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15화 (415/1,021)

#415.

“전 두 분이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모르겠습니다. 보고서를 잘 보면 누구라도 끈기만 있다면 할 수 있을 일입니다.”

“그래, 끈기 좋다. 야, 상식적으로 좀 생각을 해봐라. 이게 어디 신입 사원이 인내심이 좋다고 만들 수 있는 보고서야?!”

정성근 대리는 들들 볶는 두 사람 때문에 결국 도망치고 말았다.

[야, 정 대리, 너 정말 이럴 거야?!!!]

[…….]

정성근 대리는 복잡한 사내 갈등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정말 순순한 의도로 강준석 대리를 도와준 것뿐이었다.

* * *

조성돈 팀장은 정성근 대리가 올린 중간 보고서를 보고는 몇 가지 문제가 된 부분을 직접 수정한 후에 고민에 빠졌다.

그다음으로는 KM 전자에서 진행하는 일을 다시 재검토했다.

최민혁 실장이 큰일을 지시하기는 하지만 그 외에 소소한 것도 많다.

그런 프로젝트 일부는 최민혁이 구체적으로 뭘 하라고 명시하지 않았다.

그건 최민혁 기획실장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각 담당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들 중에는 최병연 이사도 있다. 그는 최민혁이 지시한 프로젝트 외에 나름 꼭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따로 최민혁과 협의했다.

다만 그런 내용 중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은 보고하지 않았다.

일테면 차세대 MP3에 터치 기능을 넣더라도 어떤 식으로 넣어야 하는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다.

조성돈 팀장은 KM 전자 본사에 있는 중앙 연구소 내의 최병연 소장실을 찾아가서 알게 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실험실 한쪽에 놓인 것은 2.7인치 크기 LCD가 장착된 새로운 시제품이었다.

“…설마 벌써 IPS 개발에 성공한 겁니까?”

“김호동 박사 연구실 측에서 샘플로 제공한 겁니다. 비록 9㎳ 응답 특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기술적으로 문제가 좀 있습니다.”

“……!!”

조성돈 팀장은 깜짝 놀라서 최병연 소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저, 정말입니까?”

“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김호동 박사도 우리 쪽 지시를 받고 나서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일이 빨리 풀려간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김호동 박사도 결국 자신이 이제까지 거래한 업체가 오성 전자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을 슬쩍 눈감아주고 말았다.

오성 전자는 김호동 박사 연구실에서 기술을 빼돌린 후에 연구원을 갈아서 결국 2.7인치 IPS LCD를 개발했다.

그들은 김호동 박사의 외주를 받는 중견 기업 통해서 자신이 만든 시제품을 슬쩍 납품했다.

혹시라도 김호동 박사가 이 IPS LCD의 시제품 문제점을 찾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니면 법적인 문제라도.

그런데 김호동 박사는 아무런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결과만을 요구했다.

김호동 박사는 덕분에 훌륭한 결과물을 받아서 KM 전자 측에 공급했다.

“김호동 박사는 이런 상황을 좋아하는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양산 기간을 당기기 위해서라는 명분 때문에 참는 눈치였습니다. 오성 전자가 확실히 품질만 보면 월등하니까요.”

“허.”

조성돈 팀장은 혀를 찼다. 그도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알기에 이런 상황을 부추기기는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빨리 진척되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다.

최병연 소장은 비용 문제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딱히 이런 상황을 걸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 의도를 잘 알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저희가 IPS LCD를 양산할 게 아니라면 빨리 결과가 나오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입니다. 그게 오성 전자가 되었든, LC 전자가 되었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최병연 소장도 썩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의 이런 행보에 오히려 찬성했다. 차라리 이게 KM 전자에는 이익이기 때문이다.

“아직 샘플이 없는 상황에서 특허료를 협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만약 결과가 이렇게 나온 후라면 상황이 다릅니다. 최민혁 실장님의 무리한 요구를 오성 전자도 거부하기 어려울 겁니다.”

