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
“다행히 와컴은 이런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들 역시 펜 솔루션을 개발하고는 있지만 그걸 모바일에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일 겁니다.”
배종대 과장은 정성근 대리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그건 나도 의문이야.”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와컴의 다음 세대 솔루션에 대한 것은 정성근 대리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KM 기획 팀 역시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은 와컴 제품을 확인하면서도 관련 내용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박상기 차장은 그 맹점을 바로 찾아냈다.
“아직 와컴도 이 모바일 터치 솔루션 분야 제품은 없어. 있다고 해봐야 PC에 연결해서 캐드 시스템에 연동하는 정도이니까.”
쉬운 말이지만 이 분야 역시 간단하지는 않다. 다른 업체가 와컴과 경쟁에서 무너지는 이유다. 와컴은 이 분야만을 선택하고 집중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조성돈 팀장 역시 팀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내수 시장을 독점하고 있고, 외국 시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매출 자체는 크지 않다고 해도 꾸준히 성장을 하고 있어요. 아무리 봐도 사업부 인수는 어렵겠습니다.”
그랬다.
와컴 이사회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잘나가는 회사를 매각할 리가 없다. 아니, 지분 일부를 내놓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켐코 사업 인수와는 상황이 좀 달랐다.
조성돈 팀장은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이 한 지시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런 의미였구나. 역시 최 실장님답다니까. 문제는 이 와컴 지분 인수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인데.’
다만 그도 최민혁 실장의 단편적인 지시는 이해해도 종합적인 의미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다. 기획 팀 팀장이 되어서 윗사람 의도를 파악조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건 다른 기획 팀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지금 일을 하면서도 아직도 최민혁 지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가끔 최 실장님은 우리와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정성근 대리가 슬쩍 끼어들었다.
“최 실장님은 아마 모바일 산업 생태계 자체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배종대 과장이 툴툴거렸다.
“그건 이제 짐작해. 그런데 지금 진행되는 일을 잘 보면, 또 그렇지도 않잖아.”
정성근 대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미국에서 작업하다가 가져온 보고서를 복사해서 팀원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만 아마 이 내용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최 실장님의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조성돈 팀장을 비롯한 기획 팀원은 깜짝 놀라서 정성근 대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강준석 대리 덕분입니다.”
“강 대리?”
정성근 대리는 따가운 시선을 받았지만, 어깨를 으쓱한 채 강준석 대리의 강점을 말해주었다.
“강 대리는 아직 업무 경험이 없어서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 더 대단합니다. 미국 벨린 소프트에 있으면서 기획실과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정리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간과한 일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켐코 사업부가 좋은 예입니다.”
단순히 이런 말로 설명할 정도로 강준석 대리의 태도가 간단하지 않았다.
강준석 대리는 막히는 일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옆에 사수인 정성근 대리를 이용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화를 내고, 분노할 일이다. 그런데 정성근 대리 성격 역시 보통이 아니다. 그는 강준석 대리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들어주었다.
그러니 비정상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 내막을 잘 모르는 기획 팀은 추론하면서도 설마 했다.
그들도 강준석 대리가 집요한 것은 다들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런 보고서를 내놓을지는 몰랐던 것이었다.
조성돈 팀장조차 이번 보고서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 시간 후에 회의합시다!”
* * *
정성근 대리는 조성돈 팀장의 태도 변화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강준석 대리 사수로 업무 경험을 쌓도록 도와주면서 강준석의 강점을 봤기 때문이다.
강준석 대리는 대부분 사람이 ARN, K투스, IPS LCD, 켐코 사업을 별개로 생각할 때 좀 다르게 접근했다. 부족한 지식은 정성근 대리의 도움을 얻어서 메꾸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은 벨린 소프트 임직원 모습을 보면서 하나씩 고쳐 나갔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 물고 나면 절대로 놓아주는 법이 없었다.
괴짜로 소문이 자자한 정성근 대리조차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징글징글한 친구야.’
강준석 대리는 그 작업을 진행하면서 신입 사원 연수원에서 작업한 보고서도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이 보고서 때문에 최민혁 실장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두 가지 사실을 하나로 엮어나가면서 구체성이 떨어지는 항목이 하나둘씩 메꿔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회사 내에서 갑자기 진행되는 프로젝트 역시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터치스크린 시스템이다. 터치 물결 문제라는 한계가 있는 TN LCD를 극복한 IPS LCD를 주목했다.
두 가지 항목이 연결되면, 또 다른 이슈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디지타이저다.
자연스럽게 디지타이저의 고질적인 특허 독점화 문제가 나온다.
그 특허를 가진 기업이 바로 와컴이다.
결국 와컴 이야기는 최민혁 실장이 기존에 했던 모든 일의 연장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디지타이저 컨트롤러 개발을 진행한 것일까?’
정성근 대리는 새삼 감탄했다. 일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디지타이저 컨트롤러 역시 ARN IP를 바탕으로 개발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조창호 차장조차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지시를 받아서 일을 진행하기는 하지만 영문을 잘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IPS 액정에 사용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정성근 대리가 정리한 보고서는 바로 이 모든 프로젝트를 하나로 엮어놓은 것이다.
다만 아직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차세대 MP3용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일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보고서를 처음 접한 기획 팀은 다들 혀를 내둘렀다.
배종대 과장은 정성근 대리의 능력을 잘 알면서도 이번 일은 도저히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정 대리, 정말 이걸 미국에서 혼자 작업한 거야?”
“강준석 대리를 도와줬을 뿐입니다. 메인은 강준석 대리 혼자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복잡한 보고서를 신입이 만들었다고?!”
“뭐, 강 대리 혼자 모든 자료를 정리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이 진행한 일을 기반으로 해서 각 사업부의 자문을 구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특히 정성근 대리의 역할이 컸다.
