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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17화 (417/1,021)

#417.

디지타이저 일체형 터치스크린 방식에 관한 연구는 2,000년대를 넘어서도 나오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터치가 가능한 IPS LCD 기술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다음은 역시 이를 이용한 모바일 상품이 나오지 않아서다.

와컴 연구소 역시 이런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이 사업 자체에 대해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안으로 마우스 패드 형태의 입력 방식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가 존재했다.

그 하나는 느린 RS 232 인터페이스였다.

특히 유선 방식은 또 다른 발목을 잡았다.

근거리 무선 통신망 개발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와컴은 단순한 형태의 입력 방식과 선행 개발로 혁신적인 다른 방식 연구를 병행해서 투자했다.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와컴의 취약점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정체된 이 연구에 대한 다른 방안을 찾기도 했다.

그런 그도 갑작스러운 본사 이사회의 지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KM 전자에서 온 이들을 만나서 협상을 해보란 말입니까?]

[본사에 오면 자세한 사항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본사에 도착해 보니, 부사장 코지 시마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품질 파트에서 잔뼈가 굵은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와컴 품질 혁신 성과를 인정받아서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사다 수석, 혹시 KM 전자라고 들어봤나?”

“KM 전자라면…… 혹시 히타치 공작소 기술을 도둑질한 그 KM 전자를 말하는 겁니까?”

“쯧, 그렇지 않아. 그건 히타치 공작소가 퍼뜨린 헛소문이니까.”

“하지만 제가 듣기로…….”

“물론 히타치 공작소 입장에서는 불만이 많겠지. 고작 한 달 남짓한 사이에 KM 전자에게서 날치기를 당한 것이니까. 하지만 기술을 훔쳤다는 증거는 없었어. 재수가 없을 뿐이지.”

“…….”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로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코지 부사장은 사다 수석 부장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조언이 필요했다.

“그보다 우리 회사 일이 더 중요해. KM 전자 측에서 우리 쪽에 협상을 제안했네.”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건 코지 부사장 역시 영문을 잘 몰랐다. KM 전자의 요청은 뜬금없었다. 그 역시 히타치 공작소에서 일어난 소송을 잘 알기에 KM 전자를 모를 수가 없었다.

‘히타치 공작소가 이기기 힘든 싸움이야. 그러니 만만하게 볼 수 없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으니까.’

“우리 쪽에 펜 원천 기술이 있지 않나. 아마 그 기술이 필요한가 봐.”

KM 전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냉철하게 말했다.

“그런 제안은 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사회 생각은 좀 달라. 물론 다는 아니지만, 윗선의 일부는 KM 전자 요청을 들어봐야 한다고 해. 따라서 그들 주장이 무엇인지는 확인을 해야 해.”

복잡한 와컴 이사회 사정을 딱 잘라서 한 말이지만 간단한 의미는 아니다.

와컴 이사회는 커닝 이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많이 다르다.

그들은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왕으로 군림하면서 아쉬울 것이 없었다.

따라서 3년 전이었다면 KM 전자의 제안을 뭉갰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본 경제가 쪼그라들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와컴도 보험으로 뭔가 하기는 해야 했다.

문제는 차세대 제품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는 와컴 이사회도 확신하지 못했다.

사다 수석 부장은 이사회 내부 갈등을 익히 잘 알고 있기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말씀입니까?”

“뭐, 우리 회사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냐. 다만 최근 IT 기술의 변화 때문에 상황이 이전과는 달라졌어. 따라서 이전처럼 과거에만 집착할 수는 없어. 뭔가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해.”

“그거야 차세대 제품 프로젝트를 통해서 진행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미 기획 팀을 통해서 보고했지만 97, 98년에 각각 시장에 새로운 제품이 나올 겁니다. 그리고 이건 서두를 일이 아닙니다.”

“알아. 하지만 난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쪽이 보는 시장만으로는 너무 협소해. 좀 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어.”

“그건 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미국 기업과 손을 잡아도 됩니다. 굳이 KM 전자가 그 대상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미국 기업조차 MP3 분야만큼은 KM 전자의 상대가 되지 않아.”

“…정확히 무슨 말입니까?”

“자네도 KMP-01을 봤지? 난 그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 우리 일본의 카세트 플레이어 시장은 여기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어.”

실제로 카세트 플레이어와 관련된 일본 기업은 초상집 분위기다. 최민혁이 일을 질질 늘리는 바람에 더 상황은 심각했다.

카세트 플레이어 관련 기업은 생존을 위해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KM 전자가 MP3 원천 특허를 다 가지고 있는 덕분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미 카세트 시장은 점점 말라서 죽어가는 중이었다.

사다 수석 부장은 카세트 시장의 몰락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KMP-01은 우리 사업과는 겹치는 부분이 없습니다. 이미 에플이 이상한 모바일 제품으로 한번 손을 댔다가 다 말아먹지 않았습니까?”

“에플이 그랬지. 하지만 KM 전자는 어떨까. KMP-01을 만들고, ARN 지분을 얻어서 저전력 CPU 기술에, IPS LCD 특허, K투스와 같은 무선 근거리 통신망 기술을 가진 KM 전자가 과연 에플같이 허술한 행보를 보일까?”

사실 와컴 이사회가 KM 전자 제안을 받고 나서 조선 말기 당파 싸움처럼 갈등과 대립을 시작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유다.