“혹시나 오성 전자가 기술을 베끼지 않을까요?”

“베낀다라? 뭐 우리 회사 차원에서는 손해 맞습니다. 그런데 이 제품의 의미를 본다면 상황이 좀 다릅니다. 우리 회사에는 큰 이익이 됩니다!”

최병연 소장은 천천히 KMP-02 시제품 앞으로 가서 손끝으로 화면을 긁었다.

화면 위에 있던 노래 리스트가 차례대로 다양한 화면으로 바뀌었다.

쫘르르 돌아가는 소리는 마치 시계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최병연 소장은 이번에 좌우로 화면을 터치한 후에 밀었다.

이번에는 MP3 기능 조정을 할 수 있는 설정 화면이 떠올랐다.

팝송, 발라드 특성에 따라서 주파수를 변경할 수 있는 화면이다.

그는 두 손가락 화면을 터치한 후에 양옆으로 벌렸다.

이번에는 화면이 확대되었다.

다시 두 손가락 간격을 좁히자 화면이 축소되었다.

그 다음에 세 손가락을 사용했다.

가벼운 터치 동작에도 화면이 마치 손끝에 붙은 것처럼 유연하게 바뀌었다.

“어떻습니까?”

“…신기하군요. 하지만 전 이런 보고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하신 겁니까?”

“벨린 소프트의 스콧 포스탈 작품입니다. 이 시제품을 받은 후에 몇 가지 안을 제시했는데, 꽤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허락을 했습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했다는 말입니까?”

“아, 강준석 대리가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더군요. 스콧은 그 제안이 꽤 재미있어서 응용했는데, 애초에 KMP OS 자체가 Darwin 기반으로 되어 있어서 작업이 어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최병연 소장은 시제품을 여자 친구 볼 만지듯이 부드럽게 터치하면서 툴툴거렸다.

“애초에 최 실장님은 이런 상황을 다 예측하고 지시를 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그 일이 쉽지는…….”

“아무래도 우리 쪽에서 제공한 디지타이저 컨트롤러에 꽤 관심을 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일에 더 매달린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특허는 따로 출원했습니다.”

“아, 그 특허가 이 특허였군요.”

조성돈 팀장은 착잡한 얼굴을 한 채 자책했다. IPS LCD 특허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개발 단계에서 올라온 다른 여러 특허를 과소평가했다.

사실 터치를 이용한 특허 개념에 대해서는 그도 선뜻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엔지니어가 내놓은 아이디어 일부라고만 봤다.

그런데 막상 구현된 것을 보자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소장님도 보통 분이 아닙니다.”

“최 실장님의 의도를 조금만 잘 살펴보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애초에 이런 방향을 잡는 것이 정말 힘든 일입니다.”

최병연 소장은 조성돈 팀장 표정을 보면서 위로해 주었다.

“어떻게 보면 큰 의미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좀 달라질 겁니다. 만약 와컴 지분을 인수할 수 있다면 펜을 응용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최병연 소장을 한 예를 보여주었다.

터치를 길게 누르자 바탕 화면이 나타났는데, 그중에 메모 아이콘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 전체가 메모 화면으로 바뀌었다.

최병연 소장은 그 화면 위에 손가락으로 ‘KMP-02'란 글자를 적었다.

“응용 범위가 넓군요.”

“LCD 화면이 커지면 더 다양한 가능성이 생깁니다. 펜을 사용할 수 있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여전히 굳은 안색을 한 채 KMP-02 시제품 테스트를 지켜봤다. 터치를 사용한 방식은 기존 KMP-01과는 완전히 달랐다.

당장 중앙의 스위치 버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최민혁 실장의 혜안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기술을 적용하면 디자인이 아주 달라져. 역시 최 실장님은 정말 상상을 할 수 없는 분이구나.’

* * *

KMP-01은 아직 여전히 순조로운 매출을 보이고 있었다.

