 대리와 정성근 대리가 해결할지는 몰랐다.

아마 조성돈 팀장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울 것이다.

최민혁은 물론 조성돈 팀장이 왜 이 자리에 온 것인지 금방 눈치챘다. 조성돈 팀장 나름 자신의 실책을 어느 정도 알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할 제안은 한 가지뿐이다.

“KMP-01 후속 모델을 개발하고 싶은 겁니까?”

“네. 그건 와컴 기술이 필요가 없습니다. 펜 기능을 넣는 것은 상황 봐서 추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성돈 팀장은 머뭇거렸다. 지금까지 최민혁의 행동을 보면 최 실장님은 이미 이 보고서 내용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아니, 그 이상일 거야. 이게 다가 아닐 테니까. 그런데 최 실장님은 도대체 이렇게 장기적인 그림을 그린 것일까?’

달랑 IPS LCD 하나만 놓고 봐도 히타치 공작소가 몇 년에 걸쳐서 진행하던 일이다.

그렇게 보면 다른 영역 하나하나도 일반적인 연구소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의혹은 끝도 없이 솟아났다.

최민혁은 물론 조성돈 팀장의 의혹을 해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이 보고서는 꽤 마음에 드네요. 그리고 터치 타입의 차세대 MP3를 한번 검토해 보세요. 아니, 필요하다면 시제품을 진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죠. 디자인 팀 쪽에도 협조 요청하세요. 오성 전자나 LC 전자도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소형 LCD는 핸드폰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맙소사!”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형 LCD는 얼마든지 다양한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특히 핸드폰 LCD가 대표적이다. 그 시장도 커서 파급효과가 엄청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LCD 패널 시장은 파이 자체가 터무니없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오성 전자가 굳이 2.7인치 IPS LCD 시제품을 무리하게 한 이유도 뒤늦게 깨달았다.

최민혁은 평소와는 다른 조성돈 팀장 모습에 씩 웃고 말았다. 자기 세계가 깨진 조성돈 팀장 얼굴은 정말 볼 만한 것이었다.

“이번 일은 조 팀장님이 책임지고 한번 진행을 해보세요.”

최민혁 실장은 씩 웃고 나서는 더 보고서와 관련된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스스로 이 정보를 밝혔다면 굳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만든 것이니까. 그나저나 생각보다는 빨리 성장하네.’

* * *

조성돈 팀장은 KMP-02 개발 기획서를 만들면서도 와컴 인수에 대한 것을 소홀히 처리하지 않았다. 이전 켐코 사업과는 달리 와컴 인수 의미를 확신하기에 적극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와컴 인수 자체가 난관이었다.

박상기 차장은 강준석 대리의 보고서 내용을 떠올리면서 안색을 굳혔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와컴이 어떤 형태로든지 협상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그나마 일본 경제 상황이 최악이라서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본 경제 사정이 나빠지면서 문제가 된 것은 일본 내수 경제다.

서민 돈줄이 마르면서 수요가 대폭 줄어들었다.

아무리 와컴이라도 매출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들이 차선으로 내세울 것은 역시 외국 시장 공략이었다.

실제로 유럽, 미국 지사를 낸 후에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수요가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PC용 펜 시장이다.

문제는 이 프로젝트를 막 착수해서 끝나는 시점이 최대한 빨라야 2년이고, 정상적이라면 3~4년은 족히 걸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번 와컴 지분 인수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단호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박상기 차장의 모습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다.

켐코 사업부 인수 때의 소극적인 모습과는 달랐다.

조성돈 팀장은 박상기 차장의 의견에 충분히 공감했다.

“결국 와컴에 자신의 지분을 내놓을 만한 이권을 내놓아야 한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득 그는 강준석 대리 보고서에 나와 있는 IPS LCD 패널, 터치 유리, 와컴 터치 기술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K투스가 이런 식으로 연결된다니. 정말 볼수록 놀랍구나. 단순히 이어잭만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K투스는 무선 근거리 통신망이다. 결국, 이 방식은 얼마든지 터치펜에도 사용된다. 펜이 아니면 시스템 연결 방식에도 접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와컴은 이런 기술이 꼭 필요했다.

최민혁은 물론 이 블루투스 기술이 공개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K투스는 모든 회사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따라서 K투스를 이용해서 와컴을 압박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아니, 조성돈 팀장은 보고서를 다시 꼼꼼히 살피다가 뒤늦게야 IPS 패널 기술에서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바로 IPS 패널은 TN 패널에 터치 시에 액정이 밀리는 현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거였구나.’

조성돈 팀장도 처음에는 이 기술이 다 동떨어져서 최민혁 실장이 뭘 하는지 영문을 몰랐다. 그런데 하나로 모아보니, 다 필요한 기술이다. 특히 터치가 사용된 모바일 기기에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저전력 컨트롤러가 다수 필요해. 그래서 ARN 지분을 인수했구나.’