그들 처지에서는 혁신과 개혁을 통해서 무섭게 발전하는 KM 전자가 한편으로 부러우면서도 질투심이 들었다.

와컴 이사회는 결국 일본 통신사처럼 일단 KM 전자 측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거야…….”

사다 야마모토 수석 부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역시 한국인이 싫어서 자세히 살피지는 않았다. 그런데 코지 시마다 부사장 이야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는 그 배후의 와컴 이사회를 말이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그런 사다 수석 부장을 보면서 소리쳤다.

“공과 사는 구분을 하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을 KM 전자가 가지고 있어. 따라서 서로 손을 잡는다면 우리에게도 큰 이익이야.”

“서, 설마 KM 전자의 투자라도 받을 생각입니까?”

“그들이 충분한 이익을 보장해 준다면 못 할 것도 없지 않을까?”

“…….”

사다 수석 부장은 코지 부사장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자신이 주장한다고 해서 먹힐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와컴 회사의 이익이다. 이사회조차 KM 전자와 손을 잡는 것이 이익이라면 투자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던 것이다.

다만 그 일이 꼭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와컴 이사회를 주도하는 이들은 여전히 고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괜한 이사회 내부 알력 싸움에 낀 것 같아서 사다 수석 부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젠장.’

* * *

협상 자리에는 최민혁 실장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무슨 생각인지 ‘최민혁 실장’을 몇 번 언급했다.

“이 중요한 자리에 최민혁 실장님이 나오지 않은 것입니까?”

“아, 그게…….”

“실망스럽습니다. 설마 KM 전자는 이 미팅을 장난으로 여기는 겁니까. 우리 와컴 이사회가 이 협상을 두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아십니까?”

“죄송합니다.”

“그런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이면 협상하기 곤란합니다.”

조성돈 팀장은 무려 12명이 자리한 회의 자리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우영민 부장의 제안에 따르기는 했지만 와컴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설지는 몰랐다.

‘커닝과는 다르구나.’

당연히 와컴과 커닝은 입장이 전혀 달랐다.

와컴은 KM 전자와 꼭 손을 잡지 않아도 문제가 없었다.

다만 그들은 KM 전자와 손을 잡아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많았다.

그중에 가장 큰 것은 역시 아직 자신이 미래 핵심 사업으로 보고 있는 모바일 사업이다.

최민혁 실장의 부재에 실망한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언급했다.

“우리 와컴은 굳이 다른 회사의 투자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KM 전자는 모바일 사업이라는 과실이 있는 기업이라는 점에서 이야기가 다릅니다. 우리 사업도 성장하겠지만, KM 전자 역시 마찬가지이니까.”

“…사실 우리 회사도 그 점을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협상에 준비 없이 나오실지는 몰랐습니다.”

“여기 우영민 부장은 벨린 투자의 최고 실무자로서 이 자리에 나올 자격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우영민 부장은 굳이 코지 부사장을 자극하지 않았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명분을 얻었기에 그걸로 공격하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둘 사이가 파토가 나지 않은 것은 이 협상 자리가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와컴은 스마트 시장에 더 빨리 진출할수록 사업 매출을 키울 수가 있다.

코지 시마다 부사장은 그 시장까지 예측하지는 못했지만 장래가 밝다는 것은 잘 알았다.

그가 굳이 KM 전자 제안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투자 금액과 지분과 관련된 협상이다.

와컴은 시작부터 무리한 요구를 했다.

와컴 지분 10% 기준으로 1억 달러를 요구한 것이었다.

인생 1회차에서 오성 전자가 10년 후에 지분을 얻은 가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영민 부장은 이번 1차 미팅이 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 늦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의실에 들어온 인물은 타가하시 마무라 변호사였다. 와컴 법무 팀 소속으로 이사회 내에서도 꽤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다.

덧니를 가진 타가하시 변호사는 전형적인 인물 상으로 보통 사람 눈빛과는 달리 탐욕에 가득했다.

그는 또한 고압적인 일본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웃기는군요. 급한 것은 당신네 KM 전자일 텐데, 그렇게 뻔뻔하게 나와도 됩니까. 굳이 회의를 더 지속할 이유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도 협상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의 성격으로는 힘든 일이지만 최민혁의 지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을지 모르겠네.’

* * *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우영민 부장은 이미 타가하시 변호사의 고압적인 태도를 보자 거래가 힘들다는 것을 판단하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번 일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민혁은 씩 웃으면서 주섬주섬 짐을 챙기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만큼 했으면 한국으로 갑시다.”

“네? 지금 말입니까?”

“아니, 우 부장님이 지금 협상이 어렵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우리가 일본에 계속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조성돈 팀장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일이 이렇게…….”

“그런 말씀 마세요. 아니다 싶으면 그걸로 끝내면 됩니다. 대신 다른 대안이 있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와컴을 상대로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할 생각입니까?”

“못 할 것도 없지만, 굳이 괜히 일본 정부를 자극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평화적인 방법도 많습니다. 다른 대안을 쓸 생각입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차라리…….”

최민혁은 툴툴거리면서 자기 짐을 계속 챙겼다.

“이제 막 기억났습니다. 호텔에 혼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와컴 이놈들이 딴 수작을 부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아니, 그걸 조 팀장님이 저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

“아, 이런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조성돈 팀장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협상 자리에서 문제가 생길 것을 사전에 예측해서 대비하는 것이 자기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상급자에게 묻고 있었으니.

‘후유, 답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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