다른 사람은 신입 의견이라고 무시할 만한 상황에서도 그러지 않았다.
강준석 대리가 마치 스토커처럼 괴롭혀도 묵묵히 그를 도와주었다.
그런 노력이 하나로 모여서 만들어진 보고서였다.
조성돈 팀장조차 와컴과 관련된 부분을 몇 차례나 확인하면서 감탄했다. 그 역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정말 놀랍네.”
하지만 배종대 과장은 정성근 대리의 성향과 능력을 잘 알았다.
“딱 보니까 정 대리가 강준석 대리가 하는 일을 옆에서 봐줬어. 끝까지 작업을 도와주지 않고야 이런 보고서가 나올 리가 없잖아!”
정성근 대리는 여전히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를 또 해서 정말 힘듭니다. 뭐 이걸 누가 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보고서를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박상기 차장은 새삼 놀라운 눈으로 정성근 대리를 쳐다보았다.
“정 대리는 차세대 MP3를 말하는 거야?”
“최민혁 실장님은 모바일 플랜 자체를 완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그대로 진행이 되어야 하지만 기획 팀에서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보고서 일부만 응용해도 얼마든지 새로운 제품이 가능합니다. 일테면 켐코 유리를 적용한 새로운 MP3입니다. 이 제품은 기스도 전혀 없고, 심지어 터치만으로 동작할 수 있습니다.”
켐코 글라스 이야기가 나오자 기획 팀은 다들 하던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그들은 뒤늦게야 켐코 용도를 깨달은 것이다.
“……!”
액정 기스는 전형적인 문제다. 만약 그 문제를 어느 정도 극복한다면 제품 품질은 더 높아질 것이다. 상품 가치가 올라간다.
“…흠.”
조성돈 팀장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정성근 대리의 의견을 생각해 봤다. 확실히 허황한 주장은 아니었다.
배종대 과장이 툴툴거렸다.
“거기에 K투스가 적용된 무선 이어폰까지 넣으면 정말 대박이겠어.”
“그것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제야 기획 팀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 지시에 따라서 일방적으로 움직였는데, 이제 상황이 좀 달라진 것이다.
조성돈 팀장은 힐끗 정성근 대리를 쳐다보았다.
“기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이미 디지타이저 컨트롤러는 시제품이 나온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결국, 컬러 IPS LCD만 나온다면 바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IPS LCD라…….”
조성돈 팀장뿐만 아니라 모든 기획 팀 직원이 다들 혀를 내둘렀다. 그들도 IPS LCD 소동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오성 전자와 LC 전자의 대립을 지켜보면서도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두 회사가 피 터지게 싸우면서 IPS LCD 시제품이 한 달에 안에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설마 이것 때문이었을까요? 최 실장님이 굳이 무리수를 둬가면서 일을 진행한 이유가.”
조성돈 팀장이 곧바로 각 팀원에게 작업을 배당시켰다.
“일단 정 대리는 가능한 빨리 이 보고서부터 완성시켜.”
“알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각자 배당된 영역을 다 확인해 봐. 필요하다면 오성 전자나 LC 전자 측에도 자문해도 좋아.”
“네.”
“회의는 여기서 끝내지.”
그는 보고서를 다시 살피면서 새삼 탄식했다.
최민혁이 강준석을 굳이 대놓고 키운 이유.
당시에는 강준석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최민혁은 좀 달랐다.
‘강 대리 능력이 이렇게 좋았나? 아니면 정 대리가 잘 도와줘서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최민혁 실장이 굳이 두 사람을 미국 벨린 소프트에 두고 왔던 이유일 것이다.
‘…정말 모르겠네.’
* * *
배종대 과장과 이정원 과장 두 사람은 정성근 대리를 붙잡아서 옥상 휴게실로 데려왔다. 두 사람 역시 눈치는 있었다.
특히 배종대 과장은 지금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 대리 솜씨지?”
정성근 대리는 여전히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강 대리가 주도적으로 한 일입니다.”
“에이 이러지 마. 이 보고서를 신입 사원이 썼다는 말을 믿으라고? 내가 회의 내내 정 대리 생각해서 굳이 더 파지 않았어. 그래도 사실을 알고 싶어.”
집요한 배종대 과장은 도저히 이 일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신입이 과장 이상의 결과를 내놓으니, 신경이 쓰인 것이다.
그건 이정원 과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정 대리, 우리 이러지 좀 말자. 아니, 이제 신입이 이런 보고서를 썼다고 하면, 난 뭐가 돼? 그냥 월급 도둑이나 마찬가지잖아!”
두 사람의 태도는 가볍게 볼 일은 아니었다.
최근 기획 팀이 나름의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이 짜놓은 계획에 따라서 로봇처럼 움직이기만 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팀원들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 사람 마음을 이해 못 하는 정성근 대리는 집요한 두 사람 태도에도 여전히 같은 말만 반복했다.
“정말입니다.”
“진짜야? 정 대리가 혹시 날 엿 먹이기 위해서 이런 상황극을 연출한 것은 아니고?”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단답형으로 나오지 좀 말고, 자세한 설명을 해봐.”
정성근 대리는 따가운 두 사람의 협박에 묵묵히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도 강준석 대리를 돕고 싶어서 도운 것이 아니었다.
강준석 대리가 자신의 보고서를 하나씩 메꿔 가는 작업을 보면서 도움을 청하자 어쩔 수 없이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도움이 생각보다는 많았다.
아니, 과장 직급 이상의 역량이 필요한 일이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정성근 대리는 별생각 없이 강준석 대리가 요구하는 것을 다 도와줬다.
그게 다였다.