조성돈 팀장은 일주일에 걸친 강행군 팀 미팅을 진행하면서 결과를 도출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민혁 실장을 직접 찾아가서 자신의 추론을 말해보았다.

“흠.”

최민혁은 딱히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아시겠죠?”

“물론입니다.”

“그러면 일본행 비행기, 아니, 중국행, 아니, 홍콩행 배편이나 마련해 두세요.”

“…알겠습니다.”

* * *

두 번째이기는 하지만 배로 홍콩을 거쳐서 일본을 가는 여정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다만 최민혁의 입장은 좀 달랐다. 그는 IPS 패널 사업 때문에 오성 전자, LC 전자, KM 그룹, DL 그룹이 박 터지는 싸움터에서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네 세력은 최민혁 행보를 이전처럼 심각하게 지켜보지 않았다.

이미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카드가 다 밝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IPS LCD 기술이 아니라 IPS LCD 시제품, 정확히는 양산 기술이었다. 물론 협상도 중요했다. 그런데 이 일을 적극 나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로 최민혁 실장이 자신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1억 달러 부를 것을 2억 달러, 아니, 3억 달러로 부르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덕분에 사이타마현 북동부에 있는 가조시에 조용히 도착했다.

그는 우동의 거리에 둘러서 다양한 우동을 시식하고, 관광까지 여유롭게 즐겼다. 바로 켐코 사업부를 인수하면서 얻은 경험 때문이었다.

여유가 생기자 켐코 사업부 인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다.

비록 결국 켐코 사업부를 인수했지만 실패할 수도 있었다.

바로 자신의 커진 영향력, 이름값 때문이다.

K투스 사태 이후에 자신을 견제하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을 감시하는 이도 있었다.

아마 와컴 쪽과 협상을 하는 순간에 그 정보는 와컴 인맥을 통해서 일본에서 방귀 좀 뀌는 기업에는 다 알려질 것이다.

더불어 한국 기업은 자연스럽게 그 정보를 알 것이다.

‘고민이군.’

자신이 나서서 와컴 지분을 투자를 검토해야 할 정도로 와컴 협상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자신이 직접 얼굴을 들이밀면 와컴 애들이 커닝 이사회처럼 엉뚱한 오해를 할 가능성이 높았다.

“너무 앞선 걱정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신경을 써야겠습니다.”

조성돈 팀장도 이 부분은 공감했다. 그는 특히 강준석의 보고서를 떠올리면서 최민혁에 대한 시선을 무겁게 봤다.

“아무래도 히타치 공작소 일도 있으니, 최 실장님이 나서면 문제의 소지가 큽니다. 아니, 전 반드시 문제가 될 거로 생각합니다.”

“히타치 공작소 말입니까?”

“네. 히타치 공작소의 IPS LCD 연구 책임자인 시가 마사아키 박사가 한동안 병원에 입원했다고 얼마 전에 퇴원한 것으로 보고받았습니다. 이들 중에는 와컴 쪽 엔지니어와 가까운 인맥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긴 학벌만 꼽아도 문제군요.”

“네. 와컴 원천특허 개발자인 센다 오게가와 박사를 비롯한 세 사람은 모두 동경 대학 출신입니다. 이들 인맥은 다 그 정보를 공유할 겁니다.”

“하긴.”

최민혁도 순순히 인정했다. 89년에 와컴 원천 특허를 만든 엔지니어 뿌리가 그냥 아무 곳에서나 나올 리는 없을 것이다.

즉 다르게 보면 시가 마사아키 박사 인맥을 통해서 알음알음 히타치 공작소 일이 퍼졌다고 봐야 한다. 와컴은 예외가 아니다.

만약 와컴 내의 핵심 엔지니어가 최민혁 실장을 안다면 협상은 시작부터 복잡해질 것이 분명했다.

“…켐코 상황과는 또 다르군요. 그 고집스러운 꼰대 데니스 워드 부사장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습니다.”

데니스 워드 부사장은 기술적인 면에서 천재는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보는 안목이 높았다. 와콤 상황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우영민 부장이 슬그머니 나섰다.

“이번에는 제가 한번 먼저 나서 보겠습니다. 이미 조 팀장님도 실장님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으니, 한번 믿고 맡겨주십시오.”

“좋습니다.”

최민혁도 순순히 우영민 부장 제안을 받았다. 이번 일은 역시 자신이 얼굴을 들이밀지 않는 것이 확실히 좋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었다.

“어설픈 제안은 안 먹힐 겁니다. 모바일 산업과의 접목에 대해서 의견을 밝히고, 우리가 가진 핵심 기술도 보여주세요. 이제는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이 좀 달라질 겁니다. 특히 IPS LCD 기술을 보여주면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이미 IPS LCD 원천 기술에 대해 검토를 했기에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최민혁이 이전과는 달리 자신을 숨기지 않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역시 최 실장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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