만약 64MB 낸드 메모리 공급만 순조로웠다면 매출은 빠르게 늘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성 전자의 낸드 메모리 수급은 상황이 여전히 좋지가 않았다.

도시바조차 수율 문제를 경험하면서 삽질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대리점의 요구는 시간이 갈수록 빗발쳤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덕분에 KM 전자에 대한 브랜드 가치는 수직으로 치솟았다.

오성 전자 낸드 메모리의 수급이 풀리는 순간에 수출 대박도 꿈이 아니었다.

KM 전자 주가가 어느덧 27만 원 대에 올라선 것이 그 증거였다.

KM 전자 주가는 조정 국면을 거치면서 25만 원대에 올라선 후에 단숨에 27만 원대까지 올라섰다.

이 과정에서 국내 개미나 증권사가 보유한 물건을 다 쓸어 담은 세력이 바로 외국인 투자자다.

외국인 투자자는 계속 주가 등락폭을 키우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단숨에 시장에 도는 물량을 다 쓸어 담은 것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이 KM 전자 주가 흐름이 단순히 실적 장세가 아니라 미래 가치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한심하구나.’

그는 그때야 최민혁이 굳이 강준석 대리를 조기 진급시킨 이유를 뼈저리게 느꼈다.

‘달라. 실장님은 다른 경영자와는 색깔 차이가 있어.’

대표적인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긴장이 가득한 기획 팀의 모습이다.

KM 전자의 승승장구에도 기획 팀은 오히려 바짝 안색이 굳었다.

콜린스, KMP-01 초대박 후에 서서히 고인물이 되었던 기획 팀.

그런데 강준석 대리가 숨김없이 그대로 치고 나가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정성근 대리 역시 팀 내의 알력과 같은 일에는 무심했다.

그는 지시를 받은 일에만 충실하고,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획 팀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워드 작업에 정신이 없는 모습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는 배종대 과장의 차가운 시선 따위는 삭 무시해 버렸다.

정성근 대리는 휘파람을 불면서 강준석 대리가 보내온 자료를 취합해서 정리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배종대 과장도 질린 얼굴을 한 채 곧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사실 제일 따가운 눈총을 받은 이들은 박광민 사원과 정영일 사원이다.

두 사람은 신입보다 못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결국 참다못한 임웅 대리, 이영란 대리가 두 사람을 다독여줬다.

자신의 일거리를 쪼개서 두 사람의 밥상 위에 올려둔 것이다.

결국 박상기 차장이 배종대 과장과 이정원 과장과 같이 손을 잡고, 그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일일이 보완해 주었다.

기획 팀은 점심시간이나 퇴근 시간이 되어도 전혀 주변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들은 마른침을 삼킨 체 어떻게 해서라도 일을 끝내려고 노력했다.

“…….”

조성돈 팀장은 기강이 단단히 잡힌 기획 팀의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다. 자신은 팀 분위기를 저렇게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싫지는 않네.’

그는 메일함에 쌓인 팀원이 보내온 자료를 하나씩 확인하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은 애초에 팀 내부에서 정치질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박상기 차장을 지금까지 챙겨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어.’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 역시 최근 최민혁 실장 지시에 휘둘리면서 해이해졌다는 것을 새삼 느낀 것이었다.

‘정신 차리자!’

* * *

조성돈 팀장은 정성근 대리가 보낸 보고서와 기획 팀이 올린 자료를 취합해서 꼼꼼하게 최종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는 이 최종 보고서를 최민혁 실장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최민혁은 갑자기 올라온 보고서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보다가 깜짝 놀랐다. 보고서는 기존에 자신이 한 것과 앞으로 진행된 와컴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보고서를 빠르게 넘기면서 살폈는데, 다행히 스마트폰 사업에 대한 부분은 없었다. 아니, 모바일 산업 생태계와 관련된 부분은 다 빠져 있었다.

정확히는 모바일 생태계를 언급하기는 하지만